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건반은 흰건반 52개와 검은건반 36개, 이렇게 총 88개의 건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나는 43살을 먹고 알았다. 피아노를 시작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나는 주로 가운데 건반 근처에서 퐁당퐁당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내가 연습하지 않는 피아노 건반 소리도 궁금하고, 피아노에게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하는 마음으로 맨 낮은 곳에서부터 맨 높은 곳까지 차례대로 하나씩 눌러보았다. 내 예상대로 아래쪽에 있는 건반은 낮은 소리를 냈고 위로 갈수록 가볍고 짧고 높은 소리를 냈다.
맨 아래쪽 건반과 맨 위에 있는 건반은 평생 몇 번이나 소리를 낼까 궁금해져서 작곡을 전공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친구에게 맨 끝에 있는 건반들도 악보에 나오는지, 내가 아직 바이엘을 치고 있어서 나오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더 높은 단계에 가면 나오는지 물어보았다. 친구는 현대 음악이 아니면 맨 끝에 있는 건반은 거의 칠 일이 없다고 대답해주었다.
악보에도 잘 등장하지 않고 평생 거의 눌러볼 일 없는, 학원에서 우진이가 내 방에 들어와 장난을 칠 때나 한 번 소리를 내는 맨 끝에 있는 건반들은 왜 있을까? 내가 생각한 답은, 거기까지 피아노이기 때문이다.
복숭아 농사를 지으면서 좋은 점 중에 하나는 복숭아나무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복숭아나무의 전부를, 하나하나 모두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꽃이 필 때도 복숭아나무였고, 꽃이 질 때도 복숭아나무였다. 크고 탐스러운 복숭아가 달려 있을 때도 복숭아나무였고, 잎도 열매도 없이 맨 몸뚱이만 홀로 서 있을 때도 복숭아나무였다. 거기까지 복숭아나무였다.
내 삶의 그 텅 빈 시간은 왜 있었을까.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았을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나무처럼 서 있기만 했을 뿐이었는데. 그런 나에게 피아노 맨 끝에 있는 건반과 하얀 겨울의 복숭아나무는 내게 다정히 말해준다. 거기까지 너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