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씨앗

by 장수기


피아노를 배우기 전까지 나는 악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악보에 대한 두려움은 악기를 배우는 두려움을 낳았다. 층층이 쌓여있는 저 수많은 음표들을 어떻게 두 눈으로 읽어내고, 어떻게 양손으로 짚어내는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외국어보다 낯설고 암호보다 난해한 음표들이 내게는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높고 멀게만 느껴졌다.


피아노 레슨 첫날. 선생님은 성인용으로 나온 바이엘 교재를 들고 오셔서 피아노 위에 펼쳐 놓으셨다. 그리고 앉는 자세와 손가락 모양에 대해 짧게 설명해 주신 다음 '도'의 자리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피아노 건반에는 총 12개의 '도'가 있으며 그중에 가장 가운데에 있는 도를 '가온 도'라고 부른다고 하셨다. 다음으로는 손가락 번호를 알려 주셨다. 책에는 왼손과 오른손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고 각각의 손가락에는 1번부터 5번까지의 숫자가 차례대로 적혀 있었다. 왼손과 오른손 모두 엄지손가락부터 시작했다.


드디어 나는 교재에 나와 있는 그림처럼 나의 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 번호에 맞추어 건반을 누르는 연습을 시작했다. 숫자 3이 나오면 3번 손가락을 누르고 5번이 나오면 5번 손가락을 눌렀다. 신기하게도 악보 없이도 나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계속 연습하다 보니 피아노를 친다기보다 마치 손가락으로 숫자 맞추기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학원에 오기 전까지 나는 피아노 레슨 첫날에는 무엇을 배우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처음부터 피아노 악보를 보고 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피아노를 치기 위해서는 먼저 손가락 번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만 봐왔지 오늘의 나처럼, 피아노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첫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나는 아직까지 커다란 씨앗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 바닥에 흘리면 다시 줍기 어려울 만큼 작았고, 아무리 큰 씨앗도 모두 내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시작은 씨앗을 닮았다. 그래서 작다. 그래야만 시작할 수 있고 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연스러운 사실을 나는 자주 까먹는다. 미미한 시작은 보지 못하고 창대한 끝만 보고서 시작조차 하지 못했던 날들이, 이것은 나의 길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이제 나는 악보를 두려워하는 일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모양의 악보는 아주 한참 뒤에나 내 앞에 나타날 것이며, 그때는 나도 내 앞에 놓여있는 악보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


피아노는 악보가 아닌 손가락 번호부터 시작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첫 피아노 수업에서 배우게 된 가장 놀라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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