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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16. 2024

존재의 당위성, 혹은 떨어지는 혜성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27

선택의 가능성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

지나치게 쉽게 얻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민중들의 영토를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만일에 대비하여 뭔가를 비축해 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리된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불운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됐다. 존재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존재의 무게는 이 우주보다 더 크고 무겁다는 걸. 우리는 모두 그런 존재라는 걸.      


납득

어딘가 썼듯이, 연애를 할 때마다 애를 먹었던 건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거였다. 내가 좋아서 꼬셔놓고 막상 내 구애를 받아들인 여자가 날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왜 날 좋아하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걸까? 왜 이렇게 나한테 아낌없이 모든 걸 내어주지? 나를 위해서라면, 나와 함께라면 무엇을 해도, 어떻게 살아도 좋다고? 왜? 왜?     


사랑의 불안은 타자의 떠남에 대한 예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불안에 있다. 난 그랬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사랑도 위태롭다. 그저 물 흐르듯이 그 사랑을 맞이하고 만끽하고, 그러다 그 사랑의 수명이 다하면 또 그렇게 보내주면 되는데, 젊었을 땐 그걸 몰랐다. 불가능했다. 이유가 있어야 했다. 사랑에도, 존재에도, 모든 일에도. 분별없이, 무모하게 살아야 할 시기에, 유일하게 그래도 될 시기에 그러지 못했다. 인생에 후회라면 후회랄까? 내게 자신의 사랑을 납득시키지 못했던 연인에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를 하고 싶다. 그대는 잘못이 없다. 다 내 탓이다.


소개

얼마 전, 한 공공기관에 첫 미팅을 갔다. 감독과 차를 타고 몇 번 그 앞을 지나치긴 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럴싸한 기관의 건물에 들어가 명함을 주고받고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평소라면 설명을 한다. 첫 만남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설명한 적이 별로 없다. 일에 관해선, 우린 이미 지역 공무원과 기관 사이에선 알려진 사람들이고, 그들이 알고자 하면 얼마든지 우리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존재다. 일에 관해선 어느 정도 정보와 실력이 노출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나 다들 자기소개를 하느라 애를 먹을 것이다. 입사할 때도, 소개팅을 할 때도, 심지어 거래처를 방문하여 회사 소개를 할 때도 자신을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전전긍긍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힘든 소개는 소개팅할 때 아닐까? 이런 경험이 워낙 오래 전인 데다가 그나마도 두 번인 밖에 없는 터라 난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요즘은 일단 MBTI부터 말하고 시작하려나? 제시간에 도착해서 앞에 앉아 있다면, 뭐 그거로 소개는 다 끝난 거 아닐까?     

“이 독특한 마음은 우리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는 것은 고사하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한다. 버나드 윌리엄스의 말에 따라, “어떤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진짜 당신이거나, 혹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표현하는 것이고, 다른 것들은 그러지 않은 것”인지를 설명해 준다. “,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P.35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더 나아가 좋아하는 것들로 자신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유독 그게 좋아서 좋을 뿐이다. 그 좋은 것들은 각자 홀로 존재해서, 서로를 모른다. 마치 도서관의 사회과학 코너와 소설 코너에 꽂혀 있는 책처럼 거리를 두고 다른 은하계에 존재한다. 무슨 엄청난 범죄를 저질러서 나를 분석해야만 하는 프로파일러라면 그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골몰하겠지만 자기 자신은,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그대도 그럴 필요 없다.


바흐와 너바나 사이에, 그리고 바흐와 너바나와 나 사이엔 아무런 개연성이 없다. 각자의 모양대로, 순서대로 피어나서 봄날을 밝혀주는 동백과 매화와 목련과 모과꽃과 벚꽃과 개나리와 철쭉이 각자의 영토에 뿌리를 내린 채 존재하듯.  존재들은, 시인의 말처럼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렸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One way/일회용

결국, 혜성처럼 빛나며 떨어진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불타며 사라진다. 반복될 수 없는 한 번뿐인 삶. 일상과 전율이 공존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앞집 담장 위로 빨간색 장미가 폈다. 5월엔 그 장미를 내려다보며 섹스를 한다. 장미는 사라진다. 장미가 지면 능소화가 핀다. 그 능소화를 내려다보며 섹스를 할 때면 땀이 솟는다. 여름이다. 꽃이 폈다 지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그렇게 긴 세월 동안 한 집에 살면서 섹스를 하고 일상을 누리고 나이를 먹었다. 리와인드할 수 없는 순간들. 두 번은 없다.      


보다가 눈을 감으면 사라질 것 같다. 이런 오르가슴은 다신 없을 것 같다. 딸이 학교를 가면 오지 않을 것 같다. 아내가 출근을 하면 퇴근하지 못할 것 같다. 집에 오면 감사하다. 반갑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안부를 묻고, 오늘의 사건들을 묻는다. 사건? 그렇다. 사건이다. 한 존재가 하루를 살아낸 기적. 결국 가고 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고 내 앞에서 웃는 아내도 딸도 당연하지 않다. 나한테 안기고 안아주는 사람도 당연하지 않다. 사람에 대한 정성은 어쩌면 이 당연하지 않음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이제 살짝 배가 나왔다. 딸의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신체를 통해 세월이 말한다. 우린 변한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 매 순간이 아름답다. 어제보다 오늘 더 아름다운지, 오늘보다 내일 더 아름다울지 모른다. 설령 그렇다한들 그걸 무슨 수로 알 수 있겠나. 존재하는 동안 우린 불타오른다. 삶의 순간을 만끽할 뿐이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안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유일하게 섹스만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만이 채울 수 있는 포만감을 품고, 또 동시에 언제 다시 이런 희열을 느끼겠나 하는 옅은 불안을 안은 채 잠든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를 모른다. 찾아보니 내 이십 대 시절,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이다. 저 시절엔 ‘노벨문학상 수상작 따위야.’하던 객기가 있었다. 세상이 호들갑을 떨며 떠받들고, 생전 책 한 줄 읽지 않던 사람도 서점으로 불러들이는 작가와 작품은 부러 외면했던 시절이었다.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저번 주 토요일, 인문영재교실에 갔다 온 딸이 수업 시간에 배웠다며 <선택의 가능성>을 내밀었다. 읽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은 후 딸에게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었다. 딸은 설명했다. 이어 말해줬다. 존재의 그러함엔, 그 그러함을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는 거라고, 그런 의미가 아니겠냐고. 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은 없다>는 인터넷에서 찾아 읽었다. 두 시가 마치 세트 같아 함께 실었다. <선택의 가능성>은 일부만 실었다. 노란색 구절은 딸이 좋았다며 줄을 친 구절이다. 찾아보니 아직 시집이 판매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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