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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힘행 Oct 09. 2021

어미 나무

캐나다 살이

캐나다 살이에서 공원 산책은 나한테는 수업 시간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는 숲으로 배우러 간다. 캐나다 침엽수림은 전 세계 최고의 풍경들 가운데서도 단연 손에 꼽힐 만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 본연의 모습을 보존하려는 국가적 노력 때문에 북적이는 도시 한가운데에도 공원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숲을 거닐 수가 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취해 마치 선사시대로 시간 여행을 온 것이 아닐까 공상에 빠지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구급차 소리 때문에 백일몽에서 깬다.


공원에 유난히도 내 눈에 띄는 나무가 있다. 종류는 다르지만, 형태는 같은 널싱 트리(Nursing tree)라는 별명을 가진 나무다. 우리말로 번역해 본다면 '유모 나무', '젖먹이는 어미 나무' 정도 되겠다. 이 나무는 밑동 지름이 1m 남짓 되고, 한때는 여봐란듯이 기세를 떨쳤을 법한 아름드리 덩치를 가졌다. 그러나 불현듯 맞닥뜨린 태풍의 습격에 허리가 잘려 나갔다. 죽은 지 수년이 지난 듯하다. 그런 나무 밑동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씨가 심어지고, 살아있다고는 할 수 없는 주검의 몸에서 나무는 부활하여 한 생명을 키우기 시작한다. 간혹 새 삶을 시작한 어린 나무 중에는 어미 나무의 양분을 완전히 흡수하여 어미 몸이 자기 몸인양, 밑동을 장악해서 실로 살벌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늙은 어미는 피부가 부스러지고 그 살이 분해되어 가는데, 어린것은 푸르고 싱싱한 자태를 뽐낸다. 이 나무를 보노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색게 하는 생명의 신비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니, 나에게 회초리를 든다.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쏟는 헌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비교하게 한다. 


Nurse stump in Goldstream Park, Victoria

거의 매일 찾아오는 이 공원을 걸을 때마다 어미 나무와 마주한다. 어미 나무를 만날 때마다 한국에 계시는 엄마 생각이 난다. 우리 엄마가 나를 가지고 하도 입덧이 심해 생쌀을 씹어 삼키면서 참았다고 하셨다. 엄마는 내가 여섯 살 때 혼자가 되시고 막 한 살을 넘긴 남동생과 나를 혼자서 키우셨다. 먹을 것이 없어, 하루에 두 끼를 먹을 때가 많았는데, 그중에 한 끼는 라면이었고, 그나마도 면을 우리 오누이에게 먹이고 엄마는 국물만 드셨다. 


고단한 인생을 버티시면서 엄마는 “너희 때문에 내가 살아.”라고 말씀하셨다. 이민 초기에는 내가 엄마에게 전화 걸 때마다 우셨다.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갔니, 밥은 잘 챙겨 먹는 거니, 힘들겠다, 보고 싶다...” 내가 너무너무 멀리 가서 볼 수도, 안을 수도 없다 하시면서 서운해하셨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어린 애로 생각하시고 애처로워하신다. 


나는 이역만리 타향에서 아이들을 넷이나 낳고, 제 새끼 키우느라, 그 새끼의 어미 노릇 한다고, 정작 우리 엄마가 얼마나 늙어가시는지 돌볼 여력이 없다.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엄마를 생각하면 불안하면서도 내 몸은 갈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아이 넷을 데리고  찾아갈 엄두를 못 낸다. 어쩌다가 전화를 걸었는데 엄마는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 중이셨다. 멀리 있는 나에게 알리면 뭣하냐고 연락하려는 동생에게도 아서라 하셨단다. 나는 자주 드리는 전화도 아닌데, 때마침 사고 소식에 억장이 무너지고 걱정이 되어 미친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심장이 조여오며 따끔하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무사히도 엄마는 회복하셨다. 이민생활 14년 가운데에는 지인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한국에 들어갔다는 분들을 종종 만났었다. 어떤 분은 돌아가신 후에 가면 뭣 하느냐 하시며 전화라도 자주 드려라고 조언해 주신다. 이민 생활에서 가장 풀기 힘든 숙제가 바로 부모님 걱정이다. 아이들이 크는 것은, 내가 나이 들어가는 것이고, 그만큼 부모는 늙어 가신다. 그래도 요즘 인터넷 덕분에 엄마와 화상전화를 하면서 우리 모녀는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늘 엄마 생각을 하고 있다는 표시로 사랑스러운 이모티콘을 수시로 전송한다. 처음엔 엄마가 띄어쓰기도 안 하셨는데, 이제는 띄어쓰기는 물론이고, “나도 사랑해.”라는 간지러운 문자도 보내주신다. 나는 때때로 내 삶이 힘들다고 하소연을 늘어놓고 싶다. 하지만 괜한 걱정거리를 안겨드려 속상해하실까 봐 꾹 참고 억지웃음을 짓고 만다. 내가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엄마 때만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민자의 삶은 분갈이 한 식물에 비유되곤 한다. 옮겨심기를 한 나무가 새로운 환경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 땅에 뿌리도 잘 내려야 하고, 물도 햇살도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옮겨 심겨진 나무가 새 흙에 까다롭게 굴면 큰일이다. 새로운 물과 공기에 맨 입으로 버티기라도 하려면 평소 닦아 놓은 실력으로 한동안 견딜 만큼은 강해야 살아남는다. 강풍이 휩쓸고 간 후에 공원을 걷는 날이면 여기저기에 쓰러지고 허리가 꺾인 나무를 만난다. 그 옆을 지날 때면 그 뿌리가 나무 덩치에 비해 굵지 않음에 놀란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내 처지를 대입하고 마음 아파한다. 나도 이 땅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다면, 저 나무와 똑같이 어려움이 닥치면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민 초기에 남편이 허리를 다쳤다. 한국에서는 공부만 하고, 사무실에서만 일했던 사람이 캐나다에 와서 몸 쓰는 일을 요령 없이 하다가 다쳤다. 우리는 며칠 쉬면 괜찮아지겠지 하면서 안이하게 생각했다. 회사에 복귀하고 작업 중에 허리를 다쳤다고 보고했지만 인정해 주지 않았다. 산재보험도 적용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남편의 통증이 나아지지 않아 결국 자비로 척추 교정의를 찾아가고 용하다는 한의원을 수소문해서 찾아가서 침을 맞았다. 수입이 없이 몇 개월 동안 치료와 재활에 전념하였다. 거의 2년 가까이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모두 써버렸다. 정말 사는 것이 너무나 막막했다. 나는 구세군에도 찾아가고, 푸드뱅크(Food Bank)에도 등록하여 기저귀며, 분유, 달걀과 우유를 타 왔다. 오후에 가면 음식이 떨어져서 허탕을 칠 수도 있어서 새벽부터 줄을 서 있어야 했다. 아무리 일찍 나서도 내가 일등인 적은 없었다. 세상 다양한 인종이 모인 캐나다의 특징을 한눈에도 확연히 증명할 수 있는 집합소와 다름 아니었다. 나는 아이를 데려간 적은 없었다. 기다리는 내내 칭얼거릴 것이 분명하기에 나도 편하고 아이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아이를 맡길 데 없어 유모차를 끌고 오는 엄마들도 많다. 아이들이 하나, 둘, 셋도 있다. 유모차 안에도 있고, 옆에도 서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징징거리질 않는다. 아무래도 하루 이틀 와본 것이 아니라서, 익숙해서 그런 것이리라. 푸드뱅크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기관이 아니다. 오로지 지역 커뮤니티 힘으로 운영된다. 우선은 대형 슈퍼마켓에서 유통기한이 가까운 식료품들을 기증한다. 또 유통 중에 포장이 찌그러졌거나 판매 중에 흠집난 음식들이다. 조금은 시들고, 조금은 썩은 것도 있다. 각 농장에서 추수했지만 판매하기 어려운 과일, 야채들을 기부한다. 대형 베이커리에서도 갖가지 빵을 대량으로 기부한다. 학교와 단체가 각종 행사를 통해 수시로 푸드뱅크에 기부할 캔 음식을 모은다. 예를 들면 방과 후 영화 한 편을 학교 체육관에서 보면서 푸드뱅크에 기부할 캔 음식으로 티켓을 대신하는 식이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울 때면 학교 사무실 앞에 한 달 가까이 커다란 선물 박스를 설치해서 캔 음식을 모은다. 제일 신기한 것은 다음이다. 대형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하고 계산대를 통과하면 그 앞에 커다란 나무 상자가 배치되어 있는데 푸드뱅크에 기부하는 상자다. 이민 오고 얼마 안 돼서 그 상자를 보았을 때, 캐나다 사람들의 흔한 기부 문화에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이 기부하기 위해 일부러 쇼핑을 하고, 값을 치르고, 바로 음식들을 기부함에 넣는 것이다. 그렇게 온갖 방법을 동원해 모은 음식을 나 같은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 부부에게 2년 동안의 시련은 강풍에 허리가 잘려나간 나무였고, 인내의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 동안 우리에게는 아이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때를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힘들 때일수록 엄마가 내게 해주신 말씀을 이제 내가 아이들에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너희 때문에 내가 산다고. 어미 나무가 어린것을 젖 먹이듯 키우면서 꼭 그렇게 말할 것만 같다.


허리가 잘린 나무는 씨앗을 받아 어미 나무가 되기 전까지는 나무토막에 불과하다. 생명이 아닌 책상, 옷장 같이 무생물이다. 그러나 은근과 끈기로 봄을 기다려 생명을 키우기 시작한 어미 나무는 더 이상 나무토막이 아니다. 죽음을 이긴 자다. 살아 있는 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다. 여기에 죽음을 이긴 자가 있다. 그에게 무엇이 두렵겠는가? 어미 나무가 자기 몸이 부스러지는 것을 아까워할까? 오히려 기쁘게 자기를 내어준다. 나는 아무리 어려운 시간도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나오는 것을 경험했다. 어린 나무를 키우는 일은 모든 두려움을 이기게 한다. 내가 푸드뱅크에 줄 섰던 순간들이 감사하다. 내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두려움을 이겨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어미 나무라고 소개하기엔 부끄럽다. 우리 엄마가 진정한 어미 나무였다. 혼자 힘으로 남매를 키우느라 온 인생을 다 쓰신 엄마가 바로 어미 나무다. 그리고 아픈 허리에 허리띠를 두르고 일터로 나간 아이들 아빠가 어미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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