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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an 18. 2024

그리운 바다 성산포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10

47 섬 묘지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두었다


52 무명도(無名島)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80 고독한 무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이 시집을 바다에 묻힌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친다. -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서문


여행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의외로 여기저기 가 본 곳이 많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교회와 학교 때문에, 아내를 만난 이후에는 여행 좋아하는 아내 덕분에. 아내를 만나기 전에 갔던 곳 중 다시 간 곳이 없어서 그곳이 지금 어떻게 바뀌었다 하더라도 내 기억 속의 그곳은 과거 그 모습 그대로다.      


십 대 시절, 그러니까 삼십오 년도 전에, 강원도 이곳저곳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교회 전도사님 고향이 속초여서 그 지역 교회들과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강원도의 속초, 주문진, 강릉 등지를 갔었다. 내게 있어 강원도는 그 시절의 강원도다.      


교회의 허름한 승합차가 느릿느릿 한계령을 올라가던 기억, 주문진의 작은 교회와 항구와 어촌, 한가해서 쓸쓸하기까지 했던 망상해수욕장, 솔숲이 빽빽했던 어느 해수욕장에서 만난 폭설, 청초호인가 영랑호의 둘레를 금반지처럼 빛내며 출항 준비를 하고 있던 오징어잡이 어선들. 나에 강원도는 이런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즘 TV를 통해 보는 강원도는 나에 강원도가 아니다. 서퍼가 출렁이는 양양도, 고층 빌딩이 들어선 속초도, 사람들로 붐비는 강릉과 망상해수욕장도, 케이블카 공사를 한다는 설악산도 나에 강원도는 아니다. 나에 강원도는 내 기억 속에만 있다. 2월 말쯤, 딸의 생일과 아내의 생일 그 사이쯤에 강원도 여행을 간다. 그 강원도를 보고 오면 내 강원도는 새로운 모습이 될 터, 그때까진 내 강원도는 1980년대의 강원도다.   


풍경도, 사람도 다르게 기억된다. 다른 기억은 다른 의미를 만든다. 같은 것, 같은 장소, 같은  사람도 기억이 다르면 그 의미 또한 달라지는 것이다. 결국, 오늘의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과 오래전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의 정서는 어긋난다. 다른 곳을 본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의 젊은이가 생각하는 섬과 내가 생각하는 섬이 다르고, 나와 위의 연배들이 생각하는 섬이 또 다르다. 이렇게 경험과 기억이 다른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다르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이 시에 담긴 섬과 성산포의 이야기가 오늘의 섬과 성산포의 이야기와 다른 이유다.    


시에는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와 바다 사이에서 자신만의 삶과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온 섬사람의 사연이 담겨 있다. 시인이 후기에 밝혔듯이, 그리고 그 이후 시인의 행적이 말하듯 시인은 섬을 사랑해서 섬을 방랑하며 시를 썼다. 이 시에 담긴 시들은 이 시집이 나오기 전까지, 무려 30여 년 간 떠돌아다닌 섬들이 그에게 시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시에 나오는 제주도를 비롯한 모든 바다와 섬이 시인에게 말해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아는 그것과 다르다. 물론 지도상의 위치는 같다. 하지만 다른 섬,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섬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제주도는 그야말로 국민의 대표적 관광지이자 세계인의 관광지이다. 그러나 이 시가 나왔을 때의 제주도는 지금과 달랐다. 놀랍게도 이 시는 1978년에 나왔다. 잠시 생각해 보자. 30년이다. 1978년으로부터 30년 전이면 48년이다. 그야말로 해방 직후부터다. 그 당시 육지와 섬, 섬과 섬을 오가는 수단은 그야말로 통통해 정도였을 것이다. 연안여객선의 등장은 훨씬 뒤의 일이었을 것이고 제주도에 비행기가 내린 건 훨씬 더 뒤의 일이다.


참고로 제주공항의 개항은 1968년인데 이때는 5.16이 일어난 후 7년 정도 지난 뒤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관광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그의 지시 하에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대부분의 관광단지- 경주 보문, 대전 유성온천, 제주 중문, 강원 설악산 -가 개발 됐다.      


개발이 됐다고 해도 섬은 섬이었다. 한계령과 대관령을 넘어가야 설악산과 동해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대부분의 섬은 거친 바다를 해치고 가야 했다. 제주도도 마찬가지였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건 그 한참 뒤까지 서민은 엄두도 못 냈을 사치였다. 해외여행 자율화가 1989년에나 이뤄졌다는 걸 생각해 봐라. 그러니 제주도가 서민들에게 얼마나 먼 섬이었겠나. 제주도의 유채꽃밭에서 찍은 신혼여행 사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 건 우리의 삼촌 세대가 결혼한 그 이후였다.      


배와 다리로 섬과 섬이, 섬과 육지가 이어지기 전까지, 심지어 제주도조차, 섬사람은 바다에 기대어 살았다. 똑똑한 자식만 겨우겨우 뭍에 내보냈을 뿐 대부분은 그렇게 살았다. 바다에 기대어 산다는 것은 그들의 부와 가난도, 삶과 죽음도, 오늘과 내일도 자연과 신의 운명에 맡기고 살았음을 의미한다. 시집은 이런 섬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삶과 죽음, 사랑과 그리움, 한과 희망이 엇갈린다.


생계를 바다에 기대어 산다는 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배가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가는 배로, 그나마 좀 나으면 요즘의 스쿠터 엔진보다 나을 것이 없는 작은 엔진을 단 배를 몰고 험한 바다에 나갔을 것이다. 그 작은 배는 작은 파도에도 속절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험한 바다가 삼켜 돌아오지 못한 이의 이야기는 섬을 떠돌았고 그들이 묻힌 묘지 또한 섬 안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죽음의 이야기와 망자의 안식처가 산 자와 공존하는 마을, 그 마을의 산 자들은 그 삶을 이어가기 위해 많은 이들을 삼킨 바다를 보며 그물과 어구를 손질했을 것이다.   

   

마을 어딘가에서, 바다 일을 하다가도 섬 꼭대기에 있는 묘지들을 보며 먼저 간 이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죽어서도 섬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서도 물리게 바라보던 바다를 죽어서도 보는 팔자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할 새도 없이 그렇게 선택의 여지없이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했을 것이다. 그렇게 바다에서 죽은 이는 낳고 자란 섬에 묻혔고 그 죽은 이와 함께 살았던 사람 또한 그 남은 삶을 섬에서 이어나갔기에 섬은 그리움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결국 사람이 없는 섬에만 그리움이 없었을 것이다. 죽은 이의 흔적이 없는 섬만이 산 자의 아픔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없는 섬을 찾아 들어가고 싶었을 지도.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이 섬의 바다이고, 저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저 섬의 바다라고 드넓은 바다의 경계를 무 자르듯 가를 수 없듯이, 그리움이 사라지는 공간과 시간의 경계 또한 그러하다. 그런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움은 어느 섬에 가도 사라지지 않고, 잊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러하다.       


분명 사랑도, 기억도, 그리움도 다 내 것인데 내 맘대로 못한다. 마치 바다의 경계를 나눌 수 없는 것처럼 애도의 시간 또한 그런지도. 이 시에는 그렇게 결코 마무리될 수 없는 그리움과 완결되지 않는 애도가 넘쳐흐른다. 그렇게 삶과 바다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며 넘실거리는 섬과 섬사람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기다림은 살아남은 자, 산 자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망부석이 되어 기다리는 것만 기다림이 아니다. 날을 기려 제사상을 차려 놓은 뒤, 산 자가 하는 일은 결국엔 기다림이다. 살아 있을 땐 쉽게 먹지 못했던 귀한 음식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 놓고 말이다. 그도 아니면, 유언이 있었다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릴 수 있다.      


딸이 태어나기도 전이다. 처고모부가 급사를 하셨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잠시 화장실을 갔다가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치어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처고모님 식구를 도와 장례를 치렀다. 화장을 하고 돌아오던 길, 난 처고모님과 한 차에 탔다. 그때 처고모님이 넋두리처럼 말하셨다. “최서방, 사내는 지 좋아하는 거 하다 죽는 기 최고라. 산 좋아하는 놈은 산에서 죽고, 술 좋아하는 놈은 술 마시다 죽고, 바다 좋아하는 놈은 바다에서 죽고.”

    

상갓집, 처가 식구들이 다 모였었다. 그날, 그 집의 구석진 방에서 나와 아내는 그나마 가방끈이 길다는 이유로 조의금 정리를 맡아했다. 상갓집은 떠들썩해야 한다면서 처고모님은 술을 마시자며 아귀찜을 시키셨다. 농담과 애도가 오가는 점심을 먹는 데, 처고모님이 말을 풀어놓았다.     


“지훈이 애비가 죽기 전날 밤에, 자야 우리 같이 잘래, 하는 기라. 그래 내가, 하이고, 그냥 자소, 했지. 그 사람이 새벽에 일 나가니까 따로 잔 세월이 좀 된다 아이가. 그게 마지막 소원이 될 줄 누가 알았겠노.”, 난 이 날의 대화가 너무 생생해서 한동안 처고모님을 뵐 때마다 울컥하곤 했다. 사랑을 미루는 이에게 난 이 날의 이야기를 꼭 해준다.


얼마 전, 주말의 저녁 식사 시간, 어쩌다 보니 제사상 이야기가 나왔다. 그날도 내가 맥주를 마시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아내가 “나중에 아빠 죽으면 맥주만 놔줘도 되겠다.”하고 말하니 딸이 “맞아, 맞아.”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 말을 받아 내가 말했다. “그래라. 맑고 깨끗한 라거 한 캔, 맛도 색도 진한 IPA 한 캔을 올려놔. 캐슈넛 한 움큼 하고.”


판본을 보니 초판은 1987년 3월 10일에 나왔다. 난 1997년 10월 10일에 나온 20쇄를 3천5백 원에 샀다. 분명 시인은 1978년에 시집을 냈다는데, 어째 10년 정도가 빈다. 알아보니 <신도출판사>라는 곳에서 500부를 찍어낸 것이 1판 1쇄였다. 그 뒤 9년의 세월이 흘러 판권이 <동천사>로 넘어갔고 난 그 판본을 산 것이다. 그렇게 20여 년이 흐른 후, 다시 <우리글>이라는 출판사로 판권이 넘어가 2008년에 새 판본이 나왔다. 행여나 이 시집을 읽고 싶어 산다면 이 세 번째 판본과 만날 것이다. 제목 앞의 번호는 시집에도 그리해서 그대로 옮겼다. 참고로 1929년생인 시인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시다.


뒷 표지 안쪽에 우표만한 서점의 스티커를 보니 이 시집은 대전에 있는 문경서적에서 샀다. 4년 동안 기숙사에서 살았을 정도로 여유롭지 않은 대학 생활이었는데 그래도 시집을 사는 사치는 부렸었던 모양이다. 그때 모은 음반과 시집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내 청춘의 사치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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