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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18. 2024

시의 일, 또는 비판의 이유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23

홀로서기 - 서정윤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     


7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저마다 역할이 있다. 물이 하는 일이 있고 불이 하는 일이 있다. 쇠가 하는 일이 있고 나무가 하는 일이 있다. 요즘엔 추상적인 것의 역할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철학이 하는 일에 대해 생각을 하다, <니체와 철학>을 읽으며 그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수영이 하는 일, 과거 농구나 축구, 헬스, 클라이밍이 내 인생과 몸에 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철학이 지금 이 순간 내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      


그럼, 시는 무슨 일을 하는 걸까? 그 역할이 뭘까? 일제강점기의 시인들이 그러했듯 박노해나 기형도의 시는 어두운 시대의 초상을 그렸다. 시대의 진실을 밝히고 그 시대를 견뎌내며 사는 사람들의 표정을 담았다. 시대의 등대이자 기록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시절이 평온할 땐, 또는 시대가 평온하다고 느끼는 시인은 시대의 정서를 담아낸다. 이 땅을 딛고 사는 이들의 이야기와 풍경과 감정을 담아낸다. 동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를 읽으며 공감하고 위로받는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 시를 통해 과거를 이해하고 공감한다. 힘이 더 센 시는 시대를 가로지르고 건너뛰어 모두의 마음을 흔든다. 그런 시들은 몇 쇄, 아니 수십 쇄를 찍어내며 우리 곁에 남는다. 어떤 시들은 수십 년 후에도 사랑을 받는다. 시대마다 새로운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나 그 시대의 신인류에게 새롭게 해석된다. 시인은 세상에도 없어도 시는 남아 해마다 청춘이 된다. 좋은 시가 가진 생명력이다.     


서정윤과 <홀로서기>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90년대 국문학과에서는 “가벼운 시”의 전형으로 원태연 등과 함께 소개되기도 했다. 농담이 아니다. 오래된 이야기다. 한 30여 년 전, 국문과 여학생과 연애를 한 적이 있다. 그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시와 문학을 논하는 강의 시간, 교수가 이런 시들에 대해 신랄하게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시대의 정서를 담아내지도 못하고 고상한 한자를 사용하지도 않으며 시대의 아픔과 민초의 한을 담아내지도 않았다고, 대중가요와 별 다를 바 없는 시라고 깎아내렸다. 그때 한 여학생이 일어나 항변했다.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위로받았다면 그걸로 그 시는 할 일을 다 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90년대 중반의 이야기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학의 국문학과의 이야기다. 애인의 책꽂이에 시집 수백 권이 꽂혀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시와 시인이 장인과 문화재로 대접받던 시절의 이야기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 시집을 다시 봤다. 뒤의 판본을 먼저 봤다. 판본을 보고, 맨 앞의 발행인의 서문을 보고 이 시가 문단에서, 특히 학계에서 그렇게 폄하받은 이유가 조금은 이해됐다. 우선 판본을 보면 1판 1쇄는 1987년 3월 25일에 나왔다. 이어, 각 쇄가 언제 나왔는지, 그 날짜를 밝히고  있다. 그걸 보니 대략 그 뒤로, 길어야 20일, 짧으면 5일 간격으로 증쇄를 했다. 내가 산 건 1987년 8월 30일에 나온 25쇄다. 자, 정리를 해보자. 1쇄에 천 부 정도를 인쇄하는 것이 관례라고 했을 때, 그리고 시집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시인에게 내려 보낸 1쇄의 5백 부를 다시 올려 받았다는 발행인 장석주의 서문 내용으로 유추해 볼 때,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시인의 시집이 불과 5개월 사이에 2만 5천 부 정도 팔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2만 5천 부... 이후 이 시집은 시리즈를 다 합쳐서 3백만 부가 팔렸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다. 집에 어떤 가전제품이 있는지 담임교사가 대놓고 묻던 시절이었다. 집에 전화기 있냐? 냉장고는? 자동차는? 오디오는?... 이런 시대에 대구에 살던 한 평범한 교사이자 무명 시인의 시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장석주의 서문을 보면 당시 출판사 <청하>는 이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결과, 서정윤의 시가 시집으로 나오긴 전, 이미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가에 소문이 나 있었다는 것, 심지어 여러 카페에선 서정윤의 시를 벽에 적어 놓기도 했다는 것, 몇몇 서점에선 이 시를 찾는 이에게 주기 위해 <홀로서기>를 복사해 놓고 주기도 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서정윤과 그의 시는 시집이 나오기 전, 이미 유명해져 있었던 것이다. 너무 인기가 많다는 이유로, 너무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인해 그의 시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부당하게 비판받았는지 모른다. 도종환과 이해인 수녀의 시와, 그리고 뒤에 나온 원태연 등과 싸 잡혀서 말이다.


그는 왜 그렇게 비판받았던 걸까? 지금에 와서 보니, 그리고 이 시집의 서문과 판본을 보니 그를 향한 비판의 이유가 약간은 짐작이 간다. 그가 <홀로서기>라는 시를 영남대학교의 <영대문화>에 발표한 건 1981년이었다. 그 뒤, 알음알음 알려지다가 공식적으로 시집이 나온 건 1987년이었다. 앞서 말했듯 그의 시집은 도종환의 시집과 함께 불티나게 팔렸고, 당시에 유행했던 소녀 그림의 엽서에 반복해 실렸다. 대학생부터 나 같은 중학생까지 그와 그의 시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동네에 서점이 몇 곳이나 되던 시절, 퇴근길이나 하굣길에 무심히 가까운 서점에 들르는 것이 버릇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던 시인이었고 시집이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의 시는 보편적이어서 인기를 얻었고, 그렇게 보편적이고 대중적이고 인기가 많았던 것이 비판의 이유 중 하나였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시집 안에 한문으로 된 제목의 시가 몇 편, 아니 절반 이상 있는 것이 당연했던 당시에 그의 시집엔 한문으로 된 제목을 가진 시가 다섯 편 밖에 없다. 그나마도 네 편은 우문유희(愚問遊戱)라는 제목을 가진 시의 연작이다. 나머지 한 편은 성(城)이다. 문장도 평이하다. 사투리도 없고 한자어도 없다. 당연히 어려운 단어도, 난해한 주제도 없다. 낯선 지명이나 인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시는 일상어 -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 로 써졌고 그렇기에 당연히 쉽게 읽혔다. 또, 그래서, 솔직히 그의 시에는 깊은 슬픔이나 한(恨)도 없다.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짙은 아쉬움도 없다. 살아지는 일상에서 누구나 가능할법한 사건과 감성을 오늘의 젊은이들이 쓰는 말로 담아냈다. 그뿐이다.      


그가 유독 더 비판받았던 것은 시대 탓도 한몫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대구에 있는 영남대학교를 다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시대, 1980년대는 시가 사회와 정치와 노동과 인권과 민족의 아픔과 한을 말해야 했다. 이 말함은 시와 시인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학생과 지식인의 책무였다. 또, 이 시기, 영남, 그것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하여 대구에 있는 대학에 다닌 후 대구에서 삶을 꾸려간다는 건, 원하던 원치 않던, 일종의 특권을 누린 것이었다. 정작 거기 사는 사람들은 잘 몰랐던 그런.     


시대의 무게와 지역의 원죄에 대해 모를 리 없었을 그는 왜 이런 시를 썼을까? 저자의 발문에 약간의 힌트가 있다. “시는 스스로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가? 언어들은 자신이 도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감동의 시... 누구든지 시를 읽었을 때, 어떤 의미로든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시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는 시가 시로 존재할 필요성을 찾자. 시인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일종의 반동이다. 시를 쓴다는 이들마다 다들 심각하게 정치와 사회, 노동과 인권, 민주주의와 이념과 혁명과 민족의 앞날을 얘기하는 것이, 그런 시들에 모국어가 불려 나가 도구로 써지는 것이 못 마땅했던 시인의 마음이다. 다시 읽어보니 공감이 간다.      


탐미주의다. 아름다우면 된다. 시와 언어의 쓸모를 논하자면 거기엔 아름다움도 들어가야 한다. 시의 일, 시가 할 일이 꼭 무거울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읽어서 좋으면, 읽었을 때 마음이 움직이면 제 할 일은 다 한 거다. 모든 노래가 운동권 노래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처럼, 모든 미술이 민중 미술이고 걸개그림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처럼 시 또한 그래야 했던 것이고 그래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서정윤의 시는 시가 할 일 하나를 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을까?       


십여 년 전, 지금의 내 나이 또래가 됐던 시인은 성추행 의혹을 받았다.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니 의혹은 사실이라는 얘기. 오십이 훌쩍 넘은 교사가 중학생 여 제자에게 그리했으니 추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사건이다. 그가 이 시를 썼을 때, 그러니까 이십 대 후반의 그 꺾이지 않는 정신으로 살았다면, 그렇게 고상하게 계속 살았다면 지금까지도 그의 시는 읽히고 사랑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그는 그의 시를 자신과 분리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와 현실과 떨어져 시 본연의 아름다움을 주장했던 그 시절의 생각처럼 말이다. 1957년생이니, 환갑을 넘어 진갑을 바라본다. 괜찮은 문단의 어른이 될 뻔했는데, 존경받는 스승으로 남을 뻔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 그의 심정은 어떨까?      


판본을 보니, 앞서 말했듯 이 시집의 초판 1쇄는 1987년 3월 25일에 나왔다. 난 1987년 8월 30일에 나온 25쇄를 샀다. 값은 2천 원이다. 이 시집을 그다음 해 샀더라도 난 여전히 중학생이었을 때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읽히던 시였다. 책의 안은 멀쩡하다. 다만 책배와 책머리, 그러니까 페이지들이 덩어리 져 겉으로 보이는 면은 누렇게 탈색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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