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의 자리

by 장수기

오늘은 피아노 학원에서 라의 자리를 배웠다. 엄지손가락을 '라' 건반 위에 올려놓고 시작해서 라의 자리라고 불렀다. 그동안 나는 '도'부터 시작하는 도의 자리, '솔'부터 시작하는 솔의 자리를 배웠고 오늘이 그 세 번째 자리였다.


라의 자리는 전에 배운 자리들과 분위기가 달랐다. 밝고 화창한 하늘에 갑자기 빗방울 가득 머금은 먹구름이 낀 기분이랄까. 그저 시작을 '라'부터 했을 뿐인데, 더욱이 솔과 비교하면 겨우 한 칸 위로 올라갔을 뿐인데 이렇게 소리의 색깔이 확 바뀌다니. 나는 그게 참 신기하고 왜 그런지 궁금했다. 라의 자리에 있는 노래들을 피아노로 연습할 때는 내 마음도 구름이 끼어 비가 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복숭아를 솎을 때도 자리가 정말 중요했다. 복숭아의 생과 사는 복숭아를 솎는 내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열매가 어느 자리에 있느냐가 그 열매의 삶과 죽음을 결정했다. 달려 있는 위치에 따라 어떤 열매는 땅에 떨어지고 어떤 열매는 살아서 달고 맛있는 복숭아가 되었다. 나는 피아노 왕초보라 잘은 모르지만 피아노도 자리가 중요함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겨우 한 칸이라는 말은 도로 집어넣어야 할 것 같다.


자리가 바뀌니까 엄청 허둥댔다. 집을 옮긴 사람처럼,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 악보를 보고 치는데도 노래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연습했던 실력(?)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정말로 피아노를 처음 치는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속으로 생각한다. 아, 나는 역시 빨리빨리 배우는 사람은 아니구나.


내가 봐도 안쓰러울 만큼 헤매는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봐주고 난 뒤,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찬찬히, 더듬더듬, 손가락으로 한음 한음 짚어가며, 처음 가는 동네를 걸어가듯 연습을 한다. 그렇게 치고, 치고, 또 치고 5번쯤 치니까 감이 좀 잡히기 시작한다. 처음엔 음악 같지 않던, 흩어진 구슬 같았던 소리들이 하나로 연결이 되면서 점점 노래가 되어 간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연습을 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어느새 리듬 위에 올라 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엔 해내는 사람. 그것 또한 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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