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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초툰 Apr 22. 2024

과거에 내가 만든 흔적을 따라서

더 메모리 컴퍼니의 대표

 떨리는 손으로 박스를 여니, 그 안엔 놓여있는 물건들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액자와 함께 색이 바랜 노란 노트가 보였다. 액자를 들어 그 안에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거칠게 그은 검은 연필 색선이 여러 개 보였다. 익숙한 그림이었다. 차란이의 영상에서 보았던 자이언트 개미가 그려져 있었으니까. 그럼 차란이 가 보낸 것인가? 합리적인 의심이 생겨났다. 그리고 영상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제는 뚜렷하게 보이는 그림 아래 적혀있던 문구를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그녀가 한낮 개미일진 몰라도, 만약 누군가를 문다면 평생 지울 수 없는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자국이라....뚜렷하게 보였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궁금증을 뒤로 하고 개미 그림 위에 투박하게 놓여 있던 빛바랜 노란 노트를 집었다. 노트 겉표지에는 잔뜩 볼펜 똥이 묻어 있었다. 손으로 노트의 겉표지를 쓰윽 쓸자, 먼지에 쌓여 드러나지 않았던 표지 글자가 자신의 자취를 들어냈다. 진회색으로 The memories라고 적혀 있었다. 그 단어를 보는 순간, 마음을 쿵하고 일렁이기 시작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파열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숨을 삼키며 노트의 첫 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거기엔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나는 진실을 분명 알고 있었다. 단지 묵인 했을 뿐.'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이건 분명 내 글씨체였다. 내가? 뭘 아는데? 떨리는 손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승진! 그깟게 뭐라고 나를 이렇게 옹졸하고 치졸하게 만들었는가? 늦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복수를....'


 분노를 꾹 누르 듯, 종이에 도장 판 것처럼 눌러써진 글씨체에서 왠지 모를 자책감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알고 있었고, 승진을 위해 묵인했다는 것인데.... 그게 뭘까? 아무리 생각해 내려고 해도, 빈 상자를 흔드는 것처럼 내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빨간 글씨로 무언가가 휘갈겨 있었다.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글자들. 나는 천천히 그 글자를 읽었다. 


"그러니까. 세련 씨는 알고 있었다. 나에게 말했으니까. 그들 사이가 좀 이상하다고. 조금 더 확실해지면 알려준다고 했었는데. 그들. 그러니까 민사장과 박팀장이 분륜이었다!"


 확실치 않지만 분명 그렇게 써져 있었다. 민사장과 박팀장이? 갑자기 온몸에 전율과 함께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묵힌 기억에 몸이 반응이라도 하듯이 온몸에 난 솜털이 서고 등골까지 서늘해졌다. 이제야 빠진 퍼즐의 조각들이 맞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래서 세련 씨가 분륜을 무기로 박팀장을 협박한 거였어. 다시 일하고 싶으니까, 차란이를 쫓겨나도록 도와달라고 말이야. 그렇다 해도 내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묵인했다고? 하지만 분명 나라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 그럼 늦게나마 복수를 했나? 그런데 왜 나는 이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소중한 기억을 더 메모리 컴퍼니에 팔기 전에 있었던 일인 것 같은데, 왜 난 기억을 못 하는 거냐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트를 다시 한번 샅샅이 훑어보았다. 하지만 다른 내용은 없었다. 왠지 모를 절망감이 나를 덮쳤다. 텅 빈 어둠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멍하니 소포 박스 안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순간, 현관 복도 창문에 햇빛이 스쳐 지나가면서 소포 바닥에 반짝이는 종이가 보였다.

"이게 뭐지?"

 나는 바닥에 놓아두었던 개미 그림을 들었는데, 소포 바닥에 작은 누런 종이 한 장에 눈에 들어왔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 종이를 집었다.  

아마도 오래전에 받은 명함인 듯 빛에 바래져 누렇게 변해버린 명함이었다.

그리고 명함에는 앞에는 '더 메모리 컴퍼니' 익숙한 회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충격도 잠시 그 아래 조그맣게 적힌 문구가 눈에 띄었다.


'만약 당신의 악연인 한 명의 목숨만 바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게 너무나 익숙한 꿈속 할머니가 말했던 복숭아나무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그 이야기가 명함에 적혀 있을 수 있지? 나는 더 자세히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회사 대표 이름이 조금 이상했다. 명함 속 적혀 있는 이름이 김사장이 아닌 김수연이었다. 이건 나잖아? 혼란의 연속. 그럼 할머니 이야기도  꿈이 아니고 다 사실이었어? 그럼 왜 나는 아무 기억도 없는 건데?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는데, 마치 내가 한 것 같은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느낌이랄까? 그 순간 터벅터벅 텅 빈 복도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등뒤에 다가오자 걸음소리가 멈췄다. 나는 숨 막히는 공포로 인해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검은 그림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수연아...."

김사장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래...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집에 들어가서 할까?"

너무 무서워 몸이 굳어버린 상태였던 나는 숨조차 소리 내어 쉴 수가 없었다. 김사장은 그런 나를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더니 우리 집 현관문 앞에 섰다. 깊은 숨을 몇 번을 내쉬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830703.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겠거니 생각했다. 너와 어머니는 각별했으니까. 들어가자 수연아. 밖은 아직 너무 추워!"

용기를 내서 뒤를 돌아봤다. 김사장은 잔뜩 미간을 찡그린 채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내가 궁금한 모든 것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을 것이다. 진실을 마주한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내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진실을 알고 싶었다. 내가 왜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는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 건지. 나는 힘겹게 한 걸음씩 발을 떼어 진실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미 현관문은 열렸고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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