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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07. 2024

시인의 청춘이 멈춘, 그날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17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외우고 있는 시의 첫 줄 중 가장 슬픈 문장은 기형도의 것이다.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면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사랑을 잃었는데 도대체 뭘 쓴다는 말인가. 사랑을 잃었음에도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면 써야 한다. 쓸 수 없는 게 없어도 써야만 한다. 그것이 사랑을 잃은 뒤 행하는 유일한 애도의 방법이라면 그녀의 이름석자라도 반복해서 써야만 한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는 청춘은 얼마나 가난한 것인가?     


가난한 이에겐 사랑만큼 이별 또한 사치다. 이별은 헤어진 순간뿐만 아니라 그 뒤의 시간, 아픈 시간까지 포함하는 명사이자 동사다. 브라운 아이즈가 노래했듯이 추억이 사랑만큼 힘이 되기 위해선 이별의 고통을 곱씹는 시간이 필요하다. 후회하고 반성하고 그리워하고 그러다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깬 뒤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으로 인해 몸부림치는 날들이 이어지는 시간, 그 시간들로 촘촘히 채워진 날들이 필요하다.      


장례식장에서도 산 사람 목구멍엔 밥이 넘어가듯 사랑이 끝난 사람에게도 어김없이 일상이 찾아온다. 육체든 마음이든 아파도 쉴 수 없다. 생활의 무게는 사랑과 이별의 진동에도 흔들림 없이 나를 짓누른다. 가난한 이라면 그 무게는 더 크고 실감 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가난할수록 사랑만큼 이별 또한 사치다. 툴툴 털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야 한다. 애도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세상은 인간적이지 않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청춘은 이유를 찾는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한 이유, 긍정과 수용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이유를 찾는다. 그 찾음 끝에 남는 건 나 자신과 원망뿐이다. 세상이 나만 거부한 것 같다. 집안은 가난한데 행운도 찾아오지 않는다. 취업의 문은 내 앞에서 닫히고 출세의 길은 내 앞에서 끊긴다. 내 탓이다. 내가 문제다. 내가 더 잘했어야 했다. 그런가? 아니다. 어긋날 뿐이다.


어긋남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던 청춘은 그 어긋남의 반복 끝에 원인을 밖으로 돌린다. 질투와 원망이 뒤섞인다. 도시 곳곳에, 그렇게 내 탓과 질투와 원망을 짊어진 청춘의 초상이 곳곳에 놓여 있다. 배회의 흔적, 방황의 흔적이다.      


무턱대고, 막연하게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싫어한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자기애라는 건 그저 담담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나를 향해 묵묵히 살아가는 삶,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일",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 자신을 향해 다독거림을 보내줬으면 한다. 아침에 별 이유 없이, 거울을 보며 “오늘 좀 괜찮아 보이는데.”라고 중얼거려줬으면 한다. 사랑을 찾아 헤매기 전에 나를 사랑하는 나를 먼저 발견했으면 한다. 기특하지 않은가? 다들 그래도 용케 버티고 살지 않는가?


그는 어느 봄날의 새벽, 종로에 있는 파고다 극장에서 심야영화를 보다가 소주 한 병을 손에 든 채 죽었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뇌졸중이 공식적인 사인이지만, 공식적인 것이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죽을 당시, 요즘 말로 하면 학벌도 좋고 직장도 괜찮았다. 어쩌면 대학 시절까지 그를 따라다녔던 가난의 기억이 그의 삶과 몸에 깊은 파임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기형도의 사인이 가난은 아니지만 가난이 기형도의 죽음을 더 재촉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일찍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좋은 시를 읽을 수 있었을까? 기형도는 나와 띠 동갑이다. 겨우 열두 살이 많다는 얘기다. 그런 사람이 극장에서 죽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겨우 환갑을 넘긴 나이, 그야말로 뒤늦은 전성기를 맞아도 늦지 않은 나이다.


결국 기형도는 내게 있어 유재하, 김광석, 신해철 같은 존재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는 동안 얼마나 좋은 노래들을 우리에게 남겼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아쉬움이 섞인 긴 한숨을 내뱉게 하는 저들 같은, 기형도는 내게 그런 시인이다.      


작년 여름, 한 홍보 영상에 캐스팅한 부산의 한 연극배우의 차를 얻어 탄 적이 있다. 그 차 안엔 그를 포함해 세 명의 연극배우가 타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배우들의 가난에 대한 말이 나왔다. 영국에선 오직 연극만으로 먹고살 수 있고 심지어 셰익스피어나 체호프의 연극에만 출연하는 전문 배우로 살아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내가 무심히 말했다. “우리나라, 아직 선진국 아닌 것 같네요. 연극배우랑 시인 같은 사람이 끼니 걱정 안 하고 사는 나라가 진짜 선진국 아닐까요?”     


시인이 시만 써서 먹고사는 세상이, 연극배우가 연극만 해도 먹고사는 세상이 그렇지 않은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 아니겠나. 반대로 말하면 이들이 먹고 살만큼 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시도 읽고 연극도 보러 다닐 만큼 여유롭고 문화적 수준이 높다는 증거 아니겠나.     


가난을 박라연처럼 말하는 시인도 있다. 젊었기에 가난했고, 사랑했기에 그 가난도 소중한 추억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전기가 나가도 좋고, 가파른 산동네의 길을 오르면서도 오래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가난은 차갑고 건조하다. 습하고 냄새난다. 배고프고 춥다. 자랑할 수 없다. 숨기고 싶다.


친구도 부를 수 없고 시인이 <위험한 가계 1969>에 쓴 것처럼 반장의 집에 오려는 선생님의 가정방문도 말리고 싶다. 열심히 공부해 받은 월말고사 상장도 숨기고 싶다. 지긋지긋한 오늘도 싫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는 더 싫다. 그게 가난이다. 기형도의 시에 흐르는 담담한 슬픔의 기원이다. 그의 시를 유독 아프게 읽는 건 나 또한 그런 가난의 기억을 흉터처럼 안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앞서 말했듯, 나와 겨우 열두 살 차이다. 나이로 보나 삶의 궤적으로 보나 그가 죽지 않았어도 한 공간, 한 현장에서 마주치기 힘든 나이 차이다. 잘해야 강의실에서 교수와 학생 사이로 만났을지도. 그나 나나 운이 따라줬다면 어느 언론사의 데스크와 신참 기자로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운이 따라주지 않았더라도 어느 서점이나 공간에서 열린 북토크에서 그의 사인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그는 북토크라는 말이 흔해진 요즘까지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더 아쉽다.


판본을 봤다. 초판은 1989년 5월 30일에 나왔다. 시인이 죽은 뒤에 시집이 나왔다. 이후 1993년 12월 10일까지 24쇄가 발행됐다. 그다음 해, 1994년 2월 20일에 재판이 나왔고 난 2005년 5월 3일에 나온 재판의 36쇄를 샀다.


3월 7일, 오늘은 그의 기일이다.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요즘, 누군가는 시인의 청춘이 멈춘 그날을 기억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시인도 문인도 그렇다고 열렬한 시 애호가도 아닌 그저 평범한 열두 살 어린 사내가 먼저 간 시인의 기일을 기억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의 시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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