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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28. 2024

내 카피의 숨은 선생, 하이쿠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20

나는 떠나고

그대는 남으니

두 번의 가을이 찾아오네 - 부손   

  

‘난 혼자요’하고 말하자

여인숙 주인이 숙박부에 그렇게 적었다

이 추운 겨울밤 - 이싸     


이 늙은 벚꽃나무

젊었을 때는

소문날 정도로 사랑받았지 - 이싸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걸 - 소세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 타다토모     


마음을 쉬고 보면

새들이 날아간 자국까지

보인다 - 사초     


이 세상

지옥의 지붕 위를 걸으며

꽃구경을 하네 - 이싸   


말이 너무 많다. 글도 많다. 출판인들의 글을 엿보면 책을 읽는 사람보다 책을 내고 싶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일까? 읽은 만큼 쓰고 싶을 뿐, 읽은 책의 권 수만큼 책을 내고 싶은 욕심은 없다. 아니 그런 꿈은 불가능하다. 뭔가를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고, 그 쓴 것의 결과물이 내가 봐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것이, 심지어 누가 봐도 봐줄만한 것, 그런 것들이 묶여 세상에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종이의 질감과 고유의 등걸을 가진 책의 부피를 가진 존재로 나오는 건 바람만으로 안 된다는 걸, 또 설령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부끄러울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전자의 사례는 이렇다. 딸의 1학년 생활을 기록했던 원고를 출간해 주겠다는 출판사의 임원진이 바뀌면서 그 전의 모든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내 원고를 맡았던 편집자는 사과를 하며 내게 이런 기원을 해줬다. “눈 밝은 편집자를 만나시길.”이라고. 물론 당연하게도, 아직 못 만났다. 후자의 사례는 딸의 원고 이전에 잡다하게 흩어져 있던 여러 글을 하나로 묶어 여기저기 투고를 했었다. 당시엔 지역의 출판사에만 투고를 했는데, 한 곳에 출판을 해준다고 했다. 당연히 원고료도 없고 교정도 내가 봐야 했으며 표지 디자인도 지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어떻게 됐냐고? 뭘 어떻게 돼. 망했지. 망했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판매 측면, 다른 하나는 질적인 측면이다. 일 년 후, 그 원고들을 다시 봤는데 그야말로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장광설에 불과했다. 그 글들을 그나마 글다운 글로 고쳐 쓰는 데만 몇 년이 걸렸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내가 썼고 쓰고 있는 글은 크게 세 종류(였)다. 이 중 한 종류는 소위 접어버렸다. 그 “접어버린” 한 종류는 학술적인 글이다. 들여 쓰기 몇 칸부터 각주 다는 법까지 다 정해져 있는 그런 글. 학교에서 숱하게 썼다. 덕분에 관련 학계 학술지에 두 번 정도 실렸지만, 그게 또 뭐 그렇게 엄청나게 기분이 좋지는 않더라. 솔직히 월간 에세이에 실렸을 때가 훨씬 기분이 좋았다. 솔직한 심정이다.      


두 번째 종류는 당연히 목적이 있는 글이다. 소위 사람과 세상을 움직이는 걸 목적으로 하는 글. 광고/홍보와 관련된 글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선거 관련 글도 제법 썼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의 직원 교육용 서적도 몇 권 대필했다. 기업의 역사를 다룬 책도, 국제 행사 관련 백서도 몇 권 대필했다. 이런 글을 쓸 땐 고민이나 고뇌 같은 건 없다. 그저 주어진 기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마감 일에 맞춰 일을 끝내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고 그에 따라 목차를 만들고, 그 목차에 따라 세부 목차와 제목을 만들고 목차 별로 할당될 분량을 정하고, 그 분량을 소화하기엔 자료가 부족한 목차 내용을 파악하고, 부족하다면 다시 자료를 보강한다. 이후 하루에 몇 시간 써 내려가야 마감일에 맞출 수 있는 정한 뒤, 그 뒤로는 기계적으로 써내려 간다. 자료를 배열하고 교정하고 쓰고 보내고....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써 내려간다. 미안하지만 지금 현재 서점에 깔린 유명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자서전, 대기업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는 명목으로 회장님 말씀을 수록한 책들, 기업의 역사를 드라마틱하게 담은 책들 대부분은 이렇게 나 같은 유령 작가가 영혼 없이 써 내려간 것들이 대다수다.


요즘엔 세 번째 종류의 글을 많이 쓰고 있다. 쓰고 싶은 글, 누군가 읽어줬으면 하는 글, 질문이면서 답인 글, 어제와 오늘의 생각과 말, 살면서 스쳐가는 사람과 사물, 장면이 담긴 글, 그 해석과 느낌들을 최대한 솔직하게 쓴 글. 그런 글들을 쓰려고, 그것도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쓰려고 애쓰고 있다. 마치 권투의 잽처럼,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스트레이트 같은 글.


그래도, 여하간, 다시, 말이 너무 많다. 글도 많다. 내가 쓰는 만큼 말을 많이 하면 토크쇼를 진행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은 거의 없다. 아내와 딸의 팽팽한 신경전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서 UN 평화유지군 같은 말을, 퇴근한 아내에게 적당한 안부를 묻기 위해서 의례적인 말을 나열할 뿐이다. 딸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늘 어땠어? 안 추웠어(더웠어), 급식 어땠어?      


나이가 들수록 많이 읽고 적게 말하고, 빨리 쓴 다음 오래 고치려 한다. 말은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나이가 들수록 입을 닫게 된다. 많이 읽으면 글을 보는 눈은 높아지니 당연히 읽어온 세월이 길면 길수록 내가 쓴 글의 남루함이 쉴 새 없이 보여 수선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고.      


사람이 많은 건 괜찮다. 시끄러운 건 싫다. 백화점이나 마트가 싫은 이유다. 벌집에 들어온 것처럼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는다. 요즘엔 대형 서점도 이렇다. 오히려 알라딘 중고서점이 더 조용하다. 거긴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보다 쓸데없는 걸 덜 팔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수영장에도 사람이 많지만 말은 없다. 다들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애들 쓰고 있으니까.


지하철에도 사람은 많지만 다들 조용하다. 스마트 폰 덕분이다.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액정을 보고 있다. 옆에 있는 친구도, 애인도, 방해를 하지 않는다. 자신도 볼 것이 있으니. 동해선이 특히 조용하다. 적당한 흔들림, 긴 역간 거리, 거의 대부분이 한적한 마을의 역, 롯데월드와 아웃렛 등이 있는 오시리아 역만 벗어나면 젊은 친구들도 사라진다.      


빌 에반스의 피아노처럼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쓰고 싶다. 아직은 바람에 그칠 뿐 초안은 여전히 어수선하다. 이제 막 이사를 끝낸 집 같다. 짐을 옮기고 정리를 하고 가구를 재배치한 뒤 잔다. 다음 날 일어나 보면 뭔가 마음에 안 든다. 다시.... 글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정리, 완벽한 배치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꽤 오래전, 그러니까 20여 년 전 카피와 관한 책을 읽을 때, 일본 광고와 카피를 많이 봤다. 그들의 광고, 특히 이미지 광고엔 여백이 있었다. 물론 그 반대쪽엔 아주 요란스러운, 그들의 아침 버라이어티 쇼나 개그 같은 광고가 있었지만. 아내를 따라 처음 일본 여행에 갔을 때, 호텔에서 저녁마다 못 알아들으면서도 TV 광고를 아주 열심히 봤다.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광고가 교대로 나올 수 있을까? <러브레터> 같은 광고와 <미스터 맥도널드> 같은 야단법석, 난장판 같은 광고가 동시에.      


하이쿠는 말의 스냅사진이다. 그 순간, 해야 될 말을 한다. 제한된 글자 수는 카메라 역할을 할 뿐이다. 그 규칙이 오히려 낭비를 없앤다. 필름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는, 색감도 제각각인 폴라로이드 카메라처럼. 내가 알고 느껴 온 일본 문화는 일본 광고와 카피처럼 낭비와 절제의 양극단 사이를 오간다. 왁자지껄한 스모와 한방으로 해결하는 극진 공수도의 대조처럼, 대사는 적은데 폭력은 넘쳐났던 기타노 다케시의 90년대 영화처럼.    

느낌을 말로 표현하면 당연히 그 느낌은 산화된다. 느낌의 색감은 탈색되고 풍경은 왜곡된다. 하이쿠는 빈 곳을 일부러 만들어 그 여백의 채움을 읽는 이의 몫으로 남긴다. 여백의 음미를 통해, 해석의 시간을 통해 하이쿠는 독자에게 수용된다.


어쩌면 모든 글이 그래야 할지 모른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처럼 쓰지 않은 부분으로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아무나 될 리 없다. 결국 말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고 쓰지 않은 글로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는 사람은 긴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이런 형태의 일본 시가는 하이쿠를 비롯하여 와카와 센류가 있다. 와카는 5.7.5.7.7, 총 서른한 자로 이뤄진 정형시다. 하이쿠는 이것도 길다 싶어서 뒤에 7.7을 뺀 열일곱 자다. 하이쿠와 같은 글자 수를 가진 정형시로는 센류가 있다. 하이쿠가 계절감을 갖고 풍경과 자연을 노래한다면 센류는 풍자와 해학이 담겨 있다. 재미있는 헤드 카피의 기원을 찾는다면 아마 센류이지 않을까?      


와카의 운치를 담은 책으로는 일본 문학 번역가인 정수윤 작가의 <날마다 고독한 날>이 있다. 센류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책으로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 있는데 서점에서 펼쳐보면 키득키득 웃음이 나 주변의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주의 바란다. 이들 일본 전통 시 문학을 종합한 책을 찾아보니 제법 전문적인 책으로, 창원대학교 이수정 교수가 엮은 <와카ㆍ하이쿠ㆍ센류-그림시집>이 있다.


판본을 보니 2000년 3월 15일에 초판이 나왔고 난 2004년 11월 1일에 나온 초판의 8쇄를 샀다. 엮은이는 류시화인데 하이쿠와 그 번역의 묘를 “자연과 계절을 노래한 한 줄짜리 시. 여기서는 그 운에 맞춰 3행으로 번역하였다.”라고 첫 페이지 맨 아래, 왼쪽 귀퉁이에 작게 써 놨다.      


물론 번역으로 그 맛이 다 전달될 리 없다. 글자의 수와 일본말로 소리 내어 읽었을 때만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시조를 영어로 번역한 들 그 운율과 운치가 다 전달되겠는가. 같은 이치다. 다만 그 정서는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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