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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02. 2024

아름다운 것은 말이 없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25

귀로  -

                   한스 카로사   


우리 집 동산은 이제 밝아 오는가.

강물소리 하마 들려오는가.

그대 입맞춤

아직도 내 목숨을 불태워 주고 있거니  

   

내 눈은 그대가 밝혀준 것

아직도 그대만을 마시고 있다

세상의 매력 속에 그대의 매력만을.   

  

하늘에 걸린 달

꿈의 입김을 마시면

새하얗게 맴도는 한 조각 구름

변죽은 풀색으로 녹아든다.     


밤을 돌아

강물은 얼음덩이를 몰고 온다

얼음덩이마다

빛의 버거운 뱃짐을 안고 있다.     


몇 가닥 전깃줄 수금모양

가로수 길에서 윙윙거리고

바퀴 자리는

눈 속에서 빛난다.     


빛나며 풀이해 보리라

그대 곁으로 돌아가리라 거룩한 마음

내 아노라. 깊고 깊은 행복에 겨워

여태껏 뜬눈으로 즈새는 그대 모습.  

   

등피(燈皮), 그대 모습 포도주마냥

물들이고 창문에 낀 성에

그대 입김을 불어넣는다.          


병자


집은 고요한데 나는 조용히 누워 있다.

겨울 숲 속에 나는 파묻혀 있다.

안개에 휩싸인 나무 사이 내 창문 앞에서는

갈가마귀 한 마리 아침마다 인사를 보낸다.   

  

내 벗은 이것만이 아니다.

대낮에도 어두워질 때가 있다.

날개 파닥이며 정다운 되새 무리가

산을 타고 내려오는 순간이다.     


이것은 폭풍을 알리는

잿빛 새들.

산 위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지면

새들은 내 창가로 피신해 온다.     


땅거미가 지면 나를 간호해 주는 아가씨가 찾아온다.

콧노래를 부르며 등(燈)에 불을 당긴다.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남몰래 이 아가씨가 두렵다.     


아가씨는 되새 한 마리를

방 안으로 끌어들여 목 졸라 죽였다.

그 깃털로 내 몸을 치장해 주었다.

한밤중. 겁에 질린 그 새 울음소리에 나는 잠이 깬다. 어디 한두 차례인가.  

   

저녁. 낯선 사나이 하나

내 곁에 다가앉아서 내 가슴의 숨소리를 살피고 있다.

아가씨가 나지막한 소리로 사나이에게 속삭이면

사나이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입을 다물고 만다.   

  

이따금 밤이 되면 무서워 못 견딜 때가 있다.

이 문 저 문이 스르르 열리면

여인들이 몰려든다.

나한테  병열(病熱)을 몰고 오는 여인들이다.     


멀리서 보면 여인들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싶지만

야금야금 다가서면

온통 죽은 사람 꼴이다.

눈에는 광채가 사라졌다.     


하얀 손들이 내 몸을 찾으면

내 숨결은 점점 가빠지고

어서 새벽이 되었으면 싶다.

팔팔하고 그 고운 갈가마귀가 보고 싶어 못 견디겠다.


뻔뻔한 사람

화요일, 작업실에 가는 길, 울산 태화강 역으로 향하는 동해선 경전철 안에서 오십 분을 보낸다. 그 아침 시간, 떠드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종종 떠드는 사람이 있다. 이번 주도 그랬다.      


동물의 원초적 시간, 그 야생적이고 야성적인 부피와 질감이 사라진 두 여자가 쉬지 않고 떠든다. 책을 읽다 고개를 들어 똑바로 봐도 반응이 없다. 부끄러운 줄 모른다. 잘못인 줄 모르니 계속할 터이고, 잘못인 줄 모르니 부끄러움도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잘못인 줄 알아도 내 좋으면 그만이라 여기며 뻔뻔하게 견뎌낼 수 있는 나이가 됐는지도.      


늙은 여자만 저러는 것이 아니다. 늙은 남자도 저런다. 몇 주 전엔, 한 노인이 남창 역에서 탔다. 타자마자 노약자 석에 앉더니 신발을 벗어 바닥에 탁탁 치며 밑창과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낸다. 그러다니 맞은편 노약자 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거기서 뭔가를 까먹더니, 그 포장지를 앞서 앉아 있던 노약자 석을 향해 휙 하고 던진다. 뚫어지게 쳐다봤다. 뭘 보냐고 한마디라도 하면 바로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살기가 온몸에서 솟아났다. 노인은 눈을 깔았다.      


몇 정류장 지나, 다른 노인이 탔다. 그는 노약자 석에 앉아서 유튜브를 봤다. 제법 심한 경전철의 궤도 소리를 뚫고 객실 안 승객들에게 그 소리가 전해졌다. 그는 가지 키우는 법을 듣고 있었다. 한 번도 영상을 멈추지도 않았다. 파종부터 시작해서 성장기 관리, 농약 주는 법까지, 그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봤다.      

채현국 선생님이 노인들에 대해 하셨던 말이 새삼 생각난다. 2014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라고 말하셨다. 2015년의 한 인터뷰에서는 심지어 이런 말도 하셨다. “저 자식들 막상 내 나이만큼도 되지도 않는 놈들이 저래요. 칠십몇 살, 막 가고 뻔뻔해져서. 늙으면 지혜로워진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농경시대의 꿈같은 소리입니다. 늙으면 뻔뻔해집니다."     


입만 살아있다.

입만 살아있다는 말은 모욕적이다. 뱉는 말에 생각이 담겨 있지 않다는 의미다. 행동은 하지 않고 퍼질러 앉아서 훈수만 둔다는 의미다. 이성과 육체, 다 죽었는데 “입”만 살아서 나불댄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뱉든, 받아들이든 모욕적인 말이다. 말 말고는 자신의 존재를, 살아 있음을 웅변할 수 없는 존재의 최후의 몸부림, 바로 그것이 “입”만 살아있다는 말에 담겨 있다. 나이가 들수록 듣지 않도록 경계해야만 하는 말인 이유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자주 열라는 말이 있다. 내 경우엔 지갑에 든 게 없으니 입의 무게에 더 무거운 추를 달았다. 듣고자 하는 사람이 없으면 입을 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니 앞에 사람이 있어도, 심지어 내 이야기라면 귀를 기울일 법한 아내나 딸이 있어도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 한다. 두 사람 다 나보다 어리지만 한 사람은 이미 자신의 길에서 이루려 했던 것을 이뤘고, 한 사람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묵묵히 가고 있기 때문이다.      


돈과 과거의 무게가 어느 정도 이상이라면 언제 어느 때나 입을 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보다 어린 사람이 앞에 있다면 그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입을 놀려도 생각하는 사람은, 꼰대다. 글의 무게만큼 말의 무게도 무겁고, 내가 헤쳐온 인생만큼 나보다 어린 이가 지금 헤쳐가고 있는 인생도 무겁고 험난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꼰대다.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삶의 무게를 자신의 과거를 잣대 삼아 저울질하고 그 저울질의 결과를 모두에게 정답처럼 내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꼰대다. 입만 살아있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는, 입을 좀 죽이면 다른 것이 더 살아 보일 거라는 말을 듣는 그런 꼰대다.    


현자의 경계

따지고 보면, 늙고 힘이 빠진 개체가 무리에서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동물은 거의 없다. 코끼리와 사람 정도가 아닐까? 예전, 딸이 읽었던 책이 생각난다. 나이 든 코끼리는 평원의 모든 존재들이 목이 마를 때에도 물이 있는 곳을 찾아낸다고 한다. 평생 떠돌며 자신의 목을 축이던, 평원 곳곳에 잠들어 있는 수맥을 고스란히 기억 속에 저장하여 가뭄의 고난 속에서도 무리를 구원한다고 한다. 그걸 사람의 말로 옮기면 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는 구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즉 지혜 있는 자가 나서서 지혜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했던 예수의 말과 쌍을 이룬다. 듣고자 하는 자에게 지혜는 나눠지기에 듣기를 원치 않는 자에겐 지혜는 밀봉된다. 그러나 누군가 듣고자 한다면, 그의 눈엔 지혜가 보인다. 소위 현자라 불리는, 지혜를 갖고 있는 이가 보인다. 나이를 먹은 뒤 그 나이를 대접받으려면 우린 그 지혜가 보이는 현자가 되어야 한다.


생명과 죽음, 그 극단 사이에서

<은교>를 본 건 십 년 전이다. 40대였다. 이 영화를 본 후, 나이 듦에 대해 생각했다. 소설과 영화를 읽고 보며, 그 안에 실린 시의 구절을 곱씹으며 한참을 생각했다. 영화처럼 플래시백 될 수 없는 청춘과 나이를 먹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수컷의 생명력이 다한 인간이 이제 막 생명의 움을 트기 시작한 존재를 만나 육의 생명이 아닌 영의 생명력, 영감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봤다. 카로사의 시는 이 영화 속에서 처음 만났다.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하며, 그리고 카로사의 시를 찾아 읽으며, 또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제대로”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잘” 나이 드는 것에 대해, “현자”와 같은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 젊음에 대해 생각했다. 말이 없이도 해석과 아우라를 응축하고 있는 존재와, 그 반대로 말을 하지 않고서는, 공작새의 깃털처럼 펄럭거리며 나대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수 없는 존재에 대해. 불행히도 우린 공작새와 같은 깃털이 없기에 그렇게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는 걸까? 명함이 많아지고 갖은것이 많아지고.... 아름다운 것은 말이 없다. 생명력이 넘치는 것은 거기 그렇게 존재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웅변한다.     


<귀로>는 묘사가 넘친다. 희망과 사랑과 감성이 흐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그 여정에 만나는 모든 사물, 공기, 땅과 하늘, 별과 달이 동행하며 기쁜 노래를 부른다. 환희의 절정은 기다리는 그 사람을 마주하며 절정을 이룬다. 와인 빛으로 물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이 밤, 인생의 소중한 하루를 마감한다.     


반면 <병자>는 목전에 다다른 생의 마지막 순간을 담고 있다. 남은 나날도, 그 어떤 것도 남은 것이 없다. 생명은 폭풍 속의 잔불처럼 잦아들고 희망은 잔여물처럼 남아 있다. 찾아오는 사람은 내 마지막 순간을 지연시키려 애를 쓰거나, 그 마지막 순간의 운명을 예감하며 함께 그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뿐이다. 그런 사람들, 내 집을 찾아오지만 이미 죽은 존재와 같은 나와는 아무런 소통을 하지 않는다. 한 줌의 희망, 그 희망의 작은 조짐조차 살해당한다. 희망은 이제 그의 것이 아니다. 그가 밤마다 맞이하는 건 신열(身熱) 속에 만나는 환상뿐. 죽음의 천사들은 그의 침상을 맴돌며 체념이라는 말조차 사치스럽게 한다.      


삶은 이 양극단 사이, 어디쯤의 순간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건 죽음이라는 극단을 향해 조금 더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며 오늘 이 순간의 가치와 기쁨을 오롯이 만끽하는 법을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나이가 들어 현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선, 어쩌면 우린 삶을 꼭 움켜쥔 채 살면서도 그 움켜쥔 것이 어느 순간 모래처럼, 거품처럼 살아질 수 있음을 예감하며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은교>가, 그리고 그 책과 영화에 나왔던 카로사의 시가 하고자 했던 말이 이거였는지도.


한스 카로사의 소설은 여전히 출판되고 있다. 시집은 7,80년대 출간된 이후 절판이 된 모양이다. 확실하진 않다. 그의 시 몇 편이 여기저기 실려 있다. 나태주 시인이 엮은 시선집에도 몇 편 실려 있다. 난 한 시인과 시를 다룬 무명의 게시판에서 읽었다. 당시의 번역 그대로를 올려서 예스럽다.        

       


*하마 - “벌써”, “이미”, “그래”, “그럼”의 옛말, 또는 사투리. 하마, 하모, 하믄 등의 형태로 영남, 영동, 호남 지역에서 여전히 쓰인다.     


*등피 - <은교>에선 “등불의 갓”으로 번역되어 나온다. 반면 <은교>에 나온 다른 시, 다자이 오사무의 시에 나오는 등롱(燈籠)은 등불을 안에 넣은 단일한 형태의 조명기구다. 등피는 등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를 의미한다. 이 외피의 색에 따라 조명의 색이 달라질 테고, “그대”의 모습이 포도주처럼 물들었다는 건, 결국 이 등피의 색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반면 갓은 광원을 모아 아래로 내리 비춰주는 역할이 강하다. 갓이 어떤 색이든 그 빛의 색이 변하여 사람의 색도 그리 보이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갓보다는 등피라는 말이 더 직접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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