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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초툰 Apr 29. 2024

남의 기억, 판도라 상자 펼치기

사라진 당신의 기억은 어디에?

"수연 씨 안녕하세요?"

김사장의 핸드폰에서 미모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분한 목소리가 마치 나에게 들을 준비가 되었냐는 듯 묻는 것만 같았다.


"안녕 모리."


 몇 분 간의 침묵. 김사장 말이 사실이라면, 모리는 내 기억이었다. 묘한 익숙함 저 아래 깔린 왠지 모를 불편함이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기억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제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세요? 수연 씨?"

"응...."

"기억은 사실상 나무의 열매이니까. 나무의 뿌리들이 다 연결되었듯이, 기억들도 그렇게 얽기 설기 이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사장님의 요청에 따라 수연 씨의 기억을 찾기 시작했어요. 퍼즐을 맞추듯이 말이에요."

김사장의 핸드폰에서 기억을 로딩하는 것 같은 효과음이 들렸다. 띠띠띠띠..'로딩완료'라는 소리와 함께 미모리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알게 되었죠. 처음에 수연 씨는 민사장에게 복수를 하기로 했다는 걸. 수연 씨는 이미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에요."

"아....."


모리의 말에 언뜻 민사장의 술주정으로 하던 말들이 떠올랐다.

"내가 사장이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 심지어 나는 기러기 아빠야. 우리 딸 지민이 우리 장남 수만이 미래를 위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니까 버틴 거라고...."


'지민이? 수만이?'


순간 계획형 수만 이와 이를 바꾸려고 했던 지민이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미모리가 대답했다.

"맞아요. 그 기억들. 당신이 민사장에게 훔쳐온 기억이에요. 민사장에게 아이들이 전부라는 걸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그럴법한 설명이었다. 내가 만약 복수를 꿈꿨다면 쉬운 상대부터 제거하기 시작했을 테니까.


"기억을 잃은 민사장에겐 더 이상 가족의 소중하다는 그의 삶의 의미, 그 자체가 사라져 버렸어요. 오히려 세일즈 박팀장에게 집착하기 시작했어요. 이혼하고 박 팀장에게 가겠다며 박팀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집착했죠."

"박팀장은 그런 거 딱 질색일 텐데..."


 항상 회식을 할 때마다 박팀장은 자신의 자유로운 연애관에 대해서 설명하곤 했다. 집착 없이 자유로운 만남. 한 사람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만나면 다양한 형태의 행복감을 느낀다는 말에 다들 멋있다며 박수를 치곤 했다.


"정확해요. 수연 씨. 민사장이 박팀장에게 집착할수록 박팀장은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했죠. 왜냐면 박팀장에게는 민사장은 그저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한 그 수단 이상, 이하도 아니었거든요.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엔 끝이 났죠. 문제는..."

"문제는?"

"박 팀장은 야망 있던 여자라는 거였어요. 민 사장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죠."

그래. 박팀장이었다면, 본사 헤드정도는 만나고 끝났을.... 순간, 한 명의 이름이 떠올랐지만 '에이 설마 아니겠지'라는 생각에 머리에 떠오른 이름을 지웠다.

"스테파니 이사님이라고 기억하세요? 수연 씨?"

"어... 하지만 이사님은 여자 아니야? 스테파니 누가 들어도."

"누가 들어도 여자로 오해할 만하죠. 그래서 일부러 스테파니라고 지었데요. 직접 만난 사람만 자신을 알 수 있게 방어막을 쳐 났던 거죠. 그리고 수연 씨가 그만두던 그 해에 박팀장은 최고의 실적을 올렸어요. 자기보다 훨씬 어린년인데 자기 머리 위에 있던 수연 씨를 엿 맥여서 쫓아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었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본사에 가서 올해의 직원상을 받았겠네."

"네. 그곳에서 우연히 스테파니 이사님을 만났고, 바로 새로 잡을 밧줄은 이 사람이다 생각했던 거고요! 그 소식을 들은 수연 씨는 분노했어요. 절망도 했죠. 하지만 이를 악 물고 이제 시작한 복수를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 수 없었죠. 당신은 스테파니 이사님에게 메일을 썼어요. 민사장의 기억을 마치 cctv처럼 첨부해서, 차란 씨 일부터 민사장의 분륜 까지."

"그래서?"

 "당연히 회사가 한바탕 난리가 났죠. 민사장은 지방 발령에, 박팀장은 바로 해고조치. 세련 씨의 복직 취소조치까지. 쉴세 없이 칼바람이 불었어요. 아마도 전 애인에 대한 스테파니 이사님의 분노가 인사 발령의 결정적인 촉매제 역할을 한 것 같아 보였어요. 결국, 박팀장은 자신이 매달려 있던 밧줄에 불이 붙어 떨어져 버린 신세가 되었죠."

"그럼 모든 복수가 끝났겠네."

모리의 설명에 어렴풋이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이스를 외치며 좋아하는 모습부터, 환호하는 내 모습까지. 하지만 모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듯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알아차려버린 거예요. 남의 기억을 몰래 읽는 기쁨을. 그리고 그게 실제 일어난 일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갈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내가 더 메모리 컴퍼니를 세운 거야?"

"네 합법적인 회사는 아니었지만요. 당신은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을 구한다고 남의 기억을 읽거나 재밌는 기억은 훔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어요. 하지만 그보다는 다채로운 기억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커 보였죠. 왜 유명한 연예인이 사귄다는 기사를 보며 진실을 아는 자만이 뀔 수 있는 콧방귀. 그 기쁨? 불행하게도 그 기쁨에 치러야 할 대가를 모른 채 말이죠."

 

 미모리의 대사가 끝이 나자, 김사장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모리 지금부터 내가 설명할게 고마워."

"네 사장님."


식탁 유리 위에 비친 김사장의 얼굴은 모랄까? 자책감, 후회가 가득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수연이 너를 말릴 수 있었을 텐데. 전혀 몰랐어. 무신경한 아빠였지...."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데요?"

"어느 날, 네가 나를 찾아왔어. 도와달라고. 그동안 네가 모은 기억들을 메모리 칩에 모아서 왔더라고."

김사장은 손을 넣어 주머니를 뒤적이며 집히는 나노 메모리칩 몇백 개를 식탁 위에 뿌렸다.

"이렇게나 많이요?"

내가 그러니까 한 사람이 모았다고 하기엔 많은 기억의 조각이 식탁 위에 펼쳐졌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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