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뭘 잘못했는데?"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해도 확실했다. 민사장의 비서였던 세련이었다. 자신의 남편을 보고 어이없다고 웃고 있는 한쪽만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를 보고 흐려졌던 기억에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세련은 남편에게 있는 힘껏 핸드폰을 던졌다. 핸드폰이 바닥에서 튕겨져 떨어졌다. 세련의 남편은 황급히 쪼그려 앉으며 핸드폰을 집었다. 화면이 깨져 보였다. 그리고 세련에게 따졌다.
"당신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그리고 이제 남편 핸드폰까지 뒤지는 거야? 의부증이야 뭐야?"
세련을 앉아서 흘겨보는 남편을 보고 세련은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니 누굴 의부증으로 만들어? 민식 씨 핸드폰의 알람이 하도 울려대서 참을 수 없었다고. 더 메모리 컴퍼니? 처음에 나는 뭔가 했어."
"...."
민식은 마치 숨겨둔 일기장을 엄마에게 들킨 것처럼 어깨가 들썩했다. 그리고 서둘러 세련이 던진 핸드폰을 열어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 그래서 봤어? 봤냐고!"
민식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핸드폰을 들고 있던 두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무엇을 봤다는 것인가?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 모두 그들의 대화를 조금 더 듣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지만. 세련과 민식은 이미 그들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봤지. 당신의 예전 여자친구들과의 기억들. 그녀들이 좋아했던 음식과 장소 심지어 기념일까지 추억이 아주 한 가득이던 만."
"이... 미.. 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 요즘 담배 피우러 가면 회사 사람들이 다 옛 연인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서 나도 안 할 수가 없었다고. 알잖아 회사생활 대화가 끊기면 사회생활도 끊기는 거야. 당신도 해봤잖아."
"당신은 아직 뭘 잘못 한지 모르고 있구나."
세련은 씁쓸한 눈으로 민식을 쳐다봤다. 하지만 진짜 아내가 화난 이유를 모르는 민식은 순진한 눈빛으로 세련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세련은 아무 말 없이 민식의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을 가로챘다. 아마도 남편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는 게 힘들 것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익숙하게 핸드폰에 걸려 있던 패턴을 풀고 핸드폰 바탕화면을 두 번 클릭했다. 오른손으로 쓰윽쓰윽 화면을 넘기더니 민식에게 핸드폰을 다시 보여줬다.
남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또다시 이어지는 숨 막힐 것 같은 침묵. 다시 침묵을 깨는 건 세련이었다.
"옛 연인과 기억은 끝도 없이 저장되어 있더니만, 나와의 기억 폴더는 텅 비어 있는 건 무슨 의미야? 아니다 하나 있었다. 결혼식에서?"
세련은 핸드폰을 민식의 눈앞에 다시 가까이 내밀었다. 화면을 본 민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
"나와는 기억에 남는 추억들이 없었나 보지. 나와는 다르게."
멍청한 놈. 어플 오류라고 말해! 부부싸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민식을 향해 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지 민식은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민식을 내려보는 떨리는 세련의 어깨가 조금은 측은하게 느껴졌다. 남편과 함께한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를 자신의 눈앞에서 깨달은 사람처럼. 당분간 당신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을 것 같다며 쪼그려 앉은 채로 굳어있는 민식을 두고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본 얼굴은 예전과 다르게 많이 야위여 있었다. 자신감 넘치게 민사장님은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오시라고 나에게 말하던 생기 있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이를 몇 번이나 쑤셔서 흐느적거리는 이쑤시개 같다랄까? 그래서 측은한 마음이 일었던 것 같다.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냉혈한처럼 차란을 내쫓았을 때는 분노가 끓어올랐었는데,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날 줄이야. 스쳐 지나가는 세련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슬퍼 보였다. 나는 다 이해한다는 마음으로 눈을 찡끗 감았다 떴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세련이 놀라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나를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커졌으니까. 나는 조용히 손을 올려 안녕..이라고 말하려는데, 세련은 마주쳤던 눈을 피하면서 나를 지나갔다. 빠른 걸음걸이로 내 앞을 사라졌다.
과거의 직장 동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서였을까? 멋쩍게 인사를 하려고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내 귓가에 세련이 남편에게 했던 말이 맴돌았다.
"나와는 다르게...."
그 말은 세련도 더 메모리 컴퍼니에서 기억을 보관했다는 말이었다. 그 기억에 어쩌면 박팀장과 갑자기 한 배를 탄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늦었지만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침묵했지만 이제는 과거의 진실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더 메모리 컴퍼니로 향했다. 사무실 문을 조금 열려 있었는데 사장님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어릴 때 이렇게 귀여웠는데 말이야 도대체 이런 모습은 어디 간 거야?"
"에이. 지금도 귀엽잖아요. 아빠!"
분명 김 사장과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사장님 딸이 있었던 건가? 나는 열린 문에 빼꼼히 두 눈을 갖다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