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의 예언처럼 4월은 잔인한 달이 되어 버렸다. 4.3과 4.16, 4.19까지. 그 사이에 낀 식목일, 그리고 청명과 한식이라는 절기가 갖고 있는 봄의 생명력은 저 세 날의 엄중함에 그 기운을 잃는다.
꽃을 보며 꽃다운 나이에 가버린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는 건 잔인하다. 세상천지는 꽃으로 가득하고 사람들은 그 꽃을 구경하겠다며 산으로 들로 쏘다닐 때,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그 꽃을 등진 채 기억을 더듬는 건 고독한 일이다.
일종의 부채의식 같은 것이 있다. 우리 세대의 일부는 나와 같은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을까? 70년대 태어나서 80년대 초ㆍ중ㆍ고를 다니고 90년대 대학을 간 사람들은 신세대, X세대, 오렌지 족으로 호명받았다. 뭘 하든, 이 세 개의 호명으로 용서 됐다. 민주화 운동도 끝났고 대학은 갑자기 많아지기 시작했으며 소위 명품이라는 것도, 수입 자동차도, 일본 문화도, 심지어 배낭여행이라는 해외여행 상품도 마구 쏟아졌다. 우린 그 모든 걸 소비하는 주체로 부름 받았다.
이데올로기가 실천이 될 필요 없다. 대신 그 이데올로기로 폼이나 잡고 어디 좋은 데 가서 술이나 마시고 여행이나 다니고 적당히 강의실에 얼굴이나 내밀어라. 이게 그 시대 우리들에게 내려진 지상명령이었다. 물론 조금 더 꾀바른 친구들은 토익이며 토플 따위를 공부하며 취업과 유학을 준비하기도 했다. 세상의 부름을 외면하고 도서관에서 밤을 밝히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대학을 다녔든, 그 시대의 지성에겐 역사가 내민 숙제가 없었다.
대학엔 낯선 이론들이 넘쳐났다. 프랑수아 퀴세가 <루이비통이 된 푸코>에서 묘사한, 프랑스 이론이 1970~80년대 미국에 수용된 과정이, 90년대 한국에서도 반복됐다. 이름도 생소한 프랑스와 독일 학자들의 이름을 알아야 했고 그들의 이론을 공부해야 했다. 그렇게 낯선 이론들을 열심히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려 할 때, 우린 글로벌 경제의 무서움을 체감했다. 그 공포는 몇 년 터울로 우리를 덮치면서 우리를 21세기의 어른으로 만들었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회와 정치는 고장 난 자동차처럼 진보와 퇴행을 거듭하며 움직였고 그 혼란 속에서 우린 이 사회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조차 판단하지 못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사람도 있었고 돈은 함께 벌지만 애는 안 낳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각자의 선택이 역사와 이 시대와 미래에 어떻게 기억되고 어떤 존재로 각인되며 어떤 현상을 불러올지 아무도 몰랐다. 그 불러오는 것이 축복이 될지, 재앙이 될지도 모른 채, 그야말로 글로벌 경제의 흐름 속에,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IT 세상의 변화 속에, 안 그래도 휙휙 바뀌는 이 나라에서 그 모든 물결들에 휘말려 살면서 나이를 먹었다.
우리에겐 역사로부터 주어진 과제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군가는 촛불을 들었고 누군가는 노란 리본을 달았으며 누군가는 정치인의 열성 지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정치에 극성인 사람이 되기도 했다. 이것이 시대와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4.19는 1960년에 일어났다. 시인은 1941년 1월생이니, 이때 대학교 1학년쯤 되지 않았을까? 그해 세밑이라 했으니 연말이리라. 혁명의 계절이 지나간 뒤, 다음 해 5월, 시인은 5.16은 맞았을 것이다. 그 후 엄혹한 세월 속에서 그야말로 살기 위해 살았을 것이다. 어느 날, 영원할 것 같았던 권력이 쓰러지고 새로운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 해, 4.19로부터 18년이 흐른 1979년, 10.26 사태와 12.12 쿠테타가 연이어 터진 그해, 시인의 나이는 아직 마흔이 안 됐을 것이다.
다시 맞이한 겨울이다. 계절도 변하고 세월도 갔는데 여전히 겨울이다. 달력엔 분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의 희망이 잠들어 있을 텐데, 시인은 그 달력을 펼쳐 걸을 엄두가 안 난다. 긴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이렇게 다 큰 어른이 되었는데도 우린 여전히 목소리를 낮춰 얘기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던가? 여전히 겨울이다. 늪 같은 겨울이다. 살아낸 것이 죄인가? 그렇지 않다. 시대와 역사가 내게 호소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가 죄인일 뿐이다. 안 그런가?
세기말이었다. 서울에 있는 한 대학의 대학원을 다녔다. 운동권 세력의 마지막 중추라 할 수 있는 <한총련>의 본부가 피신해 왔다. 그 뒤, 전경들이 정문을 지키며 드나드는 학생들의 면모를 살피다 거슬리는 학생에겐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난 학생운동을 하기에는 나이가 들어 보였는지 한 번도 걸려 본 적이 없다. 대학원 동기들끼리 이를 두고 농담을 하곤 했다.
그때, 학교에 있던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난 모른다. 학교 안에서 그야말로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세상을 꿈꿨던 이들이, 학교 밖에서 그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지키면서 학교 안으로 들어오던 이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펴보던 이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먹고살고 있는지 난 모른다. 잘 살고 있을까? 누가 더 “부끄럽지 않은가?”하는 시대와 역사의 질문을 이명처럼 들으며 살까?
문태준 시인은 해설에서 이 시와 유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김광규 시인의 다른 시 <작은 사내들>을 인용한 뒤, “시인은 어느덧 소시민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입장 없음과 순순히 따름이 정녕 우리가 고대한 초상이었느냐며 정직한 질문을 던진다. 면구스럽다.”라고 고백한다. 이어 “4ㆍ19 혁명 기념일이 다가오면 이 시를 다시 읽게 된다. 까슬까슬하게 카랑카랑하게 살자고 다짐하면서”라는 문장으로 해설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4월을 잔인하게 만든 날 중, 4월 16일은 이 시대의 어른의 책임으로 남아 있다. 그날의 원인과 책임과 진실이 명백히 드러날 때까지 이 시대의 어른들은 저 날이 올 때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꽃이 만발할 때마다 온몸이 바늘로 찔리듯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 안타까움과 고통을 끌어올려 느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늪 같은 겨울을 통과하고 있구나, 이 겨울을 빨리 끝내어 아이들에게 진정한 봄을 돌려줘야겠구나 다짐해야 할 것이다.
4월 19일, 페친이신 김재인 교수님이 이 시를 올리셨다. 읽어 본 적 있던 시이건만 새삼 마음이 흔들려 공유를 했다. 이 시를 어디서 읽었을까? 난 김광규의 시집이 없다. 시선집 중 하나에 들어 있으려나 싶어 두어 권 들춰보니 문태준 시인이 해설을 맡은 한국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을 모은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에 실려 있다. 판본을 보니 2008년 6월 3일에 1판 1쇄가 나왔고 난 2009년 6월 10일에 나온 1판 8쇄를 샀다. 책 겉표지 안에 찍힌 서점의 도장을 보니 2011년 3월 3일에 샀다. 그렇다면 분명 어디 오프라인 매장에서 샀다는 건데, 어디서 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실린 시도, 해설도 무게가 있다. 우리가 아는 시인도 있고 모르는 시인도 있다. 시대를 아우르며 훌륭한 시인의 좋은 시를 편견 없이 고루 실었다. 한 시인에게 가는 문을 찾는다면 이 시집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