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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06. 2022

데이트 비용=텐션+존재감

사물의 우연 : 두 번째 서랍 - 데이트

결국 이런, 모든 공적인 데이트에는 계산서가 따라붙는다.      

공적인 데이트의 스케줄은 EPL의 박싱데이만큼 살인적이다. 


데이트엔 돈이 든다.

사실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아무 곳에서나 걷기만 해도 된다. 집 앞 공원에서 얼굴을 보면 된다. 동네 편의점 파라솔 밑에 앉아 캔 맥주를 마시며 노닥거려도 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데이트는 커플만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대중과 함께하는 사회적 행위기에, 모든 사회적 행위가 그렇듯 시대의 유행이라는 것이 있고, 그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선 비용이 든다.     


앞서 말했듯 동시상영관이 있던 시절에는 경제적 상황에 따라 데이트 장소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같은 계급이라고 여겨져야-헬스클럽 회원복처럼- 심리적으로 편하기 때문에 대중의 동선과 스폿을 따라야 한다. 결국, 대체적으로, 점심때 만나면 점심-커피-영화-저녁 식사-모텔로 이어지는 코스가 진행된다. 이걸 돈으로 단순히 환산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 주말 데이트 비용으로 십만 원가량 들어간다는 연합뉴스의 카드 뉴스가 나왔었다.      


이상적-경제적으로 말이다-인건 같은 비율로 이 비용을 부담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 비율의 배분은 두 사람의 기존 경제력-집안의 경제력-과 미래 경제력, 그리고 쌍방의 투자 가치와 상품성 등을 고려해 결정된다.      


데이트의 특별함

우리가 공적인 데이트를 하는 이상 우리는 대중에게 전시된 상품가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 데이트와 데이트를 하는 연인의 상품가치의 위계를 마케팅은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있다. 아니 마케팅과 기업들이 그것을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레스토랑, 커피숍, 쇼핑몰, 영화관, 모텔까지 이들은 알게 모르게 위계, 서열화시켰다.


각 서열별로 가격차이는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만 미묘한 브랜딩의 변화와 가격 차등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예를 들어 애슐리라는 레스토랑은 브랜드를 클래식, W, 퀸즈 등으로 세분화했고 이에 따라 대략 4,5천 원 정도의 가격 차이로 소비자들의 선택을 갈리게 한다. 마치 벤츠나 BMW 같은 고급 승용차의 시리즈 넘버링과 비슷하고, 일반 자동차의 배기량에 따른 가격차이와 유사하다. 본질 이상의 무엇을 제공하면서 가격을 더 받는 것, 이런 전략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소비자와 커플에겐 타당하고 합리적인 가격이다.     


그러나 특별하다는 존재감의 획득은 연인에게 얻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사랑은 주체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두 번째 경험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첫 번째는 아기 때이고 두 번째가 낯선 타자에게 사랑을 받을 때이다. 키가 작든, 크든, 못생겼든 잘생겼든(물론 주관적이다.), 가슴이 크든 작든, 뱃살이 있든 없든 어떤 존재든 사랑을 받는다면, 사랑의 대상이라면 특별한 존재다.      


상품화된 데이트

반복해 말하지만, 이 사적인 특별한 존재감을 대중 속에서도 느끼려는 바람이 연인들을 광장으로 불러낸다. <대부>에서처럼 가족의 인정을 받기 위한 공개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말이다. 사랑을 해도 여전히 불안한 존재인 걸까? 아니면 사랑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이 다른 존재가 됐다고 믿게 되는 걸까? 그런 존재인 것을 모두에게 알려야만 하는 강박은 어디서 생기는 걸까? 


데이트 코스에도 유행이 있고, 수 많은 미디어가 그 유행의 흐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데이트도 단체 관광 코스처럼 상품화 됐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옷장에 옷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입을 옷이 없다고 한탄하고 새 옷을 사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매번 데이트를 할 때마다 반복되는 데이트 장소와 여정에 대해 한탄과 함께 새로운 장소를 추구해야 한다는 강박이 발생한다.     


이런 강박은 사적 취향을 무화시킨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매번 데이트를 할 때마다 감자탕을 먹는 건 보일 수 없고 전시될 수 없는 데이트다. 두 사람이 아무리 감자탕 집에서의 데이트를 좋아한다고 해도 유행 밖의 것은 전시될 수 없고, 설령 감자탕이 유행이라 하더라도 반복되면 진부해지기 때문이다. 


진부함은 지루함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린, 사람이 지루해져야 데이트가 지루해지는 것인지, 데이트가 지루해지면 사람이 지루해지는 것인지 좀 더 솔직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을 신선한 존재, 늘 긴장을 주는 존재, 일본 사람들이 잘 쓰는 표현으로 늘 하이 텐션을 주는 존재로 각인시키기 위해 매번 데이트 때마다 새로운 데이트를 해야 한다면 이거야말로 사람의 사물화고 주체의 사물화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지겨워지는 사랑

어차피 누군가에 대한 설렘은 시간이 지나면 소멸한다.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면 그 어떤 비싼 장난감이라도 일주일이면 싫증을 낸다. 어른이 되면 그 간격이 좀 더 길어질 뿐 사물이든, 직장이든, 사람이든 싫증이 나게 되어 있다. 직장이 대기업이든, 공무원이든 지겨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지겨움을 이겨내고 버티는 것은 가족이라는 책임, 사회적 시선,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직장이나 직업에 대한 지겨움은 아주 쉽게 말할 수 있다. 반면 연인에 대한 지겨움은 말하기 힘들다. 대놓고 “이제 지겹다.” 하고 말하는 건 실례라고 배웠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대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물론 그게 더 실례라는 것을 들킨 다음에나 아는 게 문제지만. 새로운 데이트의 여정에 설레겠지만 어느 영화 - 아마도 <우리도 사랑일까?>- 의 대사처럼 모든 낡은 것도 처음엔 새것이었다.      


한번 생각해보자. 하루 종일 신나는 음악이 나오는 쇼핑센터, 감미로운 음악이 나오는 카페, 왁자지껄해서 연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는 술집, 연인의 살 냄새-심지어 그 진한 메이크업 냄새나 남자의 스킨 냄새조차-를 음식 냄새로 덮어버리는 삼겹살 식당, 조용히 걸으면서 두런두런 얘기할 수 없는 인파들,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소음, 스마트 폰으로 수시로 떠들어대는 사람들, 우린 왜 이런 곳에서 연인을 봐야 할까? 


어쩌면 긴장이 사라져 버린 사랑에 텐션을 불어넣기 위해 텐션이 있는 공간에서 텐션을 받으려는 건 아닐까? 사랑이라는 사적인 행위를 공적으로 전시하면서 자신의 특별함을, 사회적 가치를 확인받으려는 건 아닐까?  이를 위해 사랑을, 연애를, 데이트를, 그리고 연인을 액세서리나 고급 자동차처럼 전시용으로 사용하는 건 아닐까?  


집중할 수 있는, 짧은 시간

그동안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사라진다. 아이를 키워보니,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세월이 아주 짧다. 불과 몇 년 안 된다. 요즘엔 서너 살이면 어린이집에 가고 대여섯 살이면 유치원에 간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해가 지기 전에는 보기 힘들어지는 집도 있다. 내 자식도 이런데 연인은 더 그렇지 않을까? 


소음과 시각 공해 속에서 듣고 보기엔 연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아깝다. 지루해질 것을 두려워하는가? 차라리 그때 솔직하게 말해라. 자동차와 번화가의 인파 속에서 헤매며 애쓰지 말고. 누군가의 노래 가사-바비의 사랑해-처럼 사랑을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은 어쩌면 이미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      


가사는 정확하게 이렇다. 

“사랑을 노력한다는 건 이미 사랑이 아닌 걸.”

“설렘이 빠진 사랑에게 남는 건 결국 정뿐인걸.”   

  

이 솔직한 가사를 들으면서도 새로운 장소의 데이트만으로 사랑의 텐션이 유질 될 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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