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Mar 14. 2024

달라스 공항에서 무슨 생각을 했어?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18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 

 

안녕, 아빠

지금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마치 시 같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이

한그루의 나무 같다.

잔디와 나무가 있는 집들은 멀리 있고

햇살과 바람과 하얀 낮달이 네 마음속을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한그루의 나무가 세상에 서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고 또 잊어야 하는지..

비명의 출구를 알고 있는

나뭇가지들은 안심 속에 갇힌

지루한 서정 같지만

몸부림의 속도는 바람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내부의 소리다.

사람들의 내일은 불투명하고

나무들은 계획적이다.

정면으로 꽃을 피우지.

나무들은 사방이 정면이야, 아빠.

아빠, 세상의 모든 말들이

실은 하나로 집결되는 눈부신

그 행진에 참가할 날이 내게도 올까.

뿌리가 캄캄한 땅속을 헤집고 뻗어가듯이

달이 행로를 찾아 언 강물을 지나가듯이

비상은 새들의 것,

정돈은 나무가 한다. 혼란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은

마치 반성 직전의 시인 같아.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의 머릿속은 평생 복잡할 거래.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면

아빠의 눈빛은 집중적이래.

아빠,

피츠버그에 사는 언니의 삶은 한 권의 책이야.

책이 쓰러지며 내는 소리와

나무가 쓰러질 때 내는 소리는 달라.

공간의 크기와 시간의 길이가 다르거든.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높은 첨탑이 있는 성당의 종소리처럼 슬프게

온 마을에 퍼진다니까.

폭풍을 기다리는 고요와

적막을 견디어내지 못한 시간들이

잎으로 돋아나지 못할 거야.

나는 가지런하게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해.

이국의 하늘, 아빠,

여기는 내 생의 어디쯤일까?

눈물이 나오려고 해.

버스가

영화 속 장면처럼 나를 데리러 왔어,

아빠는, 엄마는, 또 한 차례

또 한 계절의 창가에 꽃 피고 잎 피는 것에 놀라며

하루가 가겠네,

문득문득 딸인 나를 생각할지 몰라, 나는 알아,

엄마의 시간, 아빠의 시간, 그리고 나의 시간,

오빠가 걸어 다니는 시간들,

나도 실은 그 속에  있어

피츠버그에서는 버스가 나무의 물관 속을 지나다니는 물같이 느려

피츠버그에 며칠 머문 시간들이

또,

그래

구름처럼 지나가는

책이 되어,

한 장을 넘기면

한 장은 접히고

다른 이유가, 다른 이야기가 거기 있었지,

책을 책장에 꽂아둔 것 같은

내 하루가 그렇게 정리되었어,

나는 뉴욕으로 갈 거야,

뉴욕은 터득과 깨달음을 기다리는

막 배달된 책더미 같아

어디에 이르고, 어디에 닿고, 그리고 절망하는 도시야

끝이면서 처음이고

처음이면서 끝 같아

외면과 포기보다 불안과 긴장이 좋아,

선택이 싫어,

아빠, 나는 고민할 거야

불을 밝힌 책장 같은 빌딩들,

방황이 사랑이고, 혼돈이 정돈이라는 걸 나는 알아

도시의 내장은 석유냄새가 나,

그래도 나는 씩씩하게 살 거야,

난 어디서든 살 수 있어.

시계 초침처럼 떨리는 외로움을 난 보았어,

멀고 먼 하늘의 무심한 얼굴을 보았거든

비행기 트랩을 오를 거야,

그리고 뉴욕,

인생은 마치 시 같아,

난해한 것들이 정리되고

기껏 정리하고 나면

또 흐트러진다니까, 그렇지만  아빠,

어제의 꿈을 잃어버린 나무같이

바람을 싫어하지는 않을 거야,

내 생각은

멈추었다가 갑자기 달리는

저 푸른 초원의 누떼 같아

그리고 정리가 되어 아빠 시처럼 한 그루 나무가  된다니까,

아빠는 시골에서 도시로 오시기까지 반백년이 걸렸지,

난 알아, 아빠가 얼마나 이주를 싫어하는지,

아빠는 언제든지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겠지,

갑자기 땅을 밀어내고

자기 자리를 차지해 가는 그런 긴장과 이완,

그리고 그 크기는 나의 생각이야,

밤 냄새가 무서워

마루를 통통 구르며 뛰어가

아빠  이불속에

시린 발을 밀어 넣으면

아빠는 깜짝 놀랐지.

오빠는 오른쪽,

나는 아빠의 왼쪽에 나란히 엎드려

아빠 책을 보았어,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를 거야,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

쓰러지는 것들도, 일어서는 것들처럼

다 균형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아가게 될 거야,

아빠, 삶은 마치 하늘 위에서

수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바람 같아,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그리운

아빠


몇 년 전부터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엊그제 비가 올 때도 같은 마음이 들었다. 다섯 시쯤 날리기 시작한 빗방울은 30분쯤 지나 제법 묵직해졌다. 퇴근한 아내도 우산을 들고 들어 왔다. 당연하게도 우산 없이 영어 학원을 간 딸을 데리러 갔다. 딸을 기다리는 동안 학원 버스 다섯 대가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 사이 검은색 세단 몇 대와 날렵한 경차 몇 대가 내 앞에서 자기 아이들을 태워 갔다. 난 보라색 우산을 펼쳐 들고 딸의 파란 우산을 손에 들고 아이가 나올 학원 입구를 보며 서 있었다. 딸이 나왔다. 내가 쓰고 있던 우산을 딸에게 건네고 난 파란 우산을 폈다.      


운전을 못하기도 하지만 내 차도 없다. 언제나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속 편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기에 차를 살 생각도, 운전을 할 생각도 가져본 적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러나 가끔, 이렇게 빗속을 걸어 딸을 학교에 바래다주거나 마중을 나가 데려올 때, 특히 아이가 방과 후 교실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날, 그 바이올린이 적지 않도록 품에 바짝 안고 우산을 들고 아이 옆에서 함께 걸어갈 때면 미안한 마음이 뭉글하게 피어오른다. 그런 아빠 옆에서 아무런 불평 없이,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고 학교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딸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귀퉁이가 크래커처럼, 아주 작은 조각들로 바스러지는 느낌이 든다. 미안하다.    


딸은 이런 아빠도 안아준다. 이런 아빠도 무한정 사랑한다. 난 그저 무심히 바라보는데 그렇게 바라보는 내 눈빛이 좋다고 말한다. 그런 아빠의 눈빛은 자신을 사랑스럽게 보는 눈빛이라고 한다. 그때 내 눈빛이 어떤지 알 길이 없다. 거울을 보며 연습할 수 없는 눈빛이다. 딸을 향한 사랑을 미리 연습할 수 없었던 것처럼.      


딸은 자기 전, 아니 자기가 그러고 싶을 때마다 안아달라고 한다. 특히 자기 전,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NBA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거나, 역시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제대로 이해도 못하는 들뢰즈 같은 이의 철학 책을 읽고 있는 아빠에게 다가와 안아달라고 한다. “또 들뢰즈야?”하고 말하며 고개를 저으면서.     


팔을 벌리면 딸이 안긴다. 자신이 이미 강아지의 시절이 지났다는 걸 모르는 덩치 큰 골든레트리버처럼 안긴다고 딸에게 말했더니 한참 품에 안겨 깔깔댄다. “야, 의자 부서지겠다.”하고 핀잔을 줘도 개의치 않는다. “이거 국산이거든.” 같은 말로 아빠의 말을 가볍게 받아친다. 국산이긴 하지. 그런데 이 의자, 아빠가 조립했다.   


키는 이제 엄마만큼 컸고 발은 엄마보다 크다. 그러나 아직 애다. 엄마한테도, 나한테도 아기 소리를 듣고 자기도 아직 아기라고 생각한다. 제로베이스원과 라이즈를 좋아하지만 <흔한 남매>를 보면서 킬킬 거리기도 한다. 아빠가 맥주 마실 때마다 엄마를 흉내 내어 잔소리 비슷한 것도 하지만 아빠가 맥주를 사러 갈 때면 자기를 위해 탄산음료 하나만 사다 달라고 몰래 부탁한다. 소녀이면서 어린이고, 어린이면서 소녀다.      


화요일 아침, 씻고 안방에 들어와 출근준비를 시작하는 아내에게 그 공간을 양보하고 나왔다. 거실엔 딸이 없는데 딸의 방문이 열려 있다. 의아한 눈빛을 담아-이 눈빛 또한 어떤 눈빛인지 모르나 아내는 내 눈빛에 담긴 질문을 읽어낸다 - 아내를 돌아보니 딸이 공부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딸은 공부할 것이 있으면 새벽에 일어나 공부를 한다.      


그렇게 이것이 필요하다 싶은 순간이 오면 스스로 선택하여 실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서 끌어줄 능력도, 나보다 사십 년이나 늦게 태어난 한 인간의 미래를 예측할 만큼 예지력이 높지도 않기에 딸이 나아가는 여정의 뒤를 따라가며 도와주고 있다. 지치면 쉬게 해 주고 배고프면 밥을 먹인다. 덥다고 하면 에어컨을 틀고 춥다고 하면 보일러를 땐다.


봄에는 곰취와 한재 미나리를 함께 먹고 여름에는 자두와 복숭아를 먹는다. 가을엔 할아버지의 선산에서 주어온 밤을 구워 먹고 겨울이면 굴과 가리비, 그리고 할아버지만 알고 있는 포항 어딘가에서 말린 과메기를 잔뜩 주문해서 먹는다. 그뿐이다. 내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뿐이다.


딸이 성실히 공부하는 이유를 난 모른다. 어떤 동기가 아이를 새벽에 깨우는지,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듣게 하는지, 영어 학원에서 몇 달 만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이는지 난 그 이유를 모른다. 정말 자신이 꾸고 있는 그 꿈이 실현 가능하다고 믿고 나아가는 것인지 난 정확히 모른다. 그 힘, 그 꾸준함, 그 모든 것이 어디서 왔고 누구로부터 왔는지 난 모른다. 다만 그 점이 나와 닮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딸이 내 유전자를 받았음을 웅변하는 증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것은 발뿐이다. 발가락은 물론이고 발 모양 전체가 나를 쏙 빼닮았다. 복숭아 뼈의 비율과 깊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뒤꿈치의 각도까지.     


애초에, 고독에 대해 쓰려했다. 한 단락을 쓴 뒤 두 번째 단락을 쓰는데 딸에 대해 써졌다. 응? 이건 좀 관련이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생각이 난 김에 계속 써내려 갔다. 다음 단락을 쓰는 데 또 딸의 이야기가 써졌다. 그렇다면 딸의 이야기를 써야지 하고 생각을 하고 딸에 관한 시를 생각했다. 그런 시를 분명 읽은 기억이 있는데 누구의 시였는지, 제목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인이 한국의 유명 시인이라는 것 정도만 간신히 기억났다. 불쑥 “김용택 딸 시”하고 검색을 했다.       


연의 구분도 행의 구분도 어지럽다. 생각의 갈피 또한 이리저리 튄다. 당연하다. 중학생 소녀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써내려 간,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다. 연서(戀書)다. 온갖 그리움이 담겨 있다. 그 그리움들 사이사이 소녀의 꿈과 낯선 도시에서 겪었고, 겪을 두려움이 얼핏 내비친다. 그 사이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끼어든다. 책에 대한 생각도, 언니에 대한 생각도 끼어든다.


평이 한 문장 뒤에 난해한 생각이 깜빡이 없이 머리부터 들이박는다. 연의 구분이 없으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A에 관한 생각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B의 생각인지 알 수 없다. 이 생각은 저 생각과 맞물려 있고, 저 생각은 다시 뒤이어 오는 생각과 오버랩된다. 마치 한 편의 로드무비처럼.     


당연하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논문의 목차처럼 일목요연하게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그 여자 생각을 하고 잘 생긴 오빠가 지나가면 그쪽으로 생각이 튄다. 중학생 소녀라면 그 생각의 갈피는 더 어지러울 것이다. 게다가 낯선 도시다. 가족은 멀리 있다. 내일은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 쿠에틴 타란티노의 영화처럼 생각들은 정신없이 등장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생각은 이어졌을 것이다. 찾아보니 피츠버그에서 뉴욕까지 비행기로 두 시간 가까이 걸린다. 이동거리만 대략 470킬로미터 정도다. 부산-서울 간 거리보다 더 길다. 그 시간 동안 더 많은 생각들이 찾아왔을 것이다. 그때의 생각들은 아빠에게, 시인에게 전해졌을까?     


이 시를 다시 읽으며, 당연하게도 딸을 생각했다. 혼자 내린 달라스 공항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달의 꿈같은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온 달라스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산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두 시간 동안 인천공항에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라도, 자기 소원대로 유학을 간다면, 다른 나라의 교정에서 잠시 짬이 났을 때 무슨 생각을 할까? 아빠와 엄마와 삼촌과 할머니, 할아버지와 고향인 부산에 대해서 생각을 할까? 뜬금없이 돼지국밥이 먹고 싶어 지거나 회를 먹고 싶어지진 않을까?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어떤 음악을 들을까? 아빠가 그리울까?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아빠가 좋아하던 맥주 브랜드나 아빠가 좋아하던 IPA를 보면 갑자기 아빠가 그립지 않을까?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들뢰즈나 라캉, 무라카미 하루키나 코난 도일의 책을 보면 아빠 생각이 나지 않을까? 정말 맘에 드는 책이나 작가를 발견하면 아빠한테 소개하고 싶지어지지 않을까? 자기 학교 수영팀의 수모를 보면, 해외를 나가는 사람이 기념품으로 뭘 사다 줄까 물으면 언제나 그 나라에서만 파는 수모를 사다 달라던 아빠 생각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수모를 사지 않을까? 그렇게 수모를 산 후면 '오늘도 아빠는 수영을 했을까?' 하며 궁금해하지 않을까?


보고 싶을 것이다. 이 편지를 받아 들은 김용택 시인은 울컥했을 것이다. 멀리 있는 딸이 보낸 소식이다. 남에 딸이 쓴 시를 보고도 울컥했는데 아버지 마음은 오죽할까? 짐작이 가면서도 짐작할 수 없는 마음이다. 나 또한 보고 싶을 것이다. 딸이 한 달 동안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보고 싶은 마음을 낯설게 바라봤다. 아직도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구나, 자식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들을 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그리워했다. 자식은 달랐다.  


언제, 어디서 이 시를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김용택 시인이 펴낸 시집도 많고 엮어낸 시집도 많다. 다른 이가 엮어낸 시집에 김용택 시인의 시도 많이 실렸다. 시와 관련된 사이트나 게시판까지 포함하면 이 시에 대한 기억의 출처를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시는 2021년에 나온, 우리 시 마흔한 편이 실린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되었네>와 2015년도에 나온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 김용택의 꼭 한 번 필사하고 싶은 시>에 실려 있다. 원전은 2013년에 나온 김용택 시인의 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이다. 이 중 가장 눈에 익은 책은 두 번째 책,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 김용택의 꼭 한 번 필사하고 싶은 시>다. 이 책에는 다른 시인들의 시와 함께 독자가 사랑한 김용택의 시 열 편이 실렸는데 그중 한 편이 바로 이 시다. 아마도 어디선가, 그러니까 어느 서점 한 귀퉁이에서 이 시집을 파라락 넘겨가며 읽지 않았을까 짐작만 하고 있다. 참고로 이 시는 시인의 딸이 보낸 편지를 시인이 시로 고쳐 쓴 것이다. 시의 전문을 실었다.


화요일 저녁, 딸에게 이 시를 소개해준 후 한 번 읽어보라고 했다. 딸은 자신의 휴대폰으로 시를 찾아 읽었다. 난 그동안 밀러 맥주를 마셨다. 잠시 후, 다 읽은 딸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많은 것도 나를 닮았다.


사진은 딸이 텍사스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아빠에게 주려고 틈틈이 사 모은 기념품이다. 어설픈 로켓 모양의 열쇠고리는 휴스턴의 나사 박물관에서, 쇠로 된 도로 표지판 모양의 열쇠고리는 오스틴에서 샀다고 한다. 작업실에 갈 때마다 들고 다니는 토트백 고리에 둘 다 걸었다.


                     

이전 17화 시인의 청춘이 멈춘, 그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