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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21. 2024

고독, 그 차가운 진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19

고독 - 엘라 휠러 윌콕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되리라.

슬프고 오래된 이 세상은 즐거움을 빌려야 할 뿐

고통은 자신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노래하라, 그러면 산들이 화답하리라.

한숨지으라, 그러면 허공에 사라지리라.

메아리는 즐거운 소리는 되울리지만

근심어린 목소리에는 움츠러든다.     


환희에 넘쳐라, 사람들 너를 찾으리라.

비통해하라, 그들이 너를 떠나리라.

사람들은 너의 기쁨은 남김없이 원하지만

너의 비애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뻐하라, 그러면 친구들로 넘쳐 나리라.

슬퍼하라, 그러면 친구들을 모두 잃으리라.


너의 달콤한 포도주는 아무도 거절하지 않지만

인생의 쓰디쓴 잔은 너 혼자 마셔야 한다.

잔치를 열라, 너의 집은 사람들로 넘쳐 나리라.

굶으라, 그러면 세상은 너를 지나치리라.

성공하고 베풀면 너의 삶에 도움이 되지만

너의 죽음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

환희의 전당은 넓어서

길고 화려한 행렬을 들일 수 있지만

좁은 고통의 통로를 지날 때는

우리 모두 한 사람씩 줄 서서 지나가야 한다.


얼마 전 배우 류승룡은 삶에 찾아오는 어두운 시절을 터널에 비유했다. 멈춰 서 있으면 그곳은 동굴이 되지만 앞으로 나아가면 그곳은 터널이 된다고. 그런가?      


긍정적인 말처럼 들린다. 멈추지 않고 간다면 절망도, 좌절도, 외로움도 끝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만약 더 이상 갈 수 없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런 말은 터널을 나온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멈추지 않고 나아간 끝에, 결국 터널의 끝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터널을 지나고 있는 사람은 절대 저런 말을 할 수 없다.      

미래가 막막한 사람에게 힘을 내라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희망을 말하는 건 사치다. 조금 더 힘을 내서 걸어보라고 재촉하는 것도, 조금만 더 가면 터널이 끝난다고 말하는 것도 부질없다.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아니 모를 때가 있다.      


상상해 보자. 터널에 처음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높은 산을 처음 오르는 사람과 똑같은 심정이다. 한라산이든, 설악산이든 제법 높은 산을 처음 오르면 막막하다. 도대체 이 산의 끝은 어디인가? 아니, 그저 동네의 적당한 산을 올라도 그렇다. 어쩌면 등산의 진정한 쾌감은 낯선 산을 처음 오를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랐던 산을 반복해서 오를 때 찾아오는 쾌감은 다른 차원, 또는 다른 수준의 것일지도. 미지의 영역을 향해 다가갈 때 엄습하는 막막함을 스스로 억누르며 한발 한발 오를 때 찾아오는 감정은 어쩌면 탐험가의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터널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첫 터널을 들어가는 이에게 이 터널이 몇 킬로미터이고, 그래서 계속 가다 보면 끝난다는 말이 통할 리 없다. 심지어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조차 없다면 그 터널의 경험은 막막함 그 자체다.      


혹시 어린아이를 데리고 자동 세차장에 가 본 적 있나? 그러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곳을 가 본 아이와 말이다. 딸은 처음엔 차에서 내렸다. 그러니까 그 입구를 보자마자 놀래서 나와 함께 차에서 내렸던 것이다. 그 소음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고 세차 시간은 고작 1,2분 밖에 안 걸린다는 걸 딸은 몰랐다. 설령 그것을 말해준다 한들, 그 “분”이라는 시간의 감각이 아이에겐 없었다. 조금 큰 후에, 딸은 그 세차장의 "시련"을 견뎌냈다. 소음도, 요란한 물줄기도, 느닷없이 덮쳐오는 비누 거품도, 토네이도처럼 돌아가는 커다란 회전 걸레도 참고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두려움이 찾아왔다. 처음 겪는 뭔가가 항상 있었다. 아이만 그런가?   


대형 계단식 강의실, 맨 앞줄에 교수들이 앉아 있고, 그들 앞에 나 혼자 서 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질문을 던지고 난 대답을 한다. 내가 공부한 것에 대해, 그 공부로 깨달은 것에 대해. 프랑스 영화에 종종 나오는 학위 시험 장면이다. 인생이 던지는 시험 문제를 풀 때,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      


어른이 된다고 좌절과 절망을 견디기 쉬운 건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모든 일에 담담해지는 건 아니다. 인생은 이런 시험의 연속이다. 우린 평생 인생이 던지는 문제 앞에선 학생이다. 인생은 같은 문제를 던지지 않는다. 예습도, 복습도 소용없다. 공부를 아무리 해도 쓸모없을 때도 있다. 어제 풀었던 모의고사는 내일엔 쓸모없고, 어제 찾아 외운 정답은 내일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도 있다.


얼핏 긍정적으로 살라는 말처럼 들린다. 마치 노홍철이 인용한 그 유명한 말,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의 다른 버전처럼 들린다. 제목을 보지 않고 시만 읽는다면 더 그렇게 보인다. 이 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진실을 말할 뿐이다. 삶의 진실.     


앞서 말한 시험 장면처럼, 우린 인생과 홀로 마주 선다. 그런 삶이다. 물론 우리에겐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고 연인도 있다. 사람에 따라선 개와 고양이와 술친구와 섹스 파트너까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시험장 밖에 있는 존재들이다. 힘내라고 응원을 보내고 아침에 따뜻한 한 끼를 차려주고 각자의 위치에서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를 하고 좋은 결과가 나오길 누구보다 바랄 수는 있지만, 시험장에 들어올 수는 없다. 우리가 살면서 고독에 대해, 삶에 내재한 이 본질적 요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다.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 외로움은 물리적 현상이고 일시적인 사건일 수 있지만 고독은 선택하는 것이다. 누군가 있어도 고독할 수 있고, 누군가 없어도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여 들어간 감옥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대중 속에 있어도 고독할 수 있고 혼자 있어도 고독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려운 사람은 고독할 수 없다. <낭만적 은둔의 역사>에도 나오듯 과거의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과 장소를 스스로 찾아 들어갔다. 긴 산책을 하고 조용히 책을 읽고 뜨개질을 했다. 일종의 예행연습 같은 것이었다. 삶이라는 고독 그 자체를, 그 삶의 순간순간, 모퉁이 모퉁이마다 나타나는 외로움이라는 괴물을 고독으로 길들이기 위한.      


시인이 말하는 고독은 차갑다. 원래 진실은 차갑다. 삶의 고통스러운 순간, 아무도 없을 때 우린 굴을 찾듯 고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돈은 구걸할 수 있지만 사람의 온기는 구걸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곁에 부를 수 있는 힘은, 내 곁을 타자에게 허락하는 힘은 나에게만, 또 타자에게만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능동적 힘이기에 스스로 선택함에 달려 있다.      


고독의 예행연습이 필요하다. 인생은 연습할 수 없지만 최소한 고독이라도. 불가항력적으로 타자와 만나듯, 떠남도, 홀로 됨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때를 대비하여 우리는 찬란한 영광의 순간에도 그 영광이 사라진 뒤 홀로 남겨진 나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고독은 무대에 홀로 남겨진 배우가 겪는 시간과 같은 것이다.      


결국 고독은 혼자 남겨진 이의 견딤과 그 남겨짐의 자발적 선택을 의미하기에, 고독이라는 단어에는 주체의 강함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 강한 자만이 스스로 고독을 선택할 수 있다. 결국 고독하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 사람들이 파도처럼 넘칠 때도 섬처럼 고립된 순간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지갑이 두툼할 때도 그것이 애초에 비어 있는 채로 내 손에 들어왔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태어난 인간은 언젠간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것처럼.


이 시는 영화 <올드보이>에 나왔다. 당연하게도 영화 속 그 대사가 시인 줄 몰랐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 시의 전문은 류시화가 엮은 <시로 납치하다 - 인생학교에서 시 읽기 1>에 실려 있다. 이 안엔 여러 나라의 다양한 성격을 가진 시인들의 시가 실려 있다. 이름만 대면 알만 한 사람도 있고 생소한 사람도 있다. 시를 실은 뒤 시와 시인에 대해 짧게 설명하는 류시화의 글이 붙는다. 시선집이지만 엮은이의 철학을 매듭 삼아 묶었기에 하나의 메시지와 분위기가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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