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가리는 토마토
나는 토마토 인간이다. 얼굴이 항상 빨간 사람. 물론 술에 취해서도 아니고, 화가 난 상태도 아니다. 평상시 얼굴이 남들보다 아주 조금 빨간 것뿐인데, 사람들은 나를 토마토 같다고 말한다.
둥글둥글한 얼굴에 작게 박힌 단춧구멍 두 개.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말아버리는 옹졸한 입. 타오르는 것 같은 얼굴색과 짧은 머리카락. 얇은 피부층이 안면 홍조증으로 붉게 달아오른 것일 뿐이라고 우겨보지만,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은 이미 웃고 있다. 마음은 다른 사람과 같이 평온한 상태라고 해도, 사람들은 나를 보며 부끄럼을 많이 타는 편이시냐며 짓궂게 놀린다. 처음엔 얼굴이 남보다 빨갛다는 걸 몰라서, 다른 반응에 당황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시선에 익숙해졌다. 마흔 줄 넘어서는 미스 홍당무의 주인공처럼 " 그래요, 제가 빨개요. 그래서 어쩌라고요."라고 외치고 싶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옹졸한 입은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만 외치는 소리일 뿐, 마음속 소리는 단전을 통과하지 못하고 머릿속을 뱅뱅 돌다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그렇다면 남들 앞에 서야 했던 호텔리어로써의 삶은 또 어땠을까?
호텔에서 11년,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연기했다. 하얀 봉지를 뒤집어쓴 토마토처럼. 억지웃음을 짓고, 속내를 숨기며 타인과의 관계가 제일 쉬운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하얀 봉지 안에 습기가 차는 줄 모르고. 답답한 일상을 버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남들에게 평범한 하루가 나에겐 더 큰 에너지를 쏟아야 지나가는 하루라는 걸 깨달았다. 체력이 소진되어 갔다. 일을 하기 위해 억지로 썼던 흰 봉지를 이제는 습관처럼 써야 하는 일이 늘어났다. 가게 문을 열 때, 음식을 주문할 때도 그 사람 눈을 쳐다봐야 하고, 길을 걷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날 때도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야 했다.
나에겐 타인과의 만남이 숨 막히는 일상이 되었다. 식은땀에 젖은 두 손은 봉지 끈을 꽉 붙잡은 채로. 바람에 그 봉지가 날아가 혹여 빨개진 내 얼굴을 들킬까 봐.
그러다가 갑자기 도망치고 싶어졌다. 숨 막히는 호텔에서도, 차가운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마치 일단 시작은 했는데, 끝을 맺지 못하는 소설처럼. 책을 덮어버렸다. 도망쳐버렸다. 그랬더니 타인과의 대화는 더 힘들어지고. 갑자기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도 힘들어졌다. 내가 있는 공간에 누군가가 탈까 봐. 타던 엘리베이터 멈추고 문이 열릴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 증상이 폐쇄공포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엘리베이터를 탈 때부터 숨이 막혀야 했는데, 나는 다른 사람이 내가 서 있는 공간에 들어오면 다리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그건 사람에 대한 공포. 그 자체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밖으로 뛰어나갔다. 떨리더라도 가게에 들어가 한 마디를 건넸다. 동네에 있는 모임도 신청했다. 내가 못 하면 환경 자체를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토마토가 익으면 양분이 풍부해지는 것처럼, 끓는점을 올려 타인에 대한 적응력을 올리기로. 그렇게 노력했더니 타인과 달라서 힘들었던 내 성향이 독특한 캐릭터가 되었다. 지나가면 쉽게 잊히는 사람이었는데, 타인에 기억에 남게 되었다. 말 그대로 붉은 기 얼굴이 개성이 되었다. 낯가리고 수줍었던 내가 다시 토마토 인간으로 태어났다. 누군가 내가 지나가면 외친다.
"토마토야, 토마토 어디 가니?"
이제는 그 말이 부끄럽지도 창피하지도 않다. 얼굴이 빨개서 부끄러웠던 나는 더는 도망가지 않았다. 위풍당당한 토마토 인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