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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대로되는사람 Oct 21. 2021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사라진 자신을 되찾는 시간

  아이의 등교가 끝난 오전 9시. 오늘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다정하게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까지 등교시키는 세상 좋은 엄마의 역할을 무사히 마쳤다. 허둥지둥 현관을 들어선 순간 마주하게 되는 집구석 꼬락서니. 다시 현관문을 열고 어디든 좋으니 나가고 싶은 그런 날들이 무한 반복되면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이 시간에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없다고 생각했던 내 시간들을 긁어모아 나를 위한 어떤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침이 달라졌다.  

   

 그동안 늘 책이 고팠던 엄마. 하지만 엄마라는, 주부라는, 아내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책을 펼칠 여유가 없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오후 2시, 생계를 위한 출근 전까지 해야 될 일들이 산더미처럼 느껴졌지만 지금부터 미루고 미뤘던 ‘내 일들’을 먼저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에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아이와 함께 나도 같이 준비를 한다. 아이의 책가방을 챙기며, 작은 에코백에 나를 위한 물건들도 함께 챙긴다. 책 한 권, 노트 한 권, 작은 가죽 필통, 커피 한잔을 채운 텀블러를 챙겨 넣은 것이 전부다. 하지만 나의 소박한 그 에코백을 한쪽 어깨에 걸쳐 매는 순간, 세상 그 어떤 최고의 명품백이 부럽지 않은 행복을 안겨준다. 그리고 무작정 집을 나와 근처 도서관이든,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든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글이 쓰고 싶은 날에는 차 안에서,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나를 위한 시간을 갖겠다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2시간 정도 나를 위한 ‘내 일들’을 위해 매일 어디론가 출근을 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잠시 다른 일들을 버려두고 시작된 이 선택 덕분에 나는 더 좋은 엄마가 되어가는 것 같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워진 그 시간에 엄마는 더 과감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미래’라는 것을, ‘꿈’이라고 하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채워진 시간은 엄마의 시선과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알랭 드 보통의《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 나오는 한 구절. “일주일 내내 이 집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고 내 머리가 하잘 것 없는 생각들로 얼마나 복잡해지는지 알아?” 나도 이런 말을 수없이 내게 던지며 지난 결혼 생활 기간 동안 주부 9단인 척, 살림 고수인 척하며 소꿉장난 수준의 살림을 해왔다. 그렇게 성에도 차지 않고, 발전도 없고, 도대체 관심도 생기지 않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 일을 10년 남짓 해오면서 매일 이렇게 평생을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까지 들었다. 그때 겨우 세 식구로 구성된 스무 평 남짓 작은 집구석을 그나마 사람 꼴로 살아가는 집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내가 들이는 시간과 노력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많은 질문들이 던져졌다. ‘이렇게 살림을 해도 되나?’, ‘이렇게 아이를 키워도 되나?’, ‘도대체 다른 집들은 삼시세끼 무얼 해 먹고 사나?’, ‘공과금이나 각종 세금, 생활비등은 얼마나 지출이 되고 있나?’, ‘떨어진 생필품은 뭐지?’ 이 작은 공간을 위해 떠오르는 하잘 것 없는 생각들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들을 쏟아냈고, 금세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야 될 일들, 처리해야 될 일들, 챙겨야 될 일들로 가슴까지 답답해지려고 할 때, 불쑥 몇 시간 전에 읽었던 책 내용들과 주인공들이 나를 다독인다. 책 읽던 그 시간에 꿈꿔보았던 나의 보물지도가 복잡한 머릿속에 펼쳐진다. 그동안 꿈꿔왔던 많은 일들이 녹녹지 않은 현실 앞에서 늘 무너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결혼 생활이, 육아라는 시간이 엄마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엄마의 일상에 책과 함께 할 시간을 내어주면서 이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다. 책을 통해 신선한 방식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되었다. 새로운 프레임을 가지고 삶의 방향을 정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매일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내 삶의 공간에서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아이는 어느덧 초등학생이 되었고, 남편은 대학원생에서 벗어나 직업인이 되었고, 나 또한 스스로 아줌마의 삶만 크게 느껴졌을 뿐, 분명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일하는 여성으로서 점점 성숙해지고 있었다. 많은 책들은 내게 위로를 건네며 이렇게 말을 건네주고 있었다. “너의 작은 움직임과 소소한 듯한 일상이 사실은 사람을 키워내고 있었던 거야. 잘하고 있구나!” 현실에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엄마의 시선과 마음엔 분명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책을 통해 다시 미래를 꿈꿔보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는 짧은 시간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존재가치가 느껴지는 멋진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공감되고, 도움이 될 것 같은 구절들을 끊임없이 메모하고, 그때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글로 정리해두는 시간만으로도 나는 일상에서 느껴졌던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있었다. 무언가 나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해준 것 마냥 스스로가 기특해졌다. 하루가 지나면 어제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던 삶을 벗어나 매일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을 정리해두는 일은 분명 삶에 큰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냥 그냥 과거라는 나의 시간 속에 묻혀 흘러갔을 별것 아닌 소소한 일상도 소중한 추억이 되고, 미래를 계획하는 인생지도가 그려지는 듯했다. 무엇을 위해 살고,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던 ‘나’라는 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열심히, 가능하면 더 많은 시간들을 나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고 싶어졌다.      

 책 한 권 들고나간 엄마의 짧은 외출은 생각보다 얻은 게 많았다. 다시 들어선 집안 풍경은 더 이상 예전처럼 힘들게, 불만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가 급하게 먹고 남기고 간 아침 밥상을 보면서 오물오물 아이의 작은 입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지고, 급하게 출근하느라 아이의 등교를 보지 못한 남편에게서 온 아이의 안전한 등교가 잘 이루어졌는지 확인하는 문자에도 애정이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진다. 엄마 스스로를 챙기며 사라진 엄마의 시간을 되찾는 시간이 준 선물이다. 몇 개월 습관처럼 이루어진 엄마의 아침시간 만들기는 이제 ‘일’인 듯 ‘놀이’가 되어 굳이 에코백을 챙겨나가지 않고도 집에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집안의 일거리들에서 잠시 눈길을 돌려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 우선순위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책장으로 눈길을 옮겨 혼자서 누리는 그 짧은 시간이 좋다. 읽고 있는 책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글을 쓰는 손이 빨라질수록, 차곡차곡 쌓이고 채워지는 어떤 행복감에 가슴속 허기가 달래 진다. 그렇게라도 내어준 나만의 짧은 충전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집은 나에게 작고 답답한 집구석이 아니다. 우주를 품을 만큼 마음껏 상상놀이를 즐길 수 있는 꿈의 놀이터이며 궁전으로 탈바꿈이 된다. 그러니 어찌 즐겁게 쓸고, 닦고, 지지고 볶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달라진 기분, 충전된 마음을 안고 시작된 집안일은 나를 순식간에 살림 잘하는 엄마로 만든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작된 집안일은 속도가 붙고, 어느새 다시 분주한 출근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일상은 반복되지만,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어 그곳으로 향하는 것이 감사함으로 밀려온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사라진 엄마의 시간을 찾는 그 시간을 통해 엄마의 지쳐버린 일상에 아물 것 같지 않던 마음의 상처, 자존감의 상처는 매일 생채기를 내는 대신 희망을 품게 한다. 그렇게 나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기로 결심한 짧은 시간 덕분에, 엄마의 알 수 없는 공허감과 허무함으로 뚫려버린 가슴속 구멍들이 메워지고 있다. 머릿속 생각들이 몸으로 옮겨지면서 지극히 당연했던 일상들이 감사함으로 전해졌고, 반복되는 일상도 전보다 지루하지 않게 되었다. 오로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 일상에 더해질수록, 그 사라진 시간을 되찾으려 할수록, 내 삶의 색깔은 더욱 밝아지기 시작했다. 일상의 떨리는 설렘, 기다려지는 짧은 시간이 있다는 것이 삶에 놀라운 집중력과 감사함을 선물해준다는 사실을 경험하며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이라고 느끼게 해주고 있다.      


 나를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내 아이, 내 남편을 더 잘 챙길 수 있었다. 내가 채워지는 순간,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식사가 더 감사해졌고, 우리가 함께 하는 공간이 더 이상 답답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내 시간을 내는 것이 더 이상 희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함께 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하루 중 짧은 시간을 서로 ‘따로’ 또 ‘각자’라는 이름으로 갖기 시작한 시간 덕분에 엄마는 이제 ‘함께’라는 소중함과 ‘끈끈함’이라는 진한 감정을 배워가고 있다. 엄마인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스스로를 찾는 짧은 시간이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 언제나 그런 시간을 선택하는 하루는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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