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차가운 기계가 아닌 사람과 통화하고 싶었다.
문틈 사이로 본 사무실에는 불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오직 사장실에서 나오는 파란 불빛 하나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나? 나는 나도 모르게 조심스레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사장실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대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니까 너는 어릴 때도 분명 기억이 난다는 거지?"
"그럼요. 제가 한강 수영장 야외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서 수영장에 풍덩하고 빠져버렸는데, 아빠가 물에 빠진 저를 못 찾고 한참을 헤매셨잖아요. 저는 하늘색 물아래에서 아빠에게 저 여기 있어요 뻐끔대며 소리치고 있었는데 아빠가 그대로 저를 스쳐가서 얼마나 당황했는데요.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아빠가 저를 찾으셨어요."
"하하하하 내가 그랬던가?"
어느새 나는 사장실 창문까지 다다랐다. 빼꼼히 열린 창문으로 대화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활기찬 대화소리와 다르게 사무실은 너무 적막했고, 어두웠다. 나 또한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김사장에게 인사를 했을 텐데. 타이밍을 놓쳐서였을까? 어느새 도둑 같은 염탐꾼이 되어있었다. 까치발을 들고 사장실 문 앞까지 왔기에, 갑자기 인기척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열린 창문 틈에 눈을 가까이 대었다. 보이는 건 덥수룩한 김사장의 뒤통수와 그 옆에 놓인 검은 모니터 뒷면이 얼핏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 없다니 분명 대화소리가 들렸는데. 김사장은 누구와 대화한 거지?
나는 갑자기 일렁이는 궁금증에 발 뒤꿈치까지 바짝 들고서 더 안쪽을 보려는 데 갑자기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뒷면만 보이던 모니터가 끼익 소리를 내며 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아빠. 손님이 온 것 같아요."
그건 분명 모니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놀란 나는 모니터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화면에 비친 모습을 보고 놀라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홀로그램이었지만 분명 내 어릴 적 얼굴이 모니터에 띄어져 있었다. '쿵' 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김사장이 놀라서 사장실에서 뛰쳐나왔다.
"괘.. 괜찮아요? 수연아 아니 수연 씨"
"....."
사람이 너무 겁을 먹으면 할 말을 잃게 된다고 했던가? 사장실 창문에서 나오는 파란색 불빛이 김사장의 얼굴을 비추며 넘어져 있던 나에게 다가오는 데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다 설명해 줄게요 수연 씨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김사장이 팔을 나를 향해 뻗었고, 나는 필사적으로 그 팔을 뿌리치고 사무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때는 최대한 이곳에서 멀리 도망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나지 않았다. 땀이 미친 듯이 흘러 시야를 흐려도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김사장이 내 어릴 적 얼굴을 보고 마치 부녀 사이처럼 대화하고 있었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도망쳐서 집에 도착했을 무렵, 내 핸드폰엔 김사장에게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찍혀 있었다.
지금은 그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젖은 몸 그대로 침대로 향했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한숨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바로 악몽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오후가 돼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뻐근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간신히 팔을 들어 킨 핸드폰엔 다행히 어떤 메시지도 없었다. 찰나의 안도가 배고픔을 불렀던 건지. 배가 고파왔다. 편의점이라도 갈 생각에 대충 옷을 구겨 입고 집 밖으로 나왔는데 의문의 택배가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순간 내가 뭘 샀나? 떠올려 봐도 최근에 주문한 물건이 없었다. 심지어 적힌 보낸 이와 받는 이 주소 모두 검은색 사인펜으로 찍찍 그어져 있었다. 나는 잘못 배달된 건가 싶어 그냥 두고 편의점을 갔다. 하지만 편의점을 다녀온 사이 아직도 그 자리 그대로였다.
나는 택배 상자에서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숫자. 송장 번호를 검색했다. 검색하니 이상하게도 이미 2023년 12월 13일에 배달이 이미 완료된 택배였다. 갑자기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박스에 적힌 회사명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다단계 회사였다. 처음이었다. 인터넷에서 명확히 다단계라고 적혀있는 회사가. 점점 더 불안함이 내 목을 조여왔다. 다단계 물건을 이제는 이렇게 판매를 하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과거에서 온 택배라니. 나는 떨리는 손으로 운택배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울렸다. 하지만 현재 통화하는 상담원이 많다며, 보이는 A.I. 상담원과 통화하라는 링크가 도착했다. 하지만 나는 링크를 클릭하지 않았다. 이제는 차가운 기계가 아닌 감정이 닿을 수 있는 사람과 통화하고 싶어졌다. 결국 통화량이 많아 15분 만에 통화가 상담원과 연결되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우.. 아니 저희 집 앞에 이상한 택배가 놓여 있어요."
잔뜩 긴장해 속삭이는 내 목소리에 순간, 상담원이 내가 미친 사람처럼 느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사실인 것을. 다행히 상담원은 내게 침착하게 송장번호를 물어봤고, 나는 박스에 적힌 송장번호를 불러주었다.
“이상하네요. 작년에 다른 곳에 배달 완료된 택배가 왜 거기에…?”
“제 말이요.”
"누군가 아시는 분이 갖다가 놓으신 거 아니에요?"
"그럴 분이 없는데...."
김사장을 잠깐 떠올렸지만, 내가 어제 그러고 갔는데 이상한 물건을 우리 집 앞에 놓고 갔을 리가 없었다. 상담원은 다시 확인해 보고 알려 주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30분이 지나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집 문 앞에 저것은 정말 무엇인가? 나는 궁금함 반 용기 반을 모아 그 택배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상하게 보낸 이와 받는 이 주소에 가리려고 그어놓은 사이펜의 모양이 왠지 영어 알파벳으로 어떤 이름을 지칭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실눈을 하고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SUYEON.... 수연? 내 이름인데?"
긴 침묵 뒤, 나는 분명 수연이라고 적혀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담원에게 다시 전화 올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갈색 택배 상자를 칭칭 감고 있는 테이프를 풀기 시작했다. 마치 기억에 가려져 있는 진실을 푸는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