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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14. 2022

애칭

사물의 우연 : 두 번째 서랍-데이트

   

애칭은 주체의 다른 인격을 여는 노크다. 

사회적 존재로써 오랫동안 살아오는 동안 망각한 "사랑하는 인간"을 꺼낼 수 있는 비밀 번호다.    


다른 이름, 다른 세계관

우린 평생 몇 개의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많아야 세 개? 적으면 두 개 정도다. 태어나기 전엔 태명으로 불린다. 세상에 나오면 이름을 갖는다. 그 어떤 이름도 내가 선택한 이름이 아니다. 그게 함정이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개명을 하기도 한다. 예전에 절차가 제법 복잡했지만 이젠 상대적으로 수월해졌다. 법적으로 개명을 하지 않더라도 본명이 아닌 이름으로 활동하는 분야들이 있다. 연예계가 대표적이다. 배우에는 그 유명한  신성일 선생님, 가요계에는 태진아 선생님이 있다. 최근에는 힙합 아티스트들이 예명을 쓴다. 예명이라기보다는 스테이지 네임으로 부르는 게 맞다. 힙합 아티스트들은 때에 따라선 여러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팀으로 활동할 때, 솔로로 활동할 때의 이름이 다른 경우다. 또는 자신의 다른 인격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에미넴이 대표적인데 그의 별명은 슬림 셰이디다. 팬들 사이에선 어떤 이름이 그의 원래 인격을 대표하고 과거와 미래를 보여주는지 논쟁 중이다.     


우리가 이름과 인격의 상관관계를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믹스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한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헐크 등등. 이들은 다른 존재가 되면 다른 이름으로 활동한다. 박쥐 코스튬을 한 브루스 웨인도 아니고 회사 사장인 배트맨도 아니다. 이름을 경계로 외모와 역할이 바뀐다. 우리가 코믹스의 세계관에 빠지는 것도 이런 선명한 세계 구분과 역할 구분 때문이고, 이를 통해 다른 이름으로 살고 싶은 다른 세계에 대한 욕망을 대리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세계관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지킬 앤 하이드,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우리의 탈춤까지.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 사회가 내게 강제로 부여한 이름과 역할을 거부하려는 심리를 갖고 있다. 이런 심리는 인간의 부조리함 속에 태생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그 부조리는 바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짓지 못한다는 점과 자신이 살아갈 사회와 세계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사, 유학, 이민이 아니면 우리는 최소한 유년 시절까지 태어난 곳에서 삶의 첫 장을 시작한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만의 소우주, 미시적 세계를 창조하고 싶어 한다. 아이들은 만화를 보며 그 주인공과 동일시하고 공주 옷을 입으며 환상의 세계로 간다. 어른들도 코스튬 플레이를 하고 피겨를 모으며 스타트렉과 스타워즈를 보고 기꺼이 마블 코믹스의 세계로 간다.     


이름과 문신으로 숨기는 두려움

환상의 세계뿐만 아니라 현실의 세계에서도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영역은 존재한다. 스포츠에서 가장 많은 별명을 쓰는 종목은 뭘까? 바로 종합격투기다. UFC 중계를 보면 모든 선수들은 본명으로 표시된다. 그러나 중계를 자세히 본 사람이라면 장내 아나운서가 선수들을 소개할 때마다 그들의 별명을 중간에 꼭 넣는다. 예를 들어 시청자들은 코너 맥그리거라는 이름만 주로 알지만 장내 아나운서 브루스 버퍼는 코너라는 이름과 맥그리거라는 성 사이에 꼭 노터리어스를 집어넣는다. “악명 높은 코너 맥그리거.” 이게 그의 격투가로서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실제로 종합격투기에는 이름보다 별명으로 유명한 선수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본명보다 별명으로 그 선수를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 크로캅이 대표적인데 이 사람의 본명은 미르코 필로보비치다. 그가 고국에서 선수 전에 특수 경찰 생활을 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또 마우리시오 쇼군 후아도 가운데 쇼군이 별명인데 일본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이런 별명이 극단적으로 사용돼서 본명이 사라지는 영역이 프로 레슬링이다. 이 쇼 비즈니스 세계에는 본명으로 활동하는 사람보다 가명과 스테이지 네임, 그리고 그 캐릭터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이름과 함께 이들의 격투가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은 문신이다. 해외의 스포츠 선수들, 특히 격투기나 미식축구, 농구 스타들을 보면 문신이 많은데 그 문신들은 저마다 의미가 있으며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담고 있다. 즉 스포츠 선수들, 특히 상대방과 몸을 밀착해서 투쟁적으로 승부를 내야만 하는 선수들은 가상의 이미지와 이름 뒤에 자신의 연약한 내면을 숨긴 채 자신이 원하는 강한 전사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화와 사회적 구속복

일상에서 우리의 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가명을 사용하지도 몸에 문신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린 이미 가명과 문신보다 더한 것을 몸에 입고 있다. 바로 사회적 구속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social strait jacket. 우린 아마 사회적 구속복이라는 말 대신 황금 구속복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토마스 프리드만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자유주의 경제로 가고 싶은 나라라면 꼭 갖춰야 할 조건을 제시하면서 사용한 표현이다. 그 이후 이 말은 신자유주의의 이상적 국가 시스템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어떤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본연의 나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는 상징이 스포츠 스타들과 프리드먼, 그리고 우리가 익히 보아온 수많은 만화와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화도 마찬가지다.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사회화되어야만 하고 그 사회화의 대표 기구는 교육 시스템이 맡고 있다. 일정 시간 앉아서 공부하고 일정 시간 쉬고, 일정 시간 점심을 먹고 다시 앉아서 공부하고,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고. 이런 규칙을 초중고 다해서 12년을 배우고, 대학까지 합하면 무려 16년을 배운다. 심지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시절까지 포함하면 우리의 사회화는 사회로 나가기 직전까지 진행되는 고도의 누적된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회를 나가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네가 아직 사회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나 본데." 따위의 말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회화되어서 나가도 사회화는 계속 진행 중인 것이다. 사회 안에 들어가 있는 조직들은 공교롭게도 다들 다르니 말이다. 그래서 다시 우린 "네가 조직 생활을 안 해봐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라는 말로 조직화를 배운다.     


우린 이 과정 어디쯤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 분명 내 이름과 내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내 원래 모습이 뭐였는지 잊게 되고 내 이름 뒤에는 어느덧 ~씨나 ~대리나 과장, 부장 등이 붙게 된다. 이건 그나마 낫다. 예전 우리 어머니들은 애를 낳음과 동시에 누구 엄마로 불리었다. 심지어 고향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00 댁처럼 말이다. 결국, 우린 이름을 갖고 살든, 이름을 잃고 살든, 사랑하는 존재, 사랑받는 존재로써의 나도 종종 잃게 된다.      


프리드먼이 말한 황금 구속복이라는 표현이 무서운 이유는 나라의 시스템을 신자유주의가 잘 돌아가도록 만들라는 압박과 설득이 녹아져 있기 때문이다. 즉 나라 시스템의 최상의 가치를 자본주의적 성장에 두라는 것이다. 한 인간의 사회화와 이를 통해 얻게 되는 다양한 역할과 이름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이 한 인간이 그 사회라는 시스템에서 잘 돌아가도록 요구하기 위한 짐지움이다. 즉 사적 개인이 원하지 않았던 이름과 역할을 사회가 짊어지운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견디기 위해서는 정신 분열을 일으켜서 세상을 외면하거나 나만의 분열된 세상을 창조해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대중문화가 충실해 왔다. 나라는 존재의 뿌리 없음을 충실히 잡아주는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 덕에 이 세계는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었다. 트루먼쇼의 은유처럼 말이다. 모르고 살면 그 역할은 곧 내가 되는 것이다.      


나를 부르는 당신

그러다 우린, 나를 달리 호명하는 경이로운 순간을 맞는다. 바로 사랑이다. 다시 말하지만, 애칭은 그 경이로운 "나"를 불러내는 노크이다. 마치 커다란 패스트푸드 매장이나 푸드 코트에서 내 주문번호가 들어오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그 생전 처음 겪는 호출에 저항할 수 없게 된다. “내 이름이 원래 이런 용도였구나.” 절감한다. 그렇다. 우린 절감하게 된다. 그동안 불리어졌던 내 이름들의 울림은 뭐였던가? 이름 앞에 성이 날라 간 채 이름만 불리어도, 심지어 앞의 두 글자가 날라 간 채 끝에 글자만 불리어도, 심지어 난생처음 들어보는 뭔가로 내가 불리어져도 그 불리어짐이 이때까지 내가 기다리던 내 진짜 정체임을 직감한다. 그래서 별명이나 애칭은 휴대폰에 저장된 것만으로는 그 의미를 발생시킬 수 없다. 설령 애칭이 없더라도 내 이름이 연인에게 불리어져야 이름의 다른 용도가 발생한다. 불리어져야 이름의 새 의미는 비로소 획득된다.   


연인이 날 부르면 거대한 성 안에 감춰진, 그 성 중앙 어딘가에 숨겨진 공간이, 그 성의 주인이던 나도 모르던 어떤 곳이 열리는 느낌이 든다. 애칭은 그렇게 새로운 나를 불러낸다. 호모 필로시스. 호모 필로시스는 에로스적인 인간임과 동시에 정서적으로 사랑받는 인간을 의미한다. 필로스는 알다시피 필로소피의 앞글자다. 필로소피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이고 그것이 철학이 됐다. 섹스가 “내 몸의 쓰임새가 원래 이런 용도였구나.” 깨닫게 해 준다면 애칭은 “나의 불리어짐이 원래 이런 환희를 위해서였구나.” 깨닫게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렇게 많은 인물들이 새로운 이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수없이 불리어지던 이름으로는 신의 부름을 받을 수 없고, 세상에서 수없이 사용되던 그 이름은 신의 영역에서 사용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신에게 다른 이름을 부여받은 후 "기적"이 일상처럼 일어나듯, 연인의 부름 이후 우리 삶엔 사랑이라는 기적이 일상처럼 일어난다.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로 불리어지는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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