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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05. 2022

번화가/도심

사물의 우연 : 두 번째 서랍 - 데이트

데이트의 탄생

예전엔 걷기만 해도 충분했다. 필자도 하염없이 걸었었다. 십 대 후반에 만난 첫사랑과 할 게 뭐가 있었겠나. 돈도 없고 솔직히 손 한번 마음 놓고 잡을 데도 없으니 주야장천 걸을 뿐이었다. 노래방도, 비디오방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아무리 걸어도 무릎도, 골반도, 발바닥도 안 아팠다.


사실상, 어디 앉아서 차 마실 데도 마땅치 않았다. 패스트푸드점이 한국에 상륙한 직후였다. 참고로 패스트푸드 체인은 86년 아시안 게임을 기점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생소한 장소가 십 대 청소년한테 편했겠나. 돈이 있으면 당시 의정부에서 유명했던 신포 만두를 갔으면 갔지 그렇게 어색한 곳엔 도저히 발을 내디딜 엄두가 안 났다.      


우리 어머니 세대도 마찬가지였다. 덕수궁 돌담길로 대표되는 걷는 데이트는 섹스할 공간이 부재했던 시대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데이트였다. 그야말로 첫날밤이 첫날밤이던 시절이다. 데이트는 사실 근대의 산물이다. 산업 혁명 이후, 소위 메트로폴리스가 등장하면서 타자는 익명 속에서 묻힌다. 임금 노동자는 어렵게 얻는 휴일 동안 최소한 비용으로 사랑을 쟁취해야 했다. 알다시피 사랑의 쟁취가 어디 뚝딱 되던가. 서로의 내면과 외면을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다양한 경험이 필수다. 20세기 자본주의는 저비용 고효율의 데이트 공간과 문화 상품을 만들어냈고, 그 이후로 시대에 따라 스타일만 바뀔 뿐, 데이트라는 이벤트의 본질은 같다.     


데이트 이전의 데이트

그 이 전의 데이트의 형태는 <대부>의 한 장면에 볼 수 있다. 알 파치노가 복수- 그 유명한 화장실에서 총을 찾아 식당에 앉은 두 사람의 머리를 정확히 쏘고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나오는 장면-를 하고 몸을 숨기는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시실리아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이미 결혼한 뒤였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이 여자와 데이트라는 걸 하는데 이 여자의 온 가족이 다 따라온다. 그렇다. 데이트라는 건 사실 서로를 아는 과정이니 둘이서 하든, 떼로 하든 무슨 상관이겠나. 중요한 건 근대 이전의 데이트는 가족 공동체의 행사였고 더 나아가 마을 공동체의 사건이었다. 익명성과 대중성, 그리고 프로그램화된 데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최적의 데이트 장소?

둘이 서로 알기 위한 장소로는 당연히 조용한 곳이 제일 좋다. 박물관, 미술관, 서점, 도서관 등등. 또는 긴 산책로나 대학 캠퍼스도 좋고. 그러나 우린 이상하게 데이트를 번화한 곳에서 한다. "우리 오늘 범어사에서 만나요."나 "조계사에서 만날까요?", "이번 주말엔 봉은사에서 볼까요?"라고 데이트 신청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인이라면 사실 대구 제일교회나 계산 성당, 전주의 전동성당도 괜찮은데 그렇게 한적한 곳에서의 데이트는 관광이나 가야 발생하지, 데이트 코스를 위해 선택되지는 않는다. 설령 선택되더라도, 한 번은 가도 두세 번은 가지 않을 것이다.


보면 볼수록 좋고, 조용히 걷기만 해도 좋고,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사람이라면, 게다가 연인 모두 서울 4대 문 안에 산다면 매주말 조계사에서 데이트를 해도 이상할 것 없지 않을까? 그만큼 조용하면서 서로에게 집중하게 해주는 공간이 서울 시내 또 어디 있겠나? 필자가 사는 부산 사람이라면, 부산역 근처 사는 사람이라면 ''남포동 대각사에서 봐요." 서면 근처라면 "삼광사 괜찮죠?",  동래 쪽이라면 당연히 "내일은 범어사에서 보죠.'라고 말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데이트의 클리셰-자동차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진 않는다. 최대한 번화한 곳에서 만나 최대한 큰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최대한 유명한 맛집에서 밥을 먹고 최대한 큰 쇼핑몰에서 쇼핑을 하고, 최대한 분위기 좋고 세련된 모텔에서 섹스를 할 것이다. 물론 그 이동 중엔 남자의 차가 있는 것을 당연시할 테고. 이것은 근대 이후, 다시 말하지만 프로그램화된 데이트의 변주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딱히 새로울 게 없다는 거다.     


자동차가 발명된 후 가장 이것을 열심히 사용한 두 부류를 꼽자면 갱들과 연인들이다. 물론 상업적으로 사용한 기업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이 55년도 영화인데 이 영화에는 몇 종의 차가 나올까? IMCDB, 즉 인터넷 무비 카 데이터베이스라는 사이트에 의하면 무려 열여섯 종의 자동차가 나온다. 시대도 1932년부터 55년까지다. 우리가 잘 아는 치킨 게임 장면에서 제임스 딘이 탄 자동차는 1941년 세보레 마스터 디럭스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데이트와 자동차는 미국에서 떼어놓을 수 없게 됐고 머지않아 자동차 극장, 드라이브 스루와 드라이브 인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드라이브인은 미국에서 개발되어 미국에서 유독 발전된 문화로 1953년에 개장한 소닉 드라이브 인이 대표적이다. 즉 이때부터 청춘남녀의 데이트 공식이 확실해진 것이다.     


드라이브인 레스토랑은 주로 가벼운 먹거리를 팔았다. 햄버거와 같은 패스트푸드가 주를 이뤘다. 식당을 둘러싼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주문을 받으러 점원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온다. 그리고 그 롤러스케이트 탄 점원이 음식을 가져다준다. 사실 이런 형태의 식당은 미국이 거의 유일하다고 봐야 한다. 넓은 평지 한가운데 세워진 식당, 그리고 그 식당보다 몇 배는 더 큰 주차장.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도시를 제외하고, 또 그 도시의 고층빌딩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지하나 빌딩 형태의 주차 타워는 미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넓은 대지에 주차장이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큰 마트를 가도 그 마트보다 열 배는 큰 주차장이 있다. 마치 집에서 근처 편의점을 걸어가는 거리감을 느낄 정도다. 이런 자동차 문화의 발달로 미국 청춘의 데이트는 자동차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이 문화는 80년대, 블록버스터라는 비디오 대여점이 혜성처럼 등장하기 전까지 주를 이뤘다.     


자동차와 불륜과 00장

반면 우리같이 작은 나라에선 자동차가 데이트의 핵심이 될 수 없었다. 고속도로가 곳곳에 깔리고 속칭 마이카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80년대 중반에서야 자동차가 생활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또 자동차는 당연히 고가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상대적으로 독립이 늦은 청춘들이 소유할 수 없었기에 자동차를 이용한 데이트는 중년의 불륜 남녀의 몫이었다.


이 시기, 그러니까 88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숙박업의 규제가 풀리면서 소위 00장과 같은 모텔로 이뤄진 모텔촌이 경기도 외곽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불륜 커플의 애정 문화는 자연스럽게 자동차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그 동선에 00정, 00 산장 같은 고급 음식점들이 자리를 잡았다. 우린 그 시대의 유적들을 시외로 운전할 때 어떻게 이런데 모텔이 있을 수 있는지 놀라면서, 또 국도변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식당들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우리의 데이트-불륜 커플이 아닌 청춘 커플-는 <쎄시봉> 같은 영화를 봐도 알듯이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가능한 문화와 상업 시설의 중심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찻집에 앉아 있거나 라이브 음악을 듣거나 그마저도 못하면 정동 극장이나 명동성당,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게 전부였다. 서울이 이랬으니 지방도시는 더했을 것이다. 걷거나 동네 강가에 앉아 있거나 초등학교 운동장이 다였을 것이다.      


도심에 몰려드는 이유-불안 해소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교통이 발달하고  자동차 소유 연령이 제법 낮아졌지만 우린 여전히 데이트를 하러 심으로 모여든다. 일본 도쿄와 같은 대도시를 가도 우리와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건 이들 청춘 커플들이 새로운 도심을 계속 개발한다는 것이다. 이태원, 연남동, 경리단길, 익선동 등등을 말이다. 그것은 마치 엄청난 굴이 파진 개미집의 개미들이 바로 그 옆에 새로운 굴을 파는 것과 비슷하다.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존의 굴 옆에 새로운 굴, 새로운 통로를 뚫는 것이다. 그 굴로 커플의 몰림이 시작되고 그 몰림으로 인해 주변은 활성화된다. 그러다 사람이 너무 많아져 그 굴이 너무 좁다고 느껴지게 되면 다시 새로운 굴을 찾아 발굴한다. 미디어도 앞 다퉈 소개해주고 말이다.    

 

그렇다. 우린 마치 개미처럼 몰려다닌다. 개미들이 서로의 페로몬을 맡으며 길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로의 냄새를 맡기 편하도록 일렬로 가듯이 우리도 다 같이 한데 모여 서로를 확인하며 안심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운 장소의 확보는 원래의 곳과 멀어서는 안 되며 그곳과 크게 달라서도 안 된다. 낯설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연인들이 특정한 날-밸런타인데이, 휴가철, 제야의 밤, 크리스마스 등-에 한 장소-해운대와 강원도, 모텔, 백화점, 광화문, 번화가-에 모이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존재의 불안을 숨기기 위해서다.     

 

전시적/사회적 행위로써의 데이트

다시 번화가의 데이트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자. 번화가에서의 데이트는 은밀하지도 않고 상대방에 대한 몰입도 방해한다. 이런 데이트를 대중적 데이트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로에게 집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데이트마저 잘하는 사회적 존재로써의 데이트라 부르는 게 적당하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애 역시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라고 볼 수 있고, 다시 그렇다면, 연애 역시 과시적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그 과시를 통해 우리가 서로에게 속해 있음을 연인 간에 확인하며 안도하고 다른 커플들에게 보여주며 안도한다. 그리고 아직 솔로인 이들에게 과시하며 안도한다.      


<이유 없는 반항>에서 패거리들끼리 몰려다니는 것, <아웃사이더>에서 무리 지어 편을 가르는 것, 그 외 수많은 청춘 영화들의 장면 속에서 패거리를 나누고 지역을 지키고 정체성 확보를 위해 옷을 다르게 입는 것들이 결국 현대에 와서는 모두가 같은 걸 하고 있다는 안도감 속에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위문화의 획일화라고나 할까?     


결국, 번화가에서의 데이트는 잘 살고 있다는, 연애를 잘하고 있다는 자기 최면임과 동시에 집단 최면이다. 언론에서는 경제가 안 좋고 경기가 불황이라고 끊임없이 얘기하지만, 아니 그렇게 얘기할수록 사적 삶은 여전히 풍요롭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득시켜야만 한다.      


그래서 번화가에서의 데이트는 일종의 미래의 두려움을 보지 않으려 하는, 청춘 커플이 자발적으로 쓰는, 경주마들이 앞만 보고 달리게 하는 차안대 같은 것이다.


결혼 후에는 데이트가 연중 이벤트가 되고 마는 것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숨길 필요도 없고, 또 그것을 숨길 수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공포는 보험, 금융, 결혼제도, 정부 시스템 등에 맡기게 되고 더 나아가 다들 그렇게 살고 있기에 더욱더 데이트는 실종된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라는 말과 생각이 결혼 전과 후, 모두를 지배한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의 보수화고 사고의 평균 지향을 의미하는데 설문 조사 때마다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나라의 경제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그 대표적인 현상이다. 즉 자신을 평균으로 느끼는 것은 전적으로 외부 환경의 변화에 달려 있고 그 변화에 따라 주체의 인식 또한 바뀌는 것이다.           


모텔의 역설

다시 번화가의 데이트 현장으로 돌아가자. 번화가에서의 데이트는 데이트의 사적인 은밀함을 제거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돈을 내고 사적인 공간을 찾아야만 한다. 바로 모텔 같은 곳, 그리고 수많은 방들이다. 그래서 90년대 중 후반 이후, 모텔들은 더 이상 시외에 자리 잡지 않고 도심으로 몰려든다. 어느 대도시 번화가나 유흥가, 그리고 대중교통의 거점을 가도 모텔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대중에 속해 있으면서도 사적인 시간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상충되는 심리 때문이며 모텔만이 데이트와 섹스를 일상에서 구출해내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모텔을 포함한 데이트를 위한 모든 공간의 탄생은  데이트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다시 말하지만 데이트는 근대의 산물이다. 아니 현대의 산물이다. 우리가 스스로 짝을 찾기 시작한 건 불과 이백 년도 안됐다. 그전에 우린 부모들 간의 인연을 통해 짝을 맺었다. 결혼은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와 공동체 간의 협약 같은 것이었다. <대부>에서처럼 말이다.  

   

데이트의 클리세-영화관

산업화 이후 청춘남녀들은 낯선 이와의 데이트를 배워야만 했다. 그 배움의 수단, 선생은 미디어와 드라마, 영화였다. 대학을 안 가는 사람이 훨씬 많았던 70년대부터 대학생이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었고 그들의 데이트 방법이 착실하게 전파되었다. 영화관은 개봉관에서 재개봉관, 동시상영관으로 위계가 정해져서 그에 따라 다양한 계층의 커플들이 영화관을 중심으로 데이트를 했다. 그게 불과 90년대 중후반까지의 일이었다.


서울 4대 문 안쪽엔 개봉관이 자리 잡고 있었고 강북 끝자리나 의정부 등엔 재개봉관이나 동시 상연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대전도 마찬가지여서 대전역 부근에 커다란 단관 개봉관이 몇 개 있었고 주변에 자잘한 재개봉관, 동시 상영관들이 있었다. 이 데이트의 위계는 최소한 40년 이상 형성된 것이고 우리나라 영화 중흥기인 60년대부터 시작해서 에로영화의 전성기인 80년대를 거치면서 정착된 것이다.      


이 위계가 사라지기 시작한 건 비디오방의 등장과 21세기에 등장한 멀티플렉스 때문이다. 아주 최근의 일인 것이다.  티플렉스는 역설적이게도 연인도심으로 모으고 있다. 분수 효과이든 폭포수 효과든 뭐든 간에 대형 쇼핑몰들이 멀티플렉스 유치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21세기의 커플들은 쇼핑, 식사, 영화까지 공적인 시선 앞에서, 그 시선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데이트를 한다. 그 결과, 그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사적인 공간도 등장한다. 앞서 말한, 도심에 모텔촌이 더 발달하게 된 이유다.


어디든 마찬가지다. 필자가 사는 부산을 예로 들어보자. 남포동, 동래 온천장, 서면, 경성대와 부경대 주변, 해운대, 광안리. 어디든 그렇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술집, 식당들이 밀집한 원스톱 데이트 스폿 근처엔 어김없이  모텔촌이 형성되어 있다.      


모텔-사적 존재의 은둔

모텔은 이 공적이고 전시적인 데이트의 긴장을 푸는 유일한 공간이다. 데이트 내내 두 연인은 전시된 존재다. 여자의 옷차림은 남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린 종종 아주 조화롭지 못한 커플을 목격하게 되는데 여자는 한껏 꾸몄는데 남자는 그저 편하게 입고 나온 커플을 보게 된다. 대중, 즉 불특정 다수를 더 의식한 사람이 더 꾸미고 나오기 마련이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그녀가 아름답게 꾸미고 나오는 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공공적인 데이트를 하기 위한 일종의 변장이자 변신이다.      


일본과 한국의 헬스클럽에서 나눠주는 회원복과 같은 맥락이다. 참고로 이런 단체 회원복은 한국과 일본에만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확인은 안 해봤지만...  어찌 됐든,  처음엔 다 이걸 입고 운동을 시작한다. 그러다 몸이 좀 만들어지면 자기만의 운동복을 사 입는다. 그리고 좀 탁월(?)해지면 색이 화려해진다.


우리나 일본이나 근본적으로 튀지 말라고 교육을 받는다. 또 공공장소에서의 사적 존재를 없애는 교육도 받는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는다는 건 사적 존재의 은둔이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순간 그 은둔의 규칙에서 나온다. 털갈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헬스장의 언더아머 규칙은 이 규칙의 명시화에 불과하다.      


이 공적 주체의 은둔이 데이트에서도 이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볼 때 마냥 화려해 보이는 번화가와 도심은 데이트를 하는 사적 주체의 은둔을 위한 장소인 것이다. 사적 존재의 은둔을 위해 잔뜩 웅크려 있던 두 사람이 결국 기지개를 켜는 곳은 모텔인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그곳에서의 해방감은 데이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해진다. 그 공적 긴장감으로부터의 해방감은 집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데 모텔에선 집처럼 모든 사회적 장치를 벗어놓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좋은 데이트를 위해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데이트가 연인의 관계 증진을 목표로 하는 행위라면 둘 만의 장소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밀월여행을 갈 필요도 없다. 봉은사를 가든 범어사를 가든, 명동 성당을 가든, 계산 성당을 가든 서로에게 집중할 조용한 장소로 가면 된다. 그런 장소, 즉 공적이면서 시끄러운 시선과 목소리가 제거된 장소는 많다. 굳이 모텔이 아니어도 둘의 목소리가 확성기처럼 들리는 공간들은 많이 있다. 그런 곳에 둘만 있다 보면, 예를 들어 한가로운 평일의 박물관을 조용히 걷다 보면 아마 모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러브 어페어>의 대사처럼 당신이 좋아하는, 그녀가 움직이는 걸 질리도록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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