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시 돌아가는 것.

나와 미모리.

by 야초툰

김사장의 저음 목소리가 동굴에 숨어 있던 내 기억을 불렀지만, 결국 아무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식탁 위에 셀 수 없이 뿌려진 메모리칩들이 나를 향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넌 남의 기억을 훔친 죄로, 너의 기억이 영원히 사라지게 될 거야!"


도대체 얼마나 많은 기억을 훔친 걸까? 아마도 마약에 중독되어 가듯, 복수를 위해 잠깐 담갔던 발이 한없이 그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겠지.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막의 알갱이들이 내 기억들이 흔적도 없이 쓸어가 버렸을 테고. 기억이 사라진 그 자리엔 김사장의 조명이 꺼진 방안에 반짝이는 두 눈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네가 나를 찾아왔을 때에는 거의 기억이 사라지고 없었지. 너 역시 네 손바닥엔 적힌 이곳을 찾아가라는 주소와 함께 내 이름이 보고 나를 찾아왔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그래서요?"

"네가 훔친 기억들을 돌려주기로 했어. 그리고 그들 기억 속에 숨겨져 있는 너의 기억을 끄집어내기만 한다면 너의 기억의 조각들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김사장은 그때가 생각난 건지 떨리는 두 손을 포개어 이마를 짚었다. 다시 떠오르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려 보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래 쉽지 않았지. 사람들 찾아가서 기억 돌려드리겠다고 말했다가 문전박대도 당하고, 잃어버린 기억 따윈 없다고 대려 욕을 한 사발 얻어먹기까지 했으니까. 그때 얼마나 자괴감이 들더니. 너를 위해 아무것도 못 하는 나에게... 말이야."

"그래서 포기하셨어요?"


기억을 잃어가는 딸을 위해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은 아버지의 마음이라. 침울해 보이는 김사장의 표정을 보니 가슴이 시큰거렸다.


"포기하고 싶었지.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 그런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지금의 모리였어."

"모리요?"

"그래. 그 당시에는 네가 사람들을 기억을 훔치면 저장하거나 분류하기 위해 구독한 프리미엄 서비스로 구입한 이름 없는 A.I. 였는데, 점점 인간의 감정으로 채워진 수많은 기억들을 읽다 보니 그들과 동화되기 시작했던 거야. 그런 A.I. 가 나에게 제안을 했지. 사람들에게 희미해진 기억을 되살려준다는 명목하에 훔친 기억을 돌려주자고 말이야."


돌려주기 위해 필요한 명목상의 이유. 그럴싸했다 하지만 누구부터? 첫 시작이 중요했을 것이다. 아마도 퍼스트 펭귄이 될 사람을 찾았겠지. 내 복수의 시작인 사람. 아마 그 사람을 찾았겠지. 그렇다면...


"차란이었겠군요."

"맞아. 우리는 차란 이에게 소포를 보냈어. 빛바랜 노란 노트에 적힌 이야기가 차란 이에게 죄책감을, 그리고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딸을 위하는 아버지의 눈물 번진 편지가 차란이의 굳게 닫혔던 마음을 열게 만들었지. 거기서부터가 모리와 나의 계획의 시작점이었으니까."

"그럼 제가 입사할 때 제 소중한 기억을 가져간다고 한 것도?"

"맞아. 기억을 가져간 게 아니야 오히려 그동안 우리가 모은 기억의 조각을 너에게 넣은 거였어. 그래서인지 너는 쉽게 기억에 동화되었어. 우리가 보여주는 기억들을 보며 너는 화냈다가 울다가 웃으며 모리에게 감정을 느끼기까지 했으니까."

"사무실에 없으셨으면서 어떻게?"

"사무실에 내가 없지만, 듣는 귀는 항상 열려있지. 그렇지? 모리?"


김사장이 꺼진 핸드폰에 말을 걸자, 마치 듣고 있었던 것처럼 모리가 대답했다.


"그럼요. 아빠."


소름 끼치게 익숙한 목소리. 내 목소리였다. 모리가 핸드폰 안에서 커져 있었을 때도 켜져 있었을 때도 모든 대화를 기록하는 것처럼 깜빡거렸다.


"기억이라는 게, 이렇게 어디든 흔적을 남기는 거야. 그리고 결국 모리와 나는 모든 너의 기억을 모았어. 마지막 네가 훔쳤던 세련의 남편의 기억까지 지금 돌려주고 오는 길이니까. 그러니까."


김 사장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혼란스러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사무실로 다시 가자. 이제 내 딸 수연이로 돌아갈 모든 준비가 되어있어. 잃어버린 너의 기억을 찾으러 가자."

공허한 눈, 그간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주름이 깊은 자리를 차지한 이마 그리고 나를 향해 내민 떨리는 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내 아버지라면, 내가 그의 얼굴을 그렇게 변하게 만든 원인일 테니까. 나는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어서 와요. 수연 씨."


모리가 우리를 반기는 인사를 했다. 나를 위해 만든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니 예전에 일하던 이곳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거의 쓰러져 가는 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기억을 살리기 위한 공간이라니. 정신이 점점 선명해지니, 궁금한 것들이 떠올랐다. 나는 아까부터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하얀 방을 향하는 김사장에게 물었다.


"제가 만약에 기억을 다 돌려받으면 다른 사람들의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와 상관없는 기억들 말이에요."

"수연이 네가 기억을 찾게 되면 나는 영원히 이 사이트와 회사를 없앨 거야. 뉴스에는 더 메모리 컴퍼니가 감당할 수 없는 부채 때문에 서비스를 종료하게 되었다고 나올 테고. 어차피 내 목적은 너의 기억을 찾는 거였으니까."

"그럼 다른 사람들의 소중한 기억은 알 수 없는 저장공간에 갇혀 열어볼 수도 없게 된다는 거예요?"

"맞아. 어차피 사람들이 기억하지도 못했던 흐려진 기억이잖아.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하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랬던가? 하며 잊힐 거야."

"말도 안 돼. 정말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읽으며 좋아했어요. 잃어버린 자신을 찾은 느낌이라는 댓글도 읽었었는데..... 그럼 모리는요 모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모리는 너에게 모든 기억을 주고 내가 이름을 지어주기 전에 A.I.로 돌아가겠지. 미모리가 너의 기억 그 자체니까."

"모리가 사라진다고요?"

"아니야! 수연아 모두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사라지는 게 아니고. 너는 너로 미모리는 A.I.로. 사람들은 예전처럼 희미한 기억을 갖고 사는 거지.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단다 그러니까."


김사장은 나에게 하얀색 헤드폰을 건넸다. 헤드폰 양쪽 패드는 나에게 기억을 전송하기 위해, 그동안 모아둔 내 땀을 분무기를 뿌려 미리 적셔 놓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김사장의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이게 과연 맞는 것일까?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 김사장은 남들의 소중한 기억들, 그리고 내 소중한 동료 모리 손에 쥔 것들을 놓으라고 하지만 나는 놓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위해 동료의 불행을 눈 감을 수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헤드폰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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