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의 박자

by 장수기

피아노 배운 지 꼭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길래 나와 보니, 앞집 보리밭에 보리파종이 시작되었다. 굴뚝 모양의 긴 통이 달린 기계가 강아지 꼬리를 흔들듯이 그 통을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보리 씨앗들이 무심하게 흙 위에 떨어졌다. 가을의 정점을 지나는 요즘, 온 사방은 잘 여문 곡식과 노랗게 익은 벼를 수확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보리는 이제 시작을 한다. 이제 막 피아노를 시작한 나처럼.


2000평 가까이 되는 앞집 보리밭은 우리 동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이다. 원래는 복숭아 밭이었는데 앞집 아저씨가 돌아가시면서 복숭아나무들도 뽑혀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복숭아 대신 인삼이 자라났고, 인삼 밭으로 5년을 살다가 1년을 쉬고 3년 전부터 보리밭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덕분에 나는 밥으로만 먹던 보리가 실제로 자라는 모습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하얀 눈이 내린 겨울 아침. 강아지들과 이 넓은 보리밭을 뛰어다닐 때 나는 이곳을 '마이 센트럴 파크'라고 이름 지었다. 나에게는 이 보리밭이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만큼이나 넓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 차가운 눈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모두가 잠자는 듯이 보이는 이 시간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보리의 싹을 볼 때, 보리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박자를 살고 있는 듯 보였다.


긴 시간 나는, 나의 어긋난 박자를 후회하며 보냈다. 어쩌면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은 취업을 하는 시기에 다시 미대를 가겠다고 홍대 앞 미술학원을 다닐 때부터 내 박자는 어긋났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대학시절, 수업은 빼먹고 장충단 공원에서 할아버지와 배드민턴을 칠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긋나기 시작한 나의 박자는 나의 계획과도 어긋나기 시작했고, 이 세상과도 어긋나기 시작했으며, 나는 아주 멀리 뒤처져 보통의 박자도 되지 못했다.


두 번 다시는 안 올 것처럼 호기롭게 떠난 고향땅에 5년 전 다시 내려와 어쩔 수 없이 복숭아 농사를 짓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인생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복숭아 농사를 짓는 동안,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대학도 보내주었던 복숭아는 내 마음도 다시 살려주었다. 그 살아난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피아노였다. 긴 세월 뇌사 상태에 빠져 있던 사람이 어느 날 누워있던 침묵을 깨고 검지 손가락 끝을 까딱하고 움직이던 그 순간이, 내게는 피아노였다.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내 귀에 가장 먼저 영향을 주는 것은 템포였다. 나보다 10초만 빠르거나 10초만 느려도 곡의 느낌이 틀어졌다. 설령 아무리 훌륭한 연주자가 연주를 한다 해도 나의 호흡과 맞지 않으면 끝까지 듣기가 힘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빠르기가 분명히 있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빠르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요즘, 거둬들이기도 하고 뿌리기도 하는 가을 들판을 보며, 보리에게는 보리의 박자가 있고 벼에게는 벼의 박자가 있으며 나에게는 나의 박자가 있음을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어긋난 박자를 살아온 게 아니라 그저 나만의 박자를 지키며 살아온 거라고, 지나간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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