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 아파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기적 같은 일이지요.”
그녀의 잔잔한 목소리가 내 심장을 뚫고 들어오면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순간 잊고 있었던 지난 시절이 떠올라 눈두덩이 시큰거려왔다. 우리 둘은 수화기를 든 채 한동안 말문을 잊어버렸다.
인화 아파트 시절-그런 시절이 있었다. 먹고사는 것에 힘겨워하며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던 때가 있었다. 동전 10원이 부족하여 버스를 타지 못하고 한 시간을 넘게 걸어 죽도 시장에서 집으로까지 걸어 다녔던 적이 있었다. 우유 살 돈이 없어서 우는 아이를 껴안고 함께 흐느꼈던 날들이 있었다.
포항에 살 때 그녀와 나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13평 아파트에서 살았다. 연탄아궁이에서 솟아오르는 일산화탄소를 마시며 기침을 콜록거렸고, 한겨울에는 걸레가 꽁꽁 얼어붙는 추운 거실에 전기난로조차 놓을 형편이 안 된 고달픈 삶을 이어갔다. 미래를 위해 적금을 넣고 남은 돈으로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부업은 다 했다. 보험회사도 다녀보고, 다섯 개 팔면 한 개를 덤으로 주는 생활필수품도 팔러 다녔고, 연말이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가계부가 필요한지 물어보았고, 수출품 검도복을 꿰매는 일도 하였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각종 대회에 글을 응모하고 상을 받으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그것은 힘겨운 삶 속에서 나를 지탱해 준 유일한 빛이 되었다.
어느 날 그녀가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친정에서 가져온 김을 팔러 온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우리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녀에게도 꿈이 있었다. 그녀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녀의 꿈도 내 꿈도 막연하기만 한 것이었다. 우리의 관계는 어느 날 그녀가 이사를 가면서 끊어져 버렸다. 그러다가 몇 년 전 우리는 거짓말처럼 다시 만났다. 광양에 와서 공부가 더 하고 싶어 대학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어느 날 인문대 강의실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목까지 찰랑이는 단발머리에 통이 넓은 검은색 바지 정장을 입은 그녀가 가을 햇살을 받으며 눈부시게 서 있었다. 우리는 너무 놀라 동시에 아, 하는 짧은 비명을 쏟아내었다.
그동안 그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국문학 박사가 되어 대학 강단에 서 있었고 나는 작가가 되어 있었다. 소식이 없었던 그동안 서로의 꿈을 이루었던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헤어진 연인들이 우연히 다시 만난 것처럼 벤치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만남의 설렘을 나누었다.
평온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녀와 나의 삶은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와 나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질곡의 삶 속을 벗어나 꿈을 이루었다. 그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막막하고 지난至難한 시절을 생각하면 그녀도 나도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든다.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왔던 힘겨웠던 지난 시절 생각에 목이 멘다.
그녀와 나는 20년이라는 공백 기간이 있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안다. 음성의 높낮이에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낄 수 있다. 결코 올 것 같지 않은 꿈을 잡기 위해 죽음과 같은 고통의 강을 건너온 지나온 삶의 모습들을 서로에게서 읽어낸다. 꿈은 이루어진다- 그녀와 나는 30년 넘게 이 말을 가슴에 달고 살아왔고 그것을 실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