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가 내 기억인걸까?
김사장이 들어간 문틈 사이로 지저분한 우리 집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예전이라면 벗자마자 치웠을 뱀의 허물처럼 벗어 놓은 옷들. 청소기라는 적수를 오랫동안 만나지 않아 마냥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먼지와 머리카락들 까지.
살인마! 기억의 실체라는 주제로 실화탐험대에 신고를 당해도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마냥 악플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장면이었다. 결백증까지 있었던 내가 왜 이렇게 변한 걸까? 그건 아마 집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 많아졌고, 집은 더 이상 내가 온전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닌 그저 잠만 자는 공간으로 바뀌어 버려서가 아닐까? 사무실이 더 집 같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실제로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던 사무실과 다른 거실 온도에 나도 모르게 내 두 팔을 꽉 껴안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집 안에 살아있는 것은 없는 듯 고요했다.
시간이 멈춰 버린 괘종시계.
샛노랗게 잎이 말라죽어버린 화분들.
식탁 위 수북이 쌓여 있는 고지서들.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약봉지들.
어쩌면 사람뿐만 변한 게 아니라, 이 집 자체도 오래전부터 생기를 잃어버려, 이젠 온기마저 안 남은 잿더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기만 가득한 거실에 얼어붙은 듯 서 있던 내 옆에 어느새 따뜻한 커피믹스를 타서 온 김사장이 식탁에 앉으라며 가득 쌓여 있던 고지서를 한 곳에 치우면서 말했다. 마치 김사장의 집처럼 모든 행동들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사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네가 지금의 너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고 말이야."
다소 진지한 김사장의 모습에 나는 그동안 나를 왜 속인 건지 따져 묻기보다는 진실을 알아가는 쪽을 선택했다.
"한치의 숨김없이 다 말해주세요. 도대체 제가 무엇을 잃어버린 건지...."
깊은 한숨과 동시에 김사장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늘 어머니가 해주시던 이야기가 있었어. 복사골 이야기. 원망하는 사람의 목숨을 주면 영원히 살 수 있게 만드는 나무가 있다고 말이야. 나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 왜 그 흔한 파란 휴지 줄까? 빨간 휴지 줄까? 하는. 흔하게 어린아이들을 놀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요?"
"그런데. 어렸던 너는 그 이야기에 매료된 것 같아 보였어. 매일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으니까. 하지만 기억이 왔다가 가는 어머니로서는 더 깊이 설명하긴 쉽지 않았을 거야."
김사장은 옛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힘든 것처럼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아무도 소리도 없는 거실에 커피를 마시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래도 수연이 너는 그 복사골 이야기를 적고 또 적었지. 언젠가 그 복사골을 찾아갈 사람처럼 말이야."
있을법한 일이었다.
나는 한번 꽂히면 무엇이든 끝을 보는 사람이었으므로, 점점 김사장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문제는 복사골은 실제 하지 않았다는 거였어. 왜냐면 복숭아나무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었거든."
"그게 무슨.....?"
"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어?"
"아니 그건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아니야. 왜 사람들 몸 속에 70%이상이 물로 이뤄졌겠어? 물이 나무에게 꼭 필요한 성분이니까. 그런 물을 영양분으로 나무에 열매들이 열리는 거지. 그 열매들은 다른 말로 기억이라고 불리지.“
"말도 안 돼요!"
21세기에 무슨 동화 같은 이야기인가? 마음속에 나무라니. 내가 말도 안 된다고 말하자 김사장은 정색하며 말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더 메모리 컴퍼니의 일도 따지고 보면 기억을 읽는 거잖아. 사실 처음부터 너의 아이디어였지만. 나무에게 생명을 주는 물. 그러니까 체내에서 나오는 땀에 기억이 담겨 있다고."
"하지만...."
"그래. 믿기지 않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네가 나를 찾아와서 말했던 말들을. 한낱 어린애의 투정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점점 말이야. 사람들을 정작 살아가게 하는 건 기억이라는 너의 설명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어. 생각해보면 우리모두 기억이라는 자양분으로 살아가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했던 추억, 가족들과 같이 갔던 여행의 기억, 자신을 무너지게 만들 만큼 잊고 싶은 기억까지. 만약 그 기억들이 없어진다면…..더 이상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게 된 거야. 빈 껍데기만 남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게 복숭아나무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은유적인 표현이었지, 다른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기억을 빼앗으면, 기억을 빼앗은 사람은 그들의 기억을 자양분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그런...."
"하지만 기억은 제가 없어졌는데..."
"그래, 그게 대가였어. 어머니가 너에게 차마 설명하지 못했던, 너의 기억은 다른 기억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 왜 한 나무에 열리는 열매의 수는 정해져 있듯이 말이야. 너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다른 사람들의 기억 아니 그 나무까지 썩게 만들고 나서 후회했지.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말이야."
"제가요?"
노트에 적혀 있던 복수. 늦지 않았기라고 적혀있던 글씨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네가 이미 나를 찾아왔을 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
"뭘 말이에요?"
"나마저 못 알아보게 되었으니까."
"당신이 누군데요?"
김사장은 씁쓸한 얼굴로 나를 올려보았다. 누구길래. 나한테 이러냐고 따지려다가. 어렴풋이. 어릴 때 한강 시민 공원 수영장에서 보았다던 미모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얼굴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빠.. 아빠.. 나 여기 있어요 구해주세요.' 숨이 막혀 정신이 흐릿해져 가는데 얼핏 보이던 그 얼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럼.. 미모리는 뭐예요? 기억을 읽는 그 A.I는?"
"ME.mory 너의 기억 그 자체. 내가 힘들게 모은 너의 기억의 조각들이란다. 수연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나라고?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까지 내가 미모리에게 느꼈던 감정이 나에 대한 연민이었다는 거야? 현기증이 몰려왔다. 혼란스러운 나의 상태와 상관없이 김사장은 묵묵히 할 말을 이어갔다.
"그래. 많이 혼란스러울 거야.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렴. 네가 봤던 기억들. 수만과 지민이. 그리고 기억을 잃었다는 세련 씨의 남편. 심지어 너의 기억이라고 믿었던 그 기억들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걸."
그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다 연결되어 있다니.' 그게 또 무슨 말인가? 생경한 기억들이 여기저기 튀어 오르며 나에게 속삭였다.
'이건 내 기억이 맞아? 어디서부터 내 기억인 거야?'
김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 곧 흐를 것 같은 눈물이 고여있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수연아. 그럼 이제부터
심장을 단단히 조여두는 게 좋을 거야.
미모리가 남은 너의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