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죽기 살기 아니면 뻔뻔해지기

by 최예또

소정의 성과는 있었지만 최종 합격이 아닌 이상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다음 오디션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다음 오디션은 다름 아닌 생에 첫 오디션을 봤던 극장에서 진행하는, 얼마 전 오디션 장에서 우연히 만난 그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지금 공연을 올리고 있는 중인 연극이었다. 나는 이미 그 친구에게 이 연극의 한 배역이 나와 잘 맞을 것 같다고 추천받았었던 바였다.


오디션 당일 날, 가는 길이 조금은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극장의 진행 중인 공연 캐스팅 보드판에 이제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게 된 그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내 얼굴도 이렇게 캐스팅 보드에 붙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웃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다 나도 따라 빙긋이 웃어 보였다. 왜인지 그 친구가 잘하라고 귓가에 속삭여주는 것 같았다.


무대 위로 올라서니 객석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나에게 연기의 기본기가 나쁘지 않으니 개성 있는 연기를 준비해 보라고 조언을 해주셨던 그분. 친구에게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은 게 있어서 그런지 그날따라 괜스레 더 그분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는 사람을 만난 양 이렇게 첫인사를 던졌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희끄무레 웃으며)네. 전에도 지원을 했었던가요?"

"네. '마이 고스트'(가명) 때 지원했었어요. 개성 있는 연기를 준비해 보라고 하셔서 연습 많이 해왔어요."

"아, 이름 들어본 것 같네. ㅇㅇ이 친구분 맞으시죠?"

"네, 맞아요! 제 얘기 들으셨어요?"

"ㅇㅇ이가 자기 친구라고 하더라고요.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네, 맞아요. 오래 소식도 모르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 대학로에서 마주쳤어요."

"그랬군요. 그럼 준비해 온 연기 한 번 볼게요."


자유연기가 끝나자 그분은 앞에 놓인 대본들 중에서 '엄마'역에 해당하는 대본을 읽어보라고 주문했고, 나는 즉석에서 받은 대본을 대중적인 엄마의 톤으로 읽어보았다. '딸'역에 지원했는데 '엄마'역의 대본을 읽어보라고 시키는 것이 속으로는 조금 떨떠름했지만, 연출자가 보기에 내가 '엄마'역에 더 가깝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연기가 끝나자 그분은 약간은 흡족한듯한 표정을 짓더니 연기 외에 다른 장기는 없느냐 물었고, 나는 내 노래방 18번을 부르고 나서 오디션을 마칠 수 있었다.


오디션을 마치고 나는 서울대입구로 향했다. 나와 같은 처지의 배우지망생들끼리 소소한 술자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빠듯했던 일정 탓인지 오랜만의 음주 탓인지 어떻게 귀가했는지도 모를 만큼 부어라 마시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못한 채 침대에 뻗어버린 그다음 날, 전날의 음주로 인한 숙취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내 핸드폰으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낙산씨어터 <행*> 연극에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종 합격되셨으며 첫 연습 일정은 ㅇㅇ일 ㅇㅇ시입니다. 확인 후 답장 부탁드립니다.]


나는 문자를 읽자마자 놀라서 펄쩍 뛰었다가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문자를 소리 내어 찬찬히 읽어 보았다. 눈 씻고 다시 봐도 합격이라고 적혀있었었다. 내가 드디어 배우가 된 것이었다. 이는 연기를 전공하지도, 연기학원에 발도 디뎌보지 못한 내가 무작정 도전한 대학로 연극 오디션 중 단 네 번 만에 이룬 쾌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