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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06. 2022

세 종류의 사진

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섹스

세 개의 다른 사진

2015년 2월, NFL 최고의 팀인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와이드리시버 줄리안 에델만은 한 장의 사진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2월 2일 펼쳐졌던 슈퍼볼에서 우승한 후, 에델만은 팀원들과 광란의 파티를 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여자가 에델만과 섹스를 했다고 자신의 SNS에 에델만이 나체로 자고 있는 사진과 함께 인증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원문은 “Just Fucked Edelman, no lie.”였다.     


2016년 레이디 가가는 V라는 잡지의 1월호 표지를 장식했다. 그 사진은 몸에 페인트로 얼룩진 그녀와 그녀의 약혼녀 테일러 키니의 셀카였다. 그녀는 키니와 캔버스 위에서 사랑을 나누고 싶어 했고, 그 흔적을 잭슨 폴락의 작품처럼 남기길 원했다. 그녀는 실제로 이 사진을 찍기 전 섹스를 했다. 이 표지모델의 수익금은 자신이 운영하는 재단인 본 디스 웨이 재단에 기부됐다.     


몇 년 전, 우리나라의 한 사이트에서는 남자들이 아내나 여자 친구의 노출 사진을 올려 검증 아닌 검증을 받다가 그야말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      


사진의 의미-트로피

우린 이 세 개의 사진과 사건을 다르게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에델만 인증샷은 어떤 의미일까? 그녀의 사진은 남성적이다. 일종의 트로피 자랑 같은 것. 훈장의 나열이다. 군대 생활을 오래 한, 퇴역한 직업 군인의 집에 가면 다양한 기념품들을 만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난 한국의 퇴역 군인과 미국의 퇴역 군인의 집에 간 적이 있다. 전자는 내 장인이고, 후자는 내 어머니의 세 번째 남편이다. 장인의 집 거실 한쪽 벽은 우표가 가득 붙은 두 개의 대형 액자-가로세로 1미터는 정도의-와 키가 1미터는 됨직한 장식장이 차지하고 있다. 액자 속의 우표는 대부분 외항선 선원이었던 동생이 보낸 엽서에서 뜯어낸 것인데 일부는 장인이 사 모은 것도 있다. 특히 장인이 사 모은 우표 중에는 전두환 시절의 것이 많은데 그 시기는 장인이 직업 군인으로 가장 잘 나가던 시기와 겹친다. 바로 미8군 야전사령부에 파견되어 있을 때다. 장식장은 제대할 때 받은 감사패, 휘장 등이 가득 메우고 있다. 현재 몰고 있는 개인택시 뒤에도 그가 속해 있는 특전사 전우회 마크가 새겨져 있다. 이미 70이 넘은 나이임에도 특전사 시절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되고 있다. 그 시절은 기념품으로 실존하며 반추된다.     


후자의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위 워 솔져스>에 나오는 20세기형 기병대, 헬기를 타고 침투하는 그 부대가 사용하는 헬기의 사수였다. 제대 후에는 그 헬기를 비롯한 20세기 중후반의 미군의 전략 헬리콥터를 수리하는 능력 있는 엔지니어로 살았다. 그의 서재에 가면 그가 좋아하는 야구팀과 풋볼팀의 다양한 기념품과 사인볼을 볼 수 있다. 또 그가 타고 수리했던 헬기의 모형, 군대 시절 사진, 휘장과 계급장들을 볼 수 있다. 그에겐 군대 시절은 바로 어제 일만큼 생생하게 기념품 속에 살아 있다.     


여성에게 트로피 장식장은 필요 없다. 그녀의 과거는 기억 속에 내밀하게 저장되어 있다. 그녀의 과거, 성공은 암호를 해석하듯이 조심스럽게 해석하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의 과거는 가까운 사람에게만 공개된 비밀문서와도 같다. 특히 성적인 업적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반면 남자들이 허세를 부려가며 성적 체험을 나열하는 것은 문명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여전한 현상이다. 단지 그 나열과 홍보의 미디어만 바뀌었을 뿐이다. 단톡방에서 자랑했던 그 남자 연예인의 행위를 80년대엔 술자리에서 했을 뿐이다. 차이라면 그 당시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술의 깸과 함께 잊혔다면 지금의 그 연예인은 두고두고 그것을 재소비하고 계속해서 담화의 소재로 올렸다는 것이다.      


이 성적 트로피의 구체화가 인증샷이다. 성적인 몰카 범죄 통계를 보면 남성 피의자가 97퍼센트이다. 2017년의 통계만 보면 남자가 5,271명, 여자가 166명이다. 피의자 백 명 중 여성이 두세 명 정도 되는 비율이다. 이런 현상은 역설적으로 유튜브 개인 방송에서 성적 경험을 얘기하는 여자 크리에이터의 인기를 높이는 요인이 됐다. 어떤 여자도 공개적으로 하지 않는 얘기를 모두에게 하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남자의 엿보기 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녀의 에델만 사진은 그래서 남성적이다. 그건 성적 경험의 가치를 자랑한 것이 아니라 에델만이라는 개인을 사냥하고 Get(취득)했다는 자랑이다. 그러니까 에델만은 그냥 남자가 아니라 일종의 전시되고 자랑할 만한 남자이기에 찍힌 것이지 그와의 성적 경험이 엄청나게 좋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것이기에 찍힌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에델만과의 정사는 명품백이나 고급 레스토랑 경험과 다를 바 없고, 그 사진도 그런 경험의 인증샷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백의 효율성과 식사의 포만감이나 맛과는 상관없이 그것은 다르기에 찍힌 것이고 에델만도 다른 남자 하고는 다른 존재, 셀러브리티이기에 찍힌 것이다.     


사진의 의미 - 예술로서의 삶

반면 레이디 가가의 사진은 쾌락, 그 자체의 전시다. 그녀는 캔버스 위에서 섹스를 했고 그 흔적은 작품이 됐다. 아티스트인 자신과 애인을 사진으로 남겨 그 스스로 작품이 됐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것. 그것이 트로피에서 작품으로의 전환을 만든다. 얼굴과 시선의 정면 응시는 이성과 인격의 존재를 의미한다. 몰카에 부재하는 것이 바로 이 정면으로 던지는 시선, 보는 이와의 눈 맞춤이다. 이 시선과 눈 맞춤 대신 몰카에 담기는 것은 관음증적 훔쳐보기를 위한 피사체다. 보이는 대상의 의사와 인격은 부재한다.     


가가의 사진은 자발적으로 누드를 남기고 싶어 하는 커플이나 여성들의 사진과 유사하다. 자신의 빛나는 청춘과 육체를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과 섹스를 향해 불타올랐던 육체의 잔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가가의 마음은 자신의 현재 육체를 훗날의 자신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심리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렌즈를 향해 시선을 던질 수 있고, 에로틱함을 넘어 당당함까지 전해주는 것이다. 


이런 형태와 유사한, 젊은 날의 자발적 누드는 그래서 트로피 수집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트로피는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입증받기 위한 공인된 상징의 나열이다. 트로피 와이프나 럭셔리 자동차와 명품백처럼 말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누드의 기록은 향수의 기록이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젊은 시절을 회상하기 위한 유물 남기기다. 정신분석학자 장 다비드 나지오는 향수를 "지나가버린 즐거움과 고통에 대한 슬프면서도 편안한 추억"이라고 했다. 어쩌면 저 사진들은 소멸해버린 젊은 날을 애도하기 위한 애장품, 유품의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또, 가가의 사진은 아티스트로 노래의 생산자인 그녀가 스스로 아트가 되어서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는 한 예술가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스스로 작품이 되는 것. 이것은 셀러브리티로써 파파라치에게 찍혀 사적 인간과 유명인, 예술가의 경계를 타자에 의해 박탈되는 것과는 다르다. 그녀의 이 사진은 가가 스스로가 카메라 앞에 당당히 섦으로써 스스로 작품이자 아티스트가 된 것이다. 그 스스로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담는 것. 그 스스로를 완벽한 작품으로 담는 것. 그것은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할 수 있는 가수이자 음악가인 그녀가 스스로를 피사체 삼아 하나의 시각 예술을 생산해낸 것이다.     


사진의 의미 - 포획된 타자

세 번째 경우, 그러니까 여자 형제나 아내, 여자 친구를 찍어 사이트나 커뮤니티에 올려 인증을 받는 심리는 뭘까? 이것은 트로피적인 맥락과 함께 인권에 대한 감수성의 부재를 의미한다. 우린 초상권을 단순히 그 사람의 이미지 사용에 관한 상업적 권리와 그에 관련한 법률로 이해하곤 한다. 


찍히는 인간의 이미지, 얼굴 뒤에는 그녀의 인격이 존재한다. 인격이 없는 존재는 표정과 몸짓에 의미가 없다. 이들 인증샷의 대부분이 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걸 찍는 남자들이 여성의 인격에 관심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찍힌 사람이 동생이 됐든, 부인이나 애인, 여자 친구가 됐든 말이다.


의사를 묻지 않고 타자를 찍는 행위는 타자를 사물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SNS와 넷상에 사진을 올려 "어떤가요?", "평가 좀" 따위의 글을 올리는 것은 결국 그 사물의 소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굳이 남에게 평가받을 필요 없다. 인간이 인간을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 그 착각이 인간을 사물화 시키고, 그 사물의 가치를 대중에게 평가받고 싶어 하게 하며, 결국엔 그 불특정 다수가 형성한 노예 시장 같은 품평회에서 사물화 된 그녀들은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들이 단톡방으로 이어져서 수많은 대학의 학과에서 남자 선배들이 신입생이나 동기생을 품평한다.      


이런 품평은 삼국시대의 인물 감상자이자 평론가였던 허소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허소의 평가는 한 인간의 과거,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고, 외면과 내면을 아울러 평가했다. 조조조차 그에게 평가받기 위해 그를 직접 찾아가서 물을 정도였다. 그래서 들은 평가가 치세의 영웅이요, 난세의 간웅이다.     


몰래 여성을 찍어 올려 품평을 하는 남자들에게 이런 철학을 바랄 수는 없다. 애초에 타자의 인격을 의식 못하는 인간은 스스로의 인격에 대해서도 무심하다. 그렇다. 타자의 사물화는 주체의 사물화를 불러온다. 이렇게 찍은 사람이나 찍힌 사람 모두에게 나지오의 향수는 없다. 찍은 사람도 사진을 다시 보며 그녀를 추억하지 않는다. 찍힌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스스로 찍힌 걸 모르기에 돌아볼 것도 없다. 


그러나 만약 그가 몰래 찍은 걸 알게 되면 불안이 생긴다. 나지오는 같은 책에서 불안을 "장차 올 고통에 대한 예감"이라고 했다. 이것이 찍힌 이의 불안이다. 반면 찍은 사람의 불안은 타자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닥쳐올 범죄의 책임 추궁 때문이다. 그의 불안은 자신의 인격의 상실이나 타자의 상실 같은 추상적인 것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의 불안은 당장의 처벌에 국한되어 있다. 그 처벌의 불안으로 인해 그의 사죄는 진정성을 상실한다. 그는 유출한 것이 죄라는 것만 인식할 뿐, 찍힌 타자의 비인격화와 사물화에 대한 죄의식은 없다.      


이 인식의 부재가 높은 재범률로 이어진다. 몰카 재범률은 53.8퍼센트다. 이건 중독률이 높은 도박(72.2퍼센트)보다는 낮지만 사기(38.8퍼센트)보다는 높다. 음주운전의 재범률은 45퍼센트고, 마약 범죄도 37퍼센트에 불과(?)하다. 몰카의 재범률이 높은 것에 대한 원인 분석은 여러 가지-형량이 낮고 벌금형이 많다-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타자를 사물로 인식하여 사진을 찍기 때문이다. 봄에 하나의 꽃을 찍기 위해 주변의 나무와 풀을 꺾고 밟고 들어가는 일부 몰상식한 사진 애호가들이 내년에도 그럴 확률이 높은 것처럼 이들도 그러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에게 육체는 사물에 불과하다. 외부의 사물로 인해 얻어진 자극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도박, 음주운전, 마약 범죄의 맥락에서 몰카 범죄, 그리고 인증샷의 문제를 봐야 하는 것은 타자를 자극의 매개체로 여기고 그 자극에 중독된 사람은 계속해서 그 자극을 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자극의 공급원으로써의 타자.’,  ‘자극의 공급원으로써의 일상과 사물’, 이것이 몰카의 핵심이다.  이런 몰카가 주는 자극의 기원은 주체의 과거에 있다. 어떤 상황, 이성(특히 여성)의 어떤 신체 부위에 흥분을 느끼는지, 그 욕망의 기원은 찍는 이의 과거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누적된 기원이다.      


반면 우리가 카페나 여행지에서 찍는 인증샷 자극의 기원은 현실에 있다. 거기에 미래는 없다. 오늘의 흐름을, 흐르는 강물을 손에 담아 오늘, 그 강물의 물살을 담아내겠다는 철없는 꼬마와 같은 욕심이 그 근원이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업데이트되는 사진들은 결국 오늘 이 순간에만 의미가 있으며 그 손에 떠올린 강물이 최신의 강물임을 같이 호들갑을 떨어줄 공명의 대상이 필요하다. 이들은 ‘좋아요.’를 끈 삼아 연대하고, 인증샷의 성지를 함께 힘 모아 만들고 그 성지를 다시 허물고, 다른 곳에 재건하는 무형의 상업주의적, SNS 게릴라다. 그것은 낯선 땅에 임시로 세워지는 게릴라의 기지처럼, 그들이 만들어낸 캠프다. 시간과 세월, 그 장소와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낸 유적이 아니라 그들이 잠시 사진을 찍기 위해 만들어낸 신기루 같은 곳이다.     


유린의 성곽

그러나 몰카가 올라오는 사이트나 게시판은 은밀히 쌓은 성곽이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한 사람의 인격을 성곽 안에서 갇아놓고 유린하는 행위다. 그것이 단톡방이든, 커뮤니티이든지 말이다. 자신이 원해서가 아닌 모든 몰카에 담긴 육체는 그래서 전리품이자 사물로써의 육체이고 성안에 갇힌 포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백설공주, 신데렐라, 그리고 라푼젤까지. 공주들은 어딘가에 갇혀 있거나 잠들어 있어야 했다. 스스로 갇히고자 했던 공주가 있었던가? 없다. <미녀와 야수>의 벨조차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서였고, 야수에 의해 갇힌 것이었다. 여성을 소유물로 인식해온 남자들의 역사가 현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고, 이 착각이 몰카로 이어졌다.     


결국, 몰카는 야수적 폭력성을 동반한 타자의 포획이다. 마치 우리가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보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동물을 이동시키기 위해 헬리콥터로 모는 사람들처럼, 호주의 초원에서 헬리콥터로 소 떼를 모는 카우보이들과 같은 시선으로 여성의 신체를 카메라로 몰아가며 담는 것이다.     


그러나 카우보이 같은 이들보다 몰카를 찍는 남자들의 몰아 댐이 더 나쁜 것은 모는 주체와 몰아지는 타자 모두, 몰기의 인식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나 호주 초원의 소나 동물들은 자신들이 몰려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공포의 기원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찍힌 여성들의 공포는 막연하다. 피해자도 있고 범죄자도 있는데 자신이 피해자가 되고 있는지 스스로 알 길이 없다. 마치 남의 돈을 몰래 빼내는 소매치기에게 당하는 피해자처럼 찢긴 가방을 보고 나서야, 없어진 지갑을 보고 나서야 그 피해를 아는 것처럼 몰카의 피해자도 그 사진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한 뒤에야 자신이 피해자임을 안다.     


이게 바로 인격의 사물화, 신체의 사물화, 대상화를 의미한다. 즉 찍는 사람에겐 여성은 인격 없는 피사체에 불과하다. 그녀의 두려움, 공포는 건네 지지 않고, 찍는 사람도 잘못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없다. 그것은 사냥꾼에게 양심을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무리인가?     


타자의 섬세함

사회가 문명화됐다는 건, 우리가 좀 더 세련되었다는 건 서로의 존재와 그 가치에 대해 섬세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운전자는 보행자를 배려하고, 젊은 세대는 노인 세대를 배려하고,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서로를 관용하고 포용하라는 내용이 담긴, 요즘 많이 나오는 캠페인의 본질은 결국 타자에 대한 섬세한 인식이다.      


섬세한 인식 형성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긴 소통의 시간, 해석의 시간, 바라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시간은 대부분 가정과 학교에서 갖게 되고, 교육된다. 그저 나이만 먹는다고 그 시간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안전교육처럼 죽치고 앉아 시간이나 때운다고 이런 인식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을 한 사회가 어떻게 구성하고 보내게 했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소위 인권 감수성, 타자에 대한 인식, 성에 대한 인식 등이 제대로 형성된다. 지난 몇 년, 노동과 교육, 그리고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이와 관련한 교육이 이뤄진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좀 나아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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