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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04. 2024

갖고 싶은 시인의 이름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21

흰 밤

      

녯 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

  이었다     


*녯 - 옛     


바 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구붓하다 - 몸을 조금 구부정하게 하다.

*지중하다 - 지정거리다. 곧장 나아가지 않고 한자리에서 지체하다.

*개지꽃 - 강아지풀, 혹은 메꽃

*쇠리쇠리하다 - 눈부시다. 눈이 시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소주)를 마신다

燒酒(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출이 - 뱁새

*마가리 - 오막살이

*고조곤히 - 고요히          


내가 어느 날 시인이 됐고 누군가 그런 내게 앞서 산 시인의 이름 중 하나를 필명으로 골라 쓸 수 있다고 허락한다면 난 백석을 선택할 것이다.     


백석의 시는 번역이 필요하다. 모든 시인이 그렇지만 그의 시는 그의 말로 쓰였다. 그의 시대, 그의 고향의 말이다. 한자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전집의 맨 뒤에는 사전이 따로 붙어 있을 정도다. 다시 읽으며, 용케도 잘도 읽어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시인들이 자신의 언어로 쓴다. 읽을 수 있다고 해서 텍스트 속에 스민 시인의 속내가 훼손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읽은 이에게 전달되리란 보장은 없다. 국립국어원의 표준말과 띄어쓰기를 지켜 써 내려간 시라 하여도 거기엔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 숨은 의미가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수많은 비유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춰진 뭔가가 있다. 누군가는 알아채고 누군가는 무심히 넘어가는 뭔가가 있다. 그 뭔가에 흔들리는 사람은 그 시인의 팬이 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그저 독자가 될 뿐이다.    


생각해 보면 어느 시대, 누구의 말이든 온전히 전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잘 아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는 그가 쓴 책이 아니라 강의를 옮긴 것이고, 라캉의 <세미나>들 또한 그의 제자가 강의록을 옮긴 것이다. 강의록은 강의의 모든 것을 담고 있을까? 솔직히 번역된 유명한 학자들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 학자들의 개념을 갖고 이러쿵저러쿵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고 주장의 논지로 삼을 때마다 정말 그 학자가 그런 생각으로 썼을까 하는 의심이 들곤 한다. 번역가들마다 한 작가나 학자의 텍스트, 심지어 하나의 개념의 번역과 사용을 놓고 옥신각신 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 유명한 카뮈의 <이방인>조차 오역이 지적되며 새로운 번역이 꾸준히 나오지 않던가?     

백석의 시는 우리말이나 오늘의 말이 아니기에 그 뜻이 바로 건너오지 않는다. 그가 살아낸 시대와 공간의 나와 다름이 건너기 힘든 강을 만들었다. 거의 백 년 전에 나온 시가 아니던가. 앞서 말했듯, 시간의 격차가 없어도, 옛 관서지방의 사투리를 쓰지 않아도 타자의 말은 쉽사리 건너올 수 없다. 종종 그 시대의 말을 오늘의 말로 번역하여 이해를 돕기도 한다. 타자의 말 또한 마찬가지다. 외국어의 번역과 같은 과정을 거치곤 한다. 그러나 번역과 해석이 수용과 이해를 보장해주진 않는다. 사투리를 표준어로 바꾼다고 해서 그 의미가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말들은 맥락과 행간, 그리고 삶과 공간 속에서 생명을 얻기에 오늘의 삶과 공간에 어울리게 그 말들을 번역하면 그 말들의 진의는 얼마쯤 훼손될 수밖에 없다.      


온전히 다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 몇 편은 내 마음을 두드렸다. 그가 쓴 시와 그 시에 담긴 풍경과 감정들은 오늘의 나에게 생경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불러 세웠다. 그렇다. 불러 세우는 것들이 있다. 멈칫거리게 한다. 그것은 감정의 호출이다. 그러나 백석은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슬픔도, 아픔도, 그리움도, 사랑도, 이별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본 관서지방의 풍경을, 자기가 사랑했던 가족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고흐나 밀레의 그림처럼 묘사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흐와 밀레의 그림을 볼 때, 아니 그렇게 늘 보던 그림을 어느 순간 다시 볼 때 미처 몰랐던 삶의 고통과 슬픔이 뚜벅뚜벅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처럼 백석의 시 또한 그렇다. 그렇게 불러 세우는 힘이 있다.      


내가 갖고 있는 그의 시집은 <백석시전집>이다. 그가 생전 유일하게 펴낸 시집 <사슴>에 수록된 시 서른세 편과 미발굴 시 예순한 편, 산문 일곱 편이 함께 실렸다. 엮은이는 당시 영남대 국문과 교수였던 이동순 시인이 다. 이동순 시인은 아직 살아계시다. 판본을 보니 1987년 11월 11일에 초판 1쇄가 나왔다. 난 2003년 2월 25일에 발행된 초판 15쇄를 샀다. 펴낸 곳은 <창작과 비평사>인데 판본을 보니 출판사 등록을 1986년 8월 5일에 했다고 되어 있다. 요즘 같았으면 문을 연지 일 년 갓 넘은 회사가 참 돈 안 되는 책을 냈다고 말 깨나 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관서지방은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태백산맥의 서쪽 지역을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동지방은 당연히 강원도 일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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