며칠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오후 7시가 지나 동태찌개 끓여놨는데 왜 아직 안 오냐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 퇴근하던 길.
우회전을 하기 위해 서행으로 직진 중에 갑자기 운전석 뒷문짝을 들이 받혀 쿵 하는 소리가 났고 즉시 길가에 차를 댔다. 알고 보니 내 기준 좌측 차로에서 운행 중이던 차량이 내 차를 못 보고 차선 변경을 하다가 일어난 접촉 사고였다.
당시 할 일은 많았지만 남편에게 칼퇴근을 하겠다고 얘기했던 탓에 본의 아니게 퇴근 독촉 전화를 받았던 것인데, 내가 갖고 있는 사기 사건 피의자가 유사사건으로 고소장이 추가 접수되어 팀장님과 수사진행방향에 대해 얘기하다가 그만 가족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또 퇴근이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해는 져서 어둠이 내렸지만 아직 한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습한 도로 위에서 배고픔을 참으며 보험회사에 사고접수를 하고 출동을 기다렸다. 가뜩이나 할 일도 많고 출근하기도 싫은 요즘, 맘 같아선 뒷목이라도 잡고 이참에 내일 당장 병가를 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하필 다음날 우리 팀 채송도 있고 한 달 전에 겨우 잡은 별건의 사기사건 피의자 교도소 접견이 예정되어 있어 입원할 정도 아니면 출근이 불가피한 상황.
접촉 사고 후 딱 봐도 오래된 경차에서 내려 우리 엄마뻘 정도 돼 보이시는 운전자분이 난처해하며 내게 연신 사과를 하시니 면전에서는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지만, 사실 나는 하나도 괜찮지가 않았다.
"경찰이라는 조직에 입직했으면 퇴직하기 전에 수사는 한번 경험해봐야지"라는 마지막 30대의 패기로 2024. 2. 21. 자 상반기 인사발령 때 수사과에 지원하여 호기롭게 입문한 신임수사관의 길. 수사환경이 열악한 것은 익히 들어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현실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녹록지가 않았다. 격주로 진행된 2주간의 신임수사관 교육은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고, 오래되고 좁아터진 사무실에 닭장 같은 칸막이(파티션) 안에 갇혀 조사를 받거나 집중해서 모니터를 응시하며 타자 치는 소리,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한 사무실. 심지어 우리 팀은 작년까지 모두 남자직원들이었고 새롭게 합류한 내가 유일한 여성팀원이었다.
형사사법포털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 사소한 것 하나하나 물어가며 진행해야 하는데 언뜻 봐도 바빠 보이는 옆자리 동료직원에게 말 거는 것조차 왜 그리 눈치가 보이던지. 나이가 10살 차이건 20살 차이건 언니 동생하며 격 없이 지내던 민원실(이전 근무 부서) 분위기랑은 완전히 반대여서 팀 분위기 적응하려 몇 개월은 혼자 맘고생을 했더랬다. 수사경력 20년 이상의 팀장님은 내게 항상 존댓말을 쓰시며 사건에 대한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다소 격하고 직설적인 지적(지난번에 말한 부분 왜 또 수정이 안되었냐, 누구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얘기해주는 것이냐는 식)에는 상처받아 화장실에서,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 낯선 아파트 놀이터 앞 정자에서, 퇴근하는 차 안에서 혼자 엉엉 울기도 했다. 일하면서 힘든 얘기 미주알고주알 터놓고 얘기할 팀원이 없어 외롭기도 했고, 업무미숙 + 악성민원 콜라보로 민원도 맞고. 초과 근무를 하고 주말에도 일을 하는데도 사건 빼는 속도가 접수 들어오는 양을 따라오지 못해서 사건은 쌓이고. 몸도 여기저기 고장 나 이직을 고민할 정도로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수사과를 지원해서 들어간 지 불과 6개월 만에.
어쭙잖은 책임감으로 꾸역꾸역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다 보니 베테랑 수사관 팀장님 눈에는 내 수사서류가 건성건성 만든 것으로 보였을 터. 지적을 받으니 더 하기 싫어지고 계속 악순환이었다. 일에 매여있다 보니 가족들, 특히 아직 어린이집에 다니는 두 딸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준비물을 잊어버리거나 키즈노트를 빼먹는 일이 잦아지고 알 수 없는 근육통, 가려움증에 시달려 병원에 갔더니 '자율신경 실조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통증부위에 직접 맞는 주사값이 한 번에 9만 원 이상이었고 스트레스 관리 외에는 완치방법도 없어서 이대로는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딱 일 년만 채워보자. 내년 상반기에 근속(승진) 달고, 육아시간으로 버티다 정 안 되겠으면 육아휴직을 하자 생각했다.
수사.
내가 비부사부서에 있을 때는 수사경찰관이 참 멋져 보였더랬다. 일단 사복 경찰이고, 사건관계인을 노련하게 다루는 모습이라던지, 법지식으로 무장한 이지적인 이미지, 외근 활동도 자유롭고 특별시책을 기획하거나 계장ㆍ과장님 챙김(의전 포함) 안 해도 되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담당 수사관'이라는 이유로 양쪽(고소인 vs 피의자)으로 시달리고, 내가 설정한 수사방향도 결재라인의 생각과 다르면 내 마음처럼 진행되기 어려울 수 있는 점, 수사인력은 한계가 있는데 사건은 물밀듯이 계속 들어오기에 끝이 없고 연중무휴 일이 많고 바쁘다는 점, 집에 가서도 사건 생각을 놓을 수가 없어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점, 내 사건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내 몫이라는 점 등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
마냥 편하고 좋은 일, 혹은 그런 부서는 없겠지만 수사는 경찰 조직에서 조차 천대받는 것 같아 더 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우리 딸들도 엄마는 경찰, '경찰은 나쁜 사람 혼내주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범죄혐의(나쁜 사람) 수사해서 송치(혼내주는 일)하니까 입직 8년 차에 이제야 진짜 경찰다운 일을 하는 건데, 조직 내에서 수사과는 건제순으로 5번째인 데다 '고객만족도', '성과지표'라는 말도 안 되는 잣대를 들이밀며 내부에서마저 수사관들의 사기를 꺾어댄다. 고객? 그냥 민원인이지 고객은 얼어 죽을. 다른 관공서도 아니고 경찰서, 심지어 강제력을 수반하는 업무를 하는 수사부서에서 왜 친절을 강요하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공정한 법집행, 그리고 가혹행위만 아니면 되지 범죄자 인권 운운하다 지금 나라꼴이 이 모양이 됐는데. 인권 같은 허울 좋은 명분으로 범죄자들 유리한 쪽으로 법개정한 사람들은 범죄자 놈들임이 틀림없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지경이다. 그(년)놈들 대우해 줄 예산과 인력을 차라리 범죄 피해자지원용도로 사용하는 편이 맞지 않나.
2024. 2. 21. 자로 발령받고 신임수사관 교육장에서 만나 친해진 타서 동갑내기 친구 직원은 고위험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휴직에 들어갔다고 했다. 타청의 모 수사관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스스로 생을 마감해 폴넷게시판에 댓글로 나마 얼굴도 성명도 모르는 경찰관의 명복을 빌었다. 이 와중에도 국수본은 특별감찰을 진행하여 장기사건관리에 들어간다고 했다. 장기사건은 장기가 되는 이유가 있다. 사안이 복잡하던지, 사건관계인이 많다던지. 하여간 민원에는 벌벌 떨면서 직원들한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이 정 떨어지는 조직. 이렇게 사방이 적인 벼랑 끝 수사관들이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거지 같은 환경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이유는 바로 우리 팀원들이었다.
내가 업무미숙 + 악성(aka. 또라이) 민원에 시달릴 때의 상황을 부연하자면 본래 고소로 접수된 사건은 혐의 없을 시 불송치로 종결하는데, 피고소인이 형사미성년자면 혐의 없을 시 입건을 취소하고 불입건종결해야 하는 절차가 있다. 그것도 명문의 규정이 아니라 실무지침상 그렇게 하는데 최초 고소로 접수된 건이어서 내가 불송치 통지서를 보냈고 최종결정이 전산에 불입건으로 등록이 되었는데 문제는 불복 시 불송치는 이의신청, 수사심의신청이 다 되고 불입건은 수사심의신청만 가능하기에 이것을 물고 늘어져 따지러 온 것이었다. 아직도 가해자들은 교실에서 소화기를 던지고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나.
(참고로 내가 담당했던 사건 개요는 미성년 피혐의자 채팅방 패드립과 관련한 모욕, 명예훼손, 협박이었다)
수사는 사후조치이고 예방조치까지는 해드릴 수 없다, 불입건 통지서 재발송했고 본건은 이미 종결이 되었으니 안내해 드린 불복제도 절차대로 하시라, 했는데도 자꾸만 앉아보라고 언성을 높이기에 더 이상 드릴 말씀 없으니 나가시라, 했더니 민원인이 버티고 있어 대치중인 상황에서 팀원들이 내 편에서 나가라고 거들어 청문감사실, 수사지원팀, 청 수사심의계에 난리(발악)를 쳐 한동안 전화받고 경위서 쓰고 시달린 일이 있었다. 그 민원인은 고소가 취미인 사람이라 피해의식을 기반으로 며칠 후 또 가스검침원을 상대로 고소장을 접수했는데 하필 그날이 우리 팀 접수날이어서 나 아닌 다른 팀원이 피해진술서 작성 관련하여 출석 요구를 했더니 우리 팀원 전체에 대한 기피신청을 내버렸다.
기피사유는 일부 수사관의 고압적인 태도, 불만족스러운 사건처리(정확하게 기억은 안 난다) 등 매우 주관적인 이유였으나 우리서 청문감사관실에서는 팀 기피신청을 받아줬고 덕분에 우리 팀에서는 다시는 그 악성 민원인을 볼 일이 없게 되었다. 그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stressful 했으나 '담당수사관이 어떻게 했길래 민원인이 저렇게 하냐'가 아니라 '너는 잘못 없어, 저 사람이 이상한 거야'는 마인드로 나를 지지해 준 팀원들이 너무 고마웠다.
평소에도 악성민원 전화를 대신 받아주시거나 민원 때문에 내가 작성한 경위서를 보시고 바로 전화해서 왜 쓰라고 하는 거냐고 따져 물으시는 팀장님, 퇴근길 접촉사고를 팀 단톡방에 보고(?)했더니 한걸음에 달려와 주신 부팀장님, 수사민원 응대(악성 포함)도와주고 바빠도 짜증 한번 안 내고 업무적인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주는 반장님들 모두 다.
그래서 일종의 전우애로, 의리로 이 전쟁 같은 수사현실에서 함께 조금 더(최소 1년) 버텨보기로 했다. 내가 여기서 다 포기하고 던지고 나가면 내 사건은 또 남아있는 수사관들이 해결해야만 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해보자.
처음 마음가짐을 마지막까지 유지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데. 나의 가여운 초심은 벌써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지고 할퀴어져서 애석하게도 처음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보자.
(*사진은 본인이 검찰청 채송가서 직접 찍은 우리경찰서 수사과 사건 서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