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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11. 2024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22

나를 만나거든  - 이용악


땀 말른 얼골에

소곰이 싸락싸락 돋힌 나를

공사장 가까운 숲속에서 만나거든

  내 손을 쥐지 말라

  만약 내 손을 쥐드래도

 옛처럼 네 손처럼 부드럽지 못한 이유를

 그 이유를 묻지 말어다오     


주름잡힌 이마에

석고처럼 창백한 불만이 그윽한 나를

거리의 뒷골목에서 만나거든

  먹었느냐고 묻지 말라

  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고

꿈 같은 이야기는 이야기의 한마디도

나의 침묵에 침입하지 말어다오     


폐인인 양 씨드러져

턱을 고이고 앉은 나를

어둑한 폐가의 회랑에서 만나거든

  울지 말라

  웃지도 말라

너는 평범한 표정을 힘써 지켜야겠고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를

그 이유를 묻지 말어다오          


가난

서귀포에 있는 이중섭 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다. 딸이 초등학교 입학 전이니 벌써 칠팔 년 전 일이다. 딸과 아내와 나는 작은 성처럼 보이는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과 사연을 꼼꼼히 보고 읽었다. 딸은 종이가 없어 담배 포장지에 그린 그림들을 유심히 봤다. 발가벗은 아이와 게와 물고기가 어울려 노는 그림을 질리지도 않은지 아주 오래, 유심히 봤다. 그가 살았다는 집도 들여다봤다. 집이 아니라 작은 문칸방. 이 작은 방에서도 식구들은 행복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바다와 아들과 아내와 끼니만 해결되면 그렇게 행복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난해도 가족과 함께라면, 사랑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끼니를 걱정하고 추운 겨울을 온기 없는 방에서 나야 하며 학교 월사금을 제때 못내 학교에 갈 때마다 교무실에 불려 가야 할 정도의 가난엔 행복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옷을 얻어 입고 친구를 초대할 수도, 초대받아도 갈 수 없다면, 운동화의 앞코가 터져서 꿰매어 신고 밑창에 구멍이나 빗물이 들어올 정도의 가난이라면 그런 가난엔 행복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면 그건 그 시간이 지난 후의 기억으로 포장된 된 것일 뿐이다.      


가난에 대해 말하자면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사람이건만 과거 시인들의 시 속에 스미어 있는 가난을 보고 있으면 속상하다. 가슴이 아프다. 장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들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 가난이 힘들지 않고 부끄럽지도 않다지만 가난한 마을에도 더 가난한 사람이 있고 그나마 살만한 사람이 있듯이 가난하고 힘든 시대에도 자신의 일상과 현실을 숨겨야 할 정도로 가난한, 더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  

   

해당화 정답게 핀 바닷가

너의 무덤 작은 무덤 앞에 머리 숙이고

숙아

쉽사리 돌아서지 못하는 마음에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     


네 애비 흘러간 뒤

소식 없던 나날이 무거웠다

너를 두고 네 어미 도망한 밤

흐린 하늘은 죄로운 꿈을 머금었고

숙아

너를 보듬고 새우던 새벽

매운 바람이 어설궂게 회오리쳤다

     

성 위 돌배꽃

피고 지고 다시 필 적마다

될 성싶이 크더니만

숙아

장마 개인 이튿날이면 개울에 띄운다고

돛단 쪽배를 만들어달라더니만     


네 슬픔을 깨닫기도 전에 흙으로 갔다

별이 뒤를 따르지 않아 슬프고나

그러나 숙아

항구에서 피 말라간다는

어미 소식을 모르고 갔음이 좋다

아편에 부어 온 애비 얼굴을

보지 않고 갔음이 다행타     


해당화 고운 꽃을 꺾어

너의 무덤 작은 무덤 앞에 놓고

숙아

살포시 웃는 너의 얼굴을

꽃 속에서 찾아보려는 마음에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     


                                  -조카의 무덤에서     


*어설궂게 - “몹시 어설프다.”의 북한 사투리     


사연

가난한 삶, 가난한 시대엔 유독 사연이 많고 깊다. 나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 나보다 먼저 죽는 일도 흔했다. 대수롭지 않은 병으로 죽기도 하고 하찮은 사고로도 생을 달리했다. 돈을 따라, 생계를 따라 가난한 마을을 떠난 가족과 소식이 끊기고 인연이 끊겼다. 기다리던 사람은 그리움 끝에 스스로 세상을 등지기도 했고 기다리다 지쳐 다른 이에게, 다른 곳으로 떠나기도 했다. 기다릴 사람을 그리워하며 객지에서 버티던 사람이 두 사람 몸을 누일 곳을 마련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그 사람을 찾으려니 없다. 온 것이 늦었다, 돌아선 것이 빨랐다,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많은 인연들이 끊겼다.     

 

드물게 오던 소식이 끊겨 애를 태우며 보낸 몇 년, 어느 해 불쑥 뒤늦게 도착한 부고는 황망한 슬픔을 불렀고, 없던 사람이라 여기고 살았던 삶에 사람의 공백을 남겼다. 희한하게도 어디 살아 있으려니 믿고 살면 담담히 살아지는데 죽었다는 소식 이후에는 그리 살아지지 않는다. 실존의 부재는 상상력과 희망으로 메울 수 있지만 죽음으로 인한 확고한 부재는 메울 방법이 없다.      


듣고 싶은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하고 죽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지독히도 가난하고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며 키웠는데 키가 자라고 몸이 컸다. 삼촌은 그렇게 커가는 조카가 대견하면서도 아프다. 그런 조카가 어느 날 죽었다. 애비는 돈 벌러 나고 어미는 기다리다 지쳐 야반도주를 한 뒤, 안고 엎고 키운 조카가 죽었다. 조카가 죽은 뒤 기다리던 이의 소식이 지각생처럼 도착했다. 항구에서 무슨 일을 하기에 엄마는 피가 말라가고 아버지는 어쩌다 몸이 퉁퉁 붓도록 아편에 찌들게 되었을까.      


어떤 사연은 모르는 것이 더 좋다. 상실된 것은 그런 채로 놔두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희망으로, 꿈으로, 상상으로 견뎌낼 수 있는 아픔은 그렇게 놔두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절망을 가로막고 있는 파수꾼인지도 모른다. 꿈은 대낮의 전투 속에 스러진 전우들의 시체를 어둠으로 덮어주고 있는 전장을 등진 채 쪽잠을 자는 참호 속 생존 병사의 찬란한 찰라의 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오지 않아서 버틸 수 있고 보이지 않아서 참을 수 있는 순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뭔가가 꿈이고 희망일지 모른다.    


쌍두마차     


나는 나의 조국을 모른다

내게는 정계비 세운 영토란 것이 없다

ㅡ그것을 소원하지 않는다    

 

나의 조국은 태어난 시간이고

나의 영토는 나의 쌍두마차가 굴러갈

구원(久遠) 한 시간이다     


나의 쌍두마차가 지나는

우거진 풀 속에서

나의 푸르른 진리의 놀라운 진화를 본다

산협(山峽)을 굽어보면서 꼬불꼬불 넘는 영(嶺)에서

줄줄이 뻗은 숨쉬는 사상을 만난다   

  

열기를 토하면서

나의 쌍두마차가 적도선을 돌파할 때

거기엔 억센 심장의 위엄이 있고

계절풍과 싸우면서 동토대를 지나

북극으로 다시 남극으로 돌진할 때

거기선 확확 타오르는 삶의 힘을 발견한다

    

나는 항상 나를 모험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천성을 슬퍼도 하지 않고

기약없는 여로를

의심하지도 않는다     


명일(明日)의 새로운 지구(地區)가 나를 부르고

더욱 나는 그것을 믿길래

나의 쌍두마차는 쉴새없이 굴러간다

날마다 새로운 여정을 탐구한다  


희망, 가능성, 또는 젊음

희망과 젊음과 가능성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없기에 거침이 없다. 희망과 가능성, 젊음이 품고 있는 슬픔의 시원(始原)엔 이 한계 없음과 거침없음이 있다. 마치 투명한 벽과 유리창을 구분 못하여 거기에 충돌하여 죽는 새처럼 젊음의 희망 안엔, 그 가능성 안엔, 그 한계 없음 안엔 충돌의 불안함이 내재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절망과의 충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안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우린 살아간다. 아니 살아야 한다. 어떤 것이 진짜 바다고 어떤 것이 트루먼의 앞을 막고 있던 거짓 바다인지 그 바다로 나가기 전엔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배를 띄워야 한다. 항해를 해야만 한다. 삶은 그렇게 모험이고 항해고 질주다.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장마 개인 날     


하늘이 해오리의 꿈처럼 푸르러

한 점 구름이 오늘 바다에 떨어지련만

마음에 안개 자옥히 피어오른다

너는 해바래기처럼 웃지 않어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그래도 사랑, 사람

울었다. 이 시를 읽다가 울컥했다. 한 참 뒤에 나오는 <전라도 가시내>를 읽을 때도 울컥했다. 사람이, 그래도 사람이 버티며 사는 건 사람 덕분인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힘들 때 기댈 사람, 그리고 함께 배고플 사람, 그 때문인가? 그건 행복인가? 아니 비극인가? 배가 고파 웃을 힘도 없는데 그 없는 힘마저 그러모아 사랑하는 이이게 미소를 보여주려는 이의 창백한 얼굴을 보는, 그 삶은.


온갖 고난을 헤치고, 길고 긴 사연을 온 몸에 휘감고, 한겨울 문을 열면 들이닥치는 찬바람처럼 그렇게 마음에 냉기를 가득 품고 도착한 낯선 땅에서, 나만큼 사연이 있는 여자를, 나와 닮은 여자를 앞에 앉히고 술을 마시며 내 이야기를 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보내는 며칠의 시간은 축복인가? 아니 또 다른 아픔의 마디를 만드는 것인가? 견디며 산다는 것은, 견디며 살아내는 삶은, 그래도 살아지는 삶은 축복인가? 다행이라 말할 수 있는 삶인가? 사랑하는 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용악의 시 속에서 난 이런 질문들을 건져 들었다. 잠시 몸도 마음도 욱신거렸다.


내가 갖고 있는 그의 시집은 그가 월북하기 전 출간한 네 권의 시집에 실린 시와 미발행 시를 한데 모아놓은 <이용악전집>이다. 백여 편의 시와 열 개의 산문이 실려 있다. 해설에 의하면 이용악은 1930년대 서정주, 오장환과 더불어 시삼재(詩三才)로 꼽혔다고 한다. 그런 그가 해방과 한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념과 그 분쟁이 만든 장벽 뒤로 사라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 그의 시는 출간될 수 없었고 읽힐 수도, 평가될 수도 없었다. 이 시집의 편집을 맡은 윤영천 교수님의 후기를 보면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이 된 건 1988년 7월의 일이었다.      


판본을 보니, 놀랍게도 1988년 11월 11일에 초판 1쇄가 나왔다. 해금이 된 후 불과 몇 개월만의 일이다. 이후 2판 1쇄가 1995년 12월 30일에 나왔고, 난 2003년 4월 30일에 발행된 2판의 4쇄를 샀다. 이 역시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왔는데, 해금이 된 시인의 시 전집을 이렇게 한데 모아, 그것도 이렇게 순발력 있게 냈다는 것이, 이 시대의 속도로 봐도 놀랍기만 하다. 책을 기획하고 교정하고 출판하는데 몇 개월은 당연하고 일 년도 훌쩍 넘겨 걸린다는 요즘에 비하면 저 시대의 출판인들은 도대체 얼마나 가열 차게 일했던 것인지.   

   

참고로, 찾아보니 <문학과 지성사>에서 개정판이 2018년에 나왔다. 엮은이는 여전히 윤영천 교수님이다. 내가 산 판본의 가격은 7천5백 원인데 이 새 개정판의 정가는 3만 2천 원이다.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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