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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09. 2024

예언자에겐 답이 없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26

사랑에 대하여 -

                       

           칼리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서     


그러자 알미트라가 말했다.

사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위에 드리워져 있는 적막을 깨며

알무스타파는 소리 높여 말했다.

....

사랑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으며,

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소유할 수도, 소유당할 수도 없다.

사랑은 오로지 사랑으로 족하기에.     


그대들 사랑할 때, “‘신’은 내 안에 계신다.”라고 말하지 마라.

그러나 그대들 “나는 ‘신’ 안에 있다.”고 말하라.

또한 그대들이 사랑이 가는 길을 가리킬 수 있다고 생각지 마라.

사랑 그 자신이 그대들을 알아보고 그대들의 길을 가리킬 것이다.


십 대 후반, 이십 대의 입구, 그즈음 날 들뜨게 했던 책들이 있다. 카뮈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의 <섬>, 이준오 교수님이 번역ㆍ편집하신 랭보의 시 전집, 그리고 칼리 지브란이었다.    


신비로운 이름  

칼리 지브란...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면 뭔가 신비로운 비밀을 알고 있는 현자나 예언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칼리 지브란... 외국어가 익숙하지 않았던 청년에겐 아주 먼 나라의 이름이다. 역사와 신화 속에나 존재할 법한 이름. 외국어를 잘 몰라도 이 이름이 영어 이름도, 프랑스어 이름도, 독일어 이름도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게다가 아랍어로 시를 쓴다니. 그런데 아랍어의 리듬을 알았던가? 당연히 몰랐다. 아마 이때, 아랍어를 들어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칼리 지브란... 서정윤이나 도종환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나만 아는 누군가를 안다는 우월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는 성경의 잠언도, 시편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모를 때였다. 칼리 지브란의 시와 편지가 이 글 어딘가를 닮아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를 때였다.      


재미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시인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생각이 안 난다는 것이다. 이 시집들의 판본을 보면 1990년과 1991년에 나온 판본을 샀다. 이 시기, 난 평택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다닌 의정부에서 평택으로 이사를 갔다. 마치 화분의 분갈이를 하듯, 쑥 뽑혀서 원하지 않은 곳에 심긴 느낌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친인척도 없었다. 가족이라곤 어머니뿐이었고. 교회를 나가고 있었지만 그 교회 사람들이 이 레바논 태생의 시인을 알 리가 없을 터. 난 대체 이 시인을 언제 어디서 알았고, 이 시집들은 도대체 어디서 샀을까?     


또 하나 재미있는 건, 이 시인과 시와 시집에 대해 누구와도 얘기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얘기하고 싶다고 한들 누구에게 얘기하겠나? 먹고살기 바쁜 어머니? 성경과 교회 말고는 아는 게 없는 교인들? 그 후에도, 그러니까 대학에 들어가서 연애를 할 때도, 기숙사 동료들에게도, 대학원에 가서도, 그 후 만난 친구와 연인 그 누구에게 이 시인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소개해준 사람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이 때는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던 시대여서 책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곳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일간지에 나오는 책 소개 코너와 제법 규모가 큰 서점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무료로 가져가게 했던 팸플릿이 책에 대한 거의 유일한 정보처였다. 결국, 이 시는 그저 끌려서 산 거 아닐까?     

추측해 보건대, 평택의 안정리라는, 내가 살던 동네에 있던 작은 서점이나 시내에 한 곳 밖에 없던 서점에서 샀으리라. 동네의 작은 서점에선 주로 애가사 크리스티의 문고본을 샀다. 또 개빈 라이얼의 <심야 플러스 원>과 <파일럿>을 샀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심야 플러스 원>에 프랑스 자동차 브랜드 시트로엥이 등장했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게 느껴졌었다.      


그때도 답을 찾고 있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까지는 정신문화적으로, 뭐랄까 특이한 시대였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봐도 그랬다. 80년대 후반, 소위 CCM이라 불리는 기독교 음악이 십 대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관련된 공연과 단체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교회에선 성경 공부가 본격화 됐고 기독교 동아리는 모든 대학에 하나 이상은 있었다.


반면, 조지 윈스턴을 필두로 하여 뉴에이지 음악이 유행했다. 이런 음악은 스스로 자신을 찾아가는, 정신 수양과 명상 등을 통해 자신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운동과 맞물려 유행했다. 나 자신도 교회를 다니며 CCM을 들으며 은혜(?)를 받음과 동시에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며 내 안으로 침잠하기도 했다. 그 양자 사이에서 난 전혀 이질감과 이물감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교회는 그것들을 이단시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저 때, 난 이미 오늘의 내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것과 같은 질문과 의문을 품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이 시의 주인공처럼 나타나서 던지는 족족, 그 질문에 맞는 답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 결혼, 아이, 기쁨과 슬픔, 집과 옷, 죄와 벌, 법과 자유, 이성과 열정, 고통, 우정, 대화, 시간, 선과 악, 쾌락, 죽음과 떠남까지... 시인은 스물일곱 개의 질문에 답한다. 예언자의 목소리를 빌려. 난 그때, 저 답에 만족했을까? “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하고 말이다.      


현실의 답과 인생의 답

얼마 전 한 공공기관 담당자와 미팅을 했다. 시청 직원이 우리를 추천해서 성사된 미팅이었다. 첫 번째 미팅에선 보통 고객에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준다. 우리를 불렀을 땐 해결해야 될 문제, 특히 공공기관에서 불렀을 땐 기관 자체와 함께 홍보해야 될 정책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담당자는 이런 쪽으로 문외한이거나 일부분만 알기 때문에 일의 오더가 떨어지면 반쯤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 상태에서 여기저기 문의를 하고 도움을 구한다. 그러다 누군가 우리를 추천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연락을 한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 해야 될 말이 얼마나 많겠나.     


한 십 분 이상 듣고만 있었다. 옆에 앉은 감독과 담당자가 대화를 이어갔다.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부수적인 사안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었다. 감독이 조심스럽게 본론으로 유도했고 그 본론이 시작됨과 동시에, 난 스마트 폰에 메모를 했다. 다 들은 후, 일의 성격, 그러니까 캠페인을 만들고 매체를 통해 PR을 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요약해서 말해주며, 내 생각이 맞는지 물었다. 그때, 그 담당자가 “아~ 시청의 000 주무관님이 추천하신 이유가 있었네요.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하고 얼굴이 환해졌다. 아마 그날 밤은 편히 잤을 것이다.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 어떤 형태, 어느 규모의 직장에서 일하든, 어느 위치에 있든 우린 문제의 답을 갖고 있다. 없으면 찾을 수 있고, 찾을 수 없으면 그 답을 만들 수 있다. 조직이라는 시스템, 기업이라는 시스템, 크게 보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엔 문제와 답을 함께 갖고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그럭저럭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하며 버텨낼 수 있다.      


인생은 아니다. 인생에 경력직이 있던가? 답안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매뉴얼을 갖고 있는 사람은? 글쎄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런 사람은 없다. 다들 그냥 사는 것이다. 답을 가진 누군가가 나타나서 답을 주지 않는다. 처음 겪는 막연한 사태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을 때 “예언자”처럼 배를 타고 와 답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다.      


SNS엔 답을 알고 그걸 무료로 퍼준다는 사람이 넘쳐난다. 자잘한 생활의 지혜에서부터 진학, 취업, 사업, 투자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부터 연애, 우정, 인간관계와 같은 백인백색일 수밖에 없는 사람과 사람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문제까지... 팔로우만 하면, 문자만 보내면, 좋아요만 누르면 기꺼이 알려 주고 가르쳐 주겠다는 그 모든 사람들...


답을 가진 사람이 많으면 그 답을 공유한 사람도 많다는 얘기고 그렇다면 우리 불확실성 또한 줄어들고 덕분에 우리의 불안 또한 줄어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위로와 위안, 심리에 관한 책도 늘어나고 십여 년 전만 해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정신과 병의원이 늘어나는 걸 보면 답을 가진 사람과 구하는 사람 사이에 미스 매칭이 있거나 그 답이 모두의 답도, 각자의 답도 되지 않는 모양이다. 답은 명사이지만, 답 찾기는 동사이자 현재 진행형의 숙명의 갖고 있는지도.


<예언자>의 판본을 보니 초판 1990년 4월 25일에 나왔다. 난 이 초판을 샀다. 값은 2천 원이다. 그의 다른 시집 <모래ㆍ물거품>의 초판은 1989년 4월 10일에 나왔고, 난 1990년 12월 20일에 나온 2판의 10쇄를 샀다. 이 역시 가격은 2천 원이다. 칼리 지브란이 그의 후원자였던 매리 해스켈과 주고받았던 글을 모은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는 1988년 5월 27일에 1판 1쇄가 나왔고, 난 1991년 10월 20일에 나온 3판 2쇄를 샀다. 이 역시 2천 원이다. 뒤의 두 책은 진선출판사에서 나왔다. 칼리 지브란과 매리 해스켈이 주고받은 편지와 각자의 일기 중 일부를 발췌해 엮은 책 한 권을 더 갖고 있다. 제목은 <사랑은 한 인간을 속박하는 시련입니다>이다. 이 책의 초판은 1990년 5월 10일에 나왔고 난 이 초판을 샀다. 출판사 이름이 특이하다. <도서출판 카나리아>. 조지 윈스턴은 작년 6월 4일, 일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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