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다섯 살이 될 무렵, 워킹맘으로 살아온 지난 5년이라는 시간 속에, 철저히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며 살아온 그 삶 속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삶의 무료함을 달래고, 꿈을 꾸며 미래를 계획하던 내가 어느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이의 수면시간을 겨우 조절해 책 몇 장을 읽으려고 해도 지친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점점 무기력함은 더해져 갔고, 몸무게는 늘기 시작했으며, 피부는 푸석푸석 늘어짐의 징후까지 동시에 나타나고 있었다. 무엇을 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나’라는 삶의 시계가 고장이라도 난 듯, 멈춰버린 때가 그 시점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책 한 권을 들고, 아이가 깨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간절한 마음을 품고, 가뭄에 단비 같은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 나만의 골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붉은빛을 내는 스탠드를 켜는 순간 내 눈에 들어와 버린 꿈 많던 시절에 만들어 놓았던 ‘드림보드’. 읽으려고 들고 앉았던 책 대신 책 정리, 방 정리를 하며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작은 책장 위에 액자처럼 걸쳐놓듯 세워둔 그 드림보드. 나만의 그 보물지도와 마주하는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촉촉이 적셔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물기가 턱 밑에서 뚝뚝 방울이 되어 떨어질 때까지 그대로 멈춰 바라보고만 있었다. 책상 한쪽에서 째깍째깍 소리를 내는 작은 시계 소리에 맞추어 내 가슴속 과거의 시계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과거의 시간에 맞춰진 시계 소리였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나의 가슴속에서 째깍러리는 미래의 시계 소리를. 아직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를 느꼈다. 엄마가 되면서 이미 ‘나’라는 시곗바늘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해 같은 자리에서만 몇 년을 멈춰 서서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한 자리에 모여 있었을 뿐 멈추지 않고 희미하게 소리를 내고 있음을 나는 분명히 들었다. 빨리 건전지를 갈아주라는 그 외침을. 충전이 필요하다는 그 외침을.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 같은 그때, ‘나’라는 삶의 시계가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그날 밤, 남편에게 말했다. 뒤늦게 대학원 다니며 공부하는 남편 대신,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나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고. 이제 박사과정도 마쳤으니 나도 정말로 이루고 싶었던 내 꿈을 위해 한번은 도전해 보겠노라고. 그 시기 나는 워킹맘으로 살며 자신의 일과 공부에만 집중하는 남편에게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기 때문에, 좀 더 단호하고 비장한 태도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힘을 주어 말했다. “동의를 구하거나 지원을 바라지는 않겠어요. 다만 육아와 집안일을 철저하게 분담해야 해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 내 이름 앞에 새로운 타이틀을 붙일 수 있을 만큼 나를 위해 시간을 낼 거니까요. 헤어질 생각이 아니라면, 같이 사는 동안 서로의 꿈을 응원해주는 부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이 끝나자 남편은 아주 가볍게, 내가 너무 비장했나 하는 민망함이 들 정도로 흔쾌히 내 의견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편은 기대 이상으로 집안일과 육아를 거들어주기 시작했다. 남편의 서툴기 짝이 없는 도움들이 성에 차지 않아 삐걱거림과 부딪힘이 없지는 않았지만, 음식 만들기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아이와 놀아주는 일, 설거지, 집안의 각종 세금들을 처리하는 일 등은 나보다 훨씬 잘한다. 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6개월 만에 책을 출간하면서 ‘작가’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이름 앞에 붙일 수 있었다. 남편에게 큰 소리를 쳐놨기 때문에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잠을 줄여가며 글을 썼다. 하지만 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참 행복했다. 때론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한다면, 그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시켜, 마음이 담긴 그 길이 자신에게 좋은 길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듯, 꼭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행복감으로 자신의 존재감이 스스로에게 드러나는 길이 멋진 길이다. 이후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가족과도 더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환경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가까운 주변 사람은 더더욱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바뀌어야 한다. 당장 모든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면, 남편과 헤어질 수도 없다면,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좋은 일들, 멋진 일들을 찾아 나서는 쪽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 스스로를 찾고, 준비하고, 도전하고, 지속하기를 반복하며 가족과 어느 정도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방법이 된다. 뒤돌아 생각해보니 그 적정한 거리 유지함이 오히려 마음의 거리는 더욱 좁히지 않았나 생각될 때가 많다. 엄마의 삶이 즐거워지고 엄마의 꿈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빨라지니 가족들과 지내는 짧은 시간도 더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더 많이 웃게 된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인생이 있고, 나는 내 인생을 산다는 생각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서로의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서로를 응원하는 때가 올 것이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지켜줘야 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각자의 세계에서 성장하는 시간을 거듭하며 살아온 가족은 분명 다를 것이다. 서로가 자랑스럽고 고마운 존재로 남을 테니까. 가족관계 속에서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든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집중하는 순간, 집착이 되고, 삶은 더욱 구질구질해진다. 길지 않은 엄마의 육아 시간 동안, 결코 짧지 않은 한 남자의 여자로 사는 시간 동안 나도 이것을 깨닫기까지 정말 오락가락하는 나의 감정 곡선과 수없이 마주하며 스스로 싸워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나를 먼저 돌아보고, 내 생각들을 정리하고, 그것을 하나씩 실천하며 살기로 마음먹는 순간, 나는 스스로를 나만의 즐거운 상상놀이터로, 인생 놀이터로 초대해 놀 줄 아는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하고 싶고, 배우고 싶고, 가고 싶고, 되고 싶고, 마주하고 싶은 세상이 너무 많아 오래오래 살고 싶다.
그렇게 아이가 잠들어 있는 이른 아침 2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더 젊은 날에 나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책을 읽고 간단히 리뷰를 남기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글 같지도 않고, 리뷰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의 글쓰기를 하면서도 쓰고 있는 그 순간이 좋았다. 소소하다 못해 잡다한 글쓰기, 지극히 사적이고 가치를 따질만한 쓸모의 글쓰기도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쓴다’는 ‘쓰고 있다’는 그 시간이 좋았다. 생각해보니 워킹맘으로 살며 늘 분주한 일상과 그날이 그날인 무료한 삶, 생활 반경은 점점 좁혀져 이제는 살고 있는 스무 평 남짓의 좁은 집과 일터가 전부였던 삶. 그 좁은 곳에 갇혀 마음의 문까지 꼭꼭 걸어 잠그고 살아왔다. 아이가 생기면서는 더욱 그랬다. 어디든 마음껏 다닐 수 있도록 풀어놔줄 수 없는 내 발목에 족쇄까지 채우고서야 포기하는 마음으로 간신히 버텨냈던 시간이다. 그런 삶 속에서 내가 나를 위해 무언가 해볼 수 있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냈다는 것이 스스로 기특했다. 글을 쓰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는 정말 나를 둘러싼 시공간을 초월해 마음껏 상상하고, 마음껏 울분을 토하며 미친 듯이 행복해했다. 가끔은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일상의 밑바닥을 낱낱이 글로 쓰며 드러내는 것이 마음치유가 됐다. 그런 시간을 가진 후, 나만의 공간, 나만의 골방을 빠져나올 때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은밀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짜릿함이 있었다. 그 비밀스러움을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과 블로그를 통해 공유하는 그런 글쓰기 시간이 나를 참 행복하게 했다. 내가 살아가고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고 느껴졌고, 그런 공간이 나에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곳에서, 짧은 시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다시 세상에 뛰어들 기운을 얻었다. 심신이 지치고, 사람들에게 치였던 나를 온전히 만나 치유하는 시간, 치유하는 공간이 있음에 감사했다.
엄마로 살아보니, 엄마에게 자기 정화의 시간, 자기 회복의 장소는 반드시 필요하다. 삶이 자신의 통제능력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두려워진다. 실직이나 병에 걸림, 사랑하는 이의 죽음 같은 굵직한 일들이 아니어도 삶이 위협적인 상황으로 내몰릴 때가 있다. 엄마가 되면 안다. 아이가 아프거나 다치기만 해도 안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엄마의 발목이 묶이고, 일시적으로나마 엄청난 정신적, 체력적 소모를 경험하는 일이 수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그런 도전적인 상황에서 무력해지지 않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과 장소가 없다면 우리는 쓰러진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안전지대에서 숨을 고르자. 구겨진 마음도 추스르고, 구석에 몰린 자신을 위로도 하며, 새 힘을 얻을 준비를 해보는 것이다. 그런 시간을 가져본 사람은 결코 외부의 환경이 쉽게 자신을 쓰러뜨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흔들림 없는 눈빛과 살아갈 힘을 회복한 단단한 마음이 그 사람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에겐 나를 찾아 나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꼭 마련되어야 한다. 그때 온전한 내가 될 수 있다.
하얀 종이 위에 가슴속 모든 말들을 토해내듯 채우다 보면 마음이 진정되어갔다. 때론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쓱쓱 종이 위를 스치며 지나가는 연필 소리가 가슴을 후련하게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글들이 많았지만 내 멋대로 갈겨쓴 흔적들이라도 남긴 날에는 가슴속에서 ‘오늘도 너는 살아있구나, 그래 한 번 잘 살아내는 오늘을 만들어봐’라고 말을 건네주는 것 같았다. 글 쓰는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를 마주할 수 있었고, 글 쓰는 그 일 자체가 나의 일부가 되고, 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엄마인 나에게 어느 순간 가장 확실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글쓰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