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가 모자란 자는 볼리비아를 거치게 하라
버킷 리스트에 페루의 마추픽추와 나스카가 있었기 때문에 이왕 여기까지 온 것 돈 아껴서 다 찍고 가자고 마음 먹고 우리 부부는 우유니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라파스로 가서 거기서 다시 티티카카호에 있는 코파카바나(Copacabana)라는 마을까지 버스를 이어서 탔다. 호수에서 국경을 건너갈 요량이었다. 16시간의 장시간 탑승이었지만, 덕분에 숙박료는 아꼈다.
볼리비아는 관광버스 시스템이 아주 잘 발달해 있다. 업체들도 많아서 현장에서 표를 구하기 쉽고, 깨끗하고 좋은 2층 버스가 가격도 무척 저렴하다. 뒤로 완전히 젖히고 잘 수 있는, 폭 넓고 다리 받침대까지 있는 침대 의자(Cama)가 유니에서 라파스까지 US $29 정도다. 물론 우리가 여행한 2017년 기준이다.
하지만 티티카카호로 이동할 즈음 그동안의 고생을 보여주듯 내게 대상포진이 덮쳤다. 입술에 특히 포진이 많이 올라와서 열흘이나 고름 낀 수포를 달고 퉁퉁 입이 부은 채 다녀야 했다. 쉬라는 몸의 신호에 겸허히 응답하기로 하고 코파카바나에서 3박을 했다. 손님들이 별로 없는 좋은 호텔을 저렴하게 잡아 그곳 마당과 거실을 완전히 내 집인 양 쓰면서 휴양했다.
볼리비아를 여행하면서는 맨날 '매연만 없으면 좋겠다', '스타벅스 같은 커피 한 잔만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 '신용카드를 쓸 수 있는 데가 있으면 좋겠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런데 페루에 도착하니 '이곳이 천국이구나!' 싶었다. 거의 모든 가게와 호텔에서 신용카드를 받았고, 음식들도 풍요롭고 맛있었으며, 스타벅스가 있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매연이 없었다. 사람들도 훨씬 편안한 얼굴이고, 영어를 하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다른 나라나 문화에 관심까지 많아서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도 많았다. 사회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의 차이일까? 아니면 너무 힘든 곳을 힘들게 지나 와서 나 혼자 괜히 더 그렇게 느끼는 건가? 볼리비아를 거치기 전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이쯤 되니 다 축복 같고 눈물나게 고마웠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해변을 접하고 있지 않은 내륙 국가 두 곳 중 하나다. 안데스 산맥을 끼고 있는 다른 나라들 즉, 콜롬비아, 에쿠아도르,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는 산악 지대부터 해안의 저지대까지 다양한 지역 풍토를 보이며 기후가 다채롭다. 반면 볼리비아는 내륙에 파묻혀서 가장 높은 지대를 끼고 홀로 고립되어 있다. 방문한 곳들이 한정적이긴 하지만 내가 떠올리는 볼리비아는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자연스럽게 마음 속에 펼쳐지는 곳이다. 볼리비아인들은 억세고 거친 히드클리프가 갖은 구박과 매를 맞으면서도 사랑하는 캐서린을 보기 위해 황량하고 메마른 폭풍의 언덕에 한 평생 버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무리 우유니가 아름다운 소금 사막을 자랑해도, 나는 볼리비아를 떠올리면, 2016년 극심한 가뭄에 타들어갔다는 그곳의 갈라진 땅 사진이 생각난다. 그만큼 버석대고 거칠고 투박하며 아프고 딱딱한 곳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볼리비아는 남미 여행 중에 꼭 거쳐야 할 곳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다 지났다고 일부러 감상을 보태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그대로, 모든 게 해볼 만 했고, 의미 있었고, 지나가 볼 가치가 있었다. 분명, 볼리비아를 거치지 않았다면 그 다음에 거친 곳들을 그만큼 잘 누리고 감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욕심 많고 바라는 게 많은 상태에선 절대로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사함이 모자란 자는 볼리비아를 거치게 하자. 나처럼 고개를 떨구고, 우유니 사막의 텅빈 적막함에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을 테니까. 볼리비아에서는 분명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돈이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