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그림자
잃어버린 기억을 생각해 내느라 며칠 째 머리가 밤새 지끈거려 한숨을 못 잤다. 집과 회사를 유령처럼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오늘도 초점을 잃은 채로 회사에 출근했다. 컴퓨터를 켜자마자 메모리 플랫폼에서 쉴 새 없이 알람이 울렸다. 아마도 기억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알리는 소리겠지. 차.찬.빛.의 광고 때문이었다. 갑자기 인기가 많아진 게. 그 효과가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모르겠지만.
졸린 눈을 비비며 실시간 인기 기억 검색어 확인 해보는데, 우리가 헤어진 이유라는 검색어가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 저건 어제 미모리에게 기억의 편집자는 무엇을 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기억을 공통 주제로 모을 수 있는 키워드만 생성하면 된다고 하기에 시험 삼아 만든 주제였다. 그래! 이거라면 인기가 많을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다양한 주제들로 기억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잠깐 쓱 훑어봐도, 우리가 헤어진 이유와 관련된 기억들의 제목가 흥미를 끌었다. 네가 케이크 한 조각 안 남겨줘서. 내 친구에게 깻잎을 떼어줘서. 내가 보낸 메시지보다 회사에서 온 메시지를 먼저 읽어서. 막상 제목만 읽었을 때에는 겨우 이거 때문에 헤어졌다고?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들의 기억을 열어 본 사람들은 대부분 박수를 치며 잘 헤어졌다고 응원하고 있었다.
재밌는 현상이었다. 기억을 보지 않았을 때는 깻잎을 떼어줘도 된다 무슨 상관이냐라고 했던 사람들이 그 기억을 보고 나면 부아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나도 모르게 하지 마라고 외치고 있었다는 댓글이 많은 공감을 얻었다.
남의 기억이 이렇게 인기가 많을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기억을 사는 주된 구매자 중에는 글을 쓰는 작가들도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대사들을 많이 건졌다는 후기가 올라올 정도였으니까. 오늘은 엄마의 숨겨진 레시피라는 키워드를 만들어 놓고 퇴근했다. 엄마와 음식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주제이다 보니 주제를 생성하자마자 실시간으로 뜨거운 반응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미모리에게 서둘러 퇴근한다고 말하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최근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 미모리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미모리에게도 일 이외에 대화는 거절한다고 미리 말해두었다.
그렇게 갑자기 친했던 동료를 잃고 나니 마음 끝이 시렸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과 다르게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 듯 곳곳에 벚꽃이 한 움큼 피어 있었다. 따뜻한 바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스치는 바람에 흔들린 내 꽃잎들이 내 눈앞에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떤 익숙한 장면이 떠올랐다.
머리가 희끗해 보이는 할머니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는데, 할머니 주변에 분홍색 복사꽃잎이 날리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큰 나무에 넋이 나가 있었는데, 할머니가 나에게 다가와 어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복사골 마을에 복숭아나무가 참 많았어.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이상한 소문이 퍼지더니 동네 사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지. 그 소문에 의하면 영원히 살 수 있는 봉숭아가 열리는 나무가 있는데, 자신과 악연인 한 명의 목숨만 바치면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어. 얼마나 무서웠겠니? 사람들은 목숨을 빼앗길 사람이 자기가 될까 봐.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 있던 모든 복숭아나무의 씨를 말렸어. 어떤 나무인지 아무도 모르니까. 문제는 그 마을에 영원히 살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마지막 남았던 복숭아나무 씨앗을 훔쳐 달아나 어느 이름 모를 야산에 심었단다. “
할머니는 흐드러지게 핀 복사꽃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문제는 그 모든 걸 꿈꿨던 사람이 기억을 잃어가는 병에 걸렸다는 점이었단다. 그래서 아무도 알 수 없었지. 그 나무를 심은 장소를. 마을 사람들도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 나무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생각했겠지. 아마도. “
"그런데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아?"
"기억이라는 게 스치듯 그림자를 남기거든. 영원히 잃어버린 것 같으면서 어느 날 문뜩 생각이나. 오늘처럼 "
할머니 말에 복사꽃들이 바람에 날려 흔들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나무의 꽃들은 생명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할머니와 손을 꼭 잡고 갔던 언덕 위에 한그루의 나무가 철저하게 아름답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그 나무를 보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복숭아를 먹이면 된단다. 복숭아 씨에는 원래 독이 있거든. 그 독이 복숭아 껍질에 침전해 있다가, 복숭아를 먹은 사람의 몸에 수분 들어가면 차츰 독이 퍼지기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복숭아를 먹은 사람은 시름시름 앓다가 생기를 잃어가는 거란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거야. 이 모든 일이 복숭아 한 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무슨 기억이었을까? 내가 본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인가? 그렇다 하기엔 꿈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할머니가 있었나? 어쩌면 나는 그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향기가 나를 잠시 이상한 곳에 데려다 주었던 것 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잠시 몽롱한 정신 상태로 서 있었는데 시끄럽게 싸우는 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우리가 결혼해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게 헤어질 때를 놓쳐서라고 그게 말이 돼?"
화가 잔뜩 난 여자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남자에게 따지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저 사람은?'
익숙한 얼굴에 나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싸우는 연인들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다행히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고 주변 사람들도 그들의 싸우는 소리에 몰려들고 있어서 나는 그들 무리 속으로 조용히 숨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