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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27. 2024

어느 날 갑자기는 없다.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62

접영 주간의 만남

이번 주는 접영 주간이었다. 중급반과 고급반은 한 주의 주력 영법을 정해서 운영하는데, 4월 넷째 주의 주력 영법은 접영이었던 것이다. 그런 주의 목요일, 가장 운동량이 많은 날, 강사는 자비 없이 운동량을 떨궜다. 웜 업이 끝난 후 첫 번째 던진 세트는 접영 25미터 두 개, 이어서 자유형 50미터, 이걸 한 랩으로, 총 여덟 개를 하는 거였다.      


시작도 하기 전에, 몇 번째 랩에서 쉴지, 몇 번째 랩에서 한 팔 접영을 하면서 체력을 비축할지 고민했다. 세트가 시작됐다. 첫 번째 랩, 두 번째 랩까지 무리가 없다. 세 번째 랩도 넘어간다. 네 번째 랩부터 내 앞의 주자들이 접영 순서에서 자유형이나 한 팔 접영을 한다. 난 팔이 올라오기에 그냥 접영을 했다. 그렇게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세트가 끝났다. 결국 한 랩도 쉬지 않고, 랩마다 있던 접영 타임에서 제대로 접영을 소화했다.      

강사가 신이 난 걸까? 이번엔 접영과 배영을 조합한 세트를 던졌다. 갈 때는 접영, 끊고, 올 때는 배영. 이렇게 네 개. 시작했다. 배영을 별로 안 좋아하는 터라 어느 랩에서 쉴지, 어떤 랩에서 자유형을 섞을지 고민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 소화했다.      


소수정예 금요일

난 우리 반에서, 1번 주자의 표현을 빌리면, 허리 역할을 맡고 있고, 일종의 응원단장 역할도 맡고 있다. 내가 퍼지면 뒤의 사람들도 퍼지고, 반 전체의 긴장감도 떨어진다. 내가 스타트 라인에 도착해야 1번이 출발하는 것도 아마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역할을 맡고 있기에 나보다 젊은 아저씨, 아줌마와 아가씨, 청년들을 독려하여 함께 세트를 소화하는 것도 내 임무 중 하나다. 랩이 몇 개 남았는지 체크하고 박수를 치고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보이는 남자 회원의 어깨도 토닥거려 준다. 그렇게 우리 반은 목요일의 하드 트레이닝을 넘겼다.      


금요일, 스타트 연습을 하는 날, 1번과 3번이 오지 않았다. 2번 아저씨와 나, 내 뒤에서 나를 받쳐주는 등빨 좋은 젊은 아저씨, 수영을 오래한 듯 한 40대 아주머니, 그리고 이 반의 터주대감이지만 수영엔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은 40대 아주머니가 나왔다. 딱 다섯 명. 로테이션이 금방 돌아오기에 숨 돌릴 틈도 없을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웜업이 끝난 우리를 위로 올라오라고 한 강사는 바로 접영 여섯 개를 시켰다. 내가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항의 아닌 항의를 했다. “야~ 너무하네, 우리 어제도 힘들게 했잖아요.”, 보라색 펑키 트렁크 숏사각 수영복을 입은, 까무잡잡하고 몸매 좋고 잘 생긴 강사는 말없이 싱긋 웃기만 했다. 오냐,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내 끝까지 해주마.      


우린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2번이 1번을 맡고, 힘 좋은 아저씨가 2번, 내가 3번을 맡았다. 두 아주머니는 내 뒤에 섰다. 거침없이 접영을 몇 번한 뒤, ‘야, 이거 다음번 접영은 팔이 안 올라와서 못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사이드라인을 걸어 스타트 라인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물속으로 첨벙. 정신을 차려보니 결국 다 했다. 그 뒤로 이어진 몇 개의 세트도 다 소화했다.      


티핑 포인트

언제 내 체력이 올라왔을까? 언제 내 실력이 좋아졌을까? 그건 나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우리 2번 아저씨도 “마, 그게 체력이 올라온 기라니까.”하셨다. ‘아, 다음 랩은 쉬어야지.’하고 생각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가고 있는 그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어떤 한계, 경계를 건넌 순간이다.      


오늘, 운동이 끝나고, 2번 아저씨랑 샤워장과 라커룸에서 잠시 수다를 떨었다. “와, 너무하네. 어제 좀 빡세게 했다고 오늘 너무 안 온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래, 내, 페이스를 조절했다 아입니까.”, “그러니까요. 로테이션이 빨리 도니까. 정신없더라고요.”, 내 말에 2번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라커룸에 들어가니 중급반의 몸 좋은 총각이 있었다. “아니, 이래선 안 돼. 중급반의 총각들을 더 섭외해야 될 것 같아. 지금 이 총각들이 거기서 아줌마들하고 수영할 때가 아냐.”하고 내가 말했다. 몸 좋은 총각은 웃음을 터뜨렸다. 2번 아저씨가 말을 받았다. “딴 것 모르겠는데, 체력은 확실히 올려줄 꾸마. 걱정 말고 일단 올라 오이소.”하고 중급반 총각에게 섭외의 말을 던졌다.    


아무도 모른다.

그때가 언제 올지, 언제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온다. 다른 차원으로 접어드는 그 순간이. 그 역치를 넘어서는 그 순간 직전에 당신의 노력이 멈춘다면 그 다른 차원을 볼 수 없다. 마라토너들만 만나는 무아지경의 순간, 러너스 하이를 맛보기 위해선 어느 정도 이상의 거리를 일정한 속도를 뛴 뒤, 탈진 직전의 상태에 이르러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수영을 그만둔 사람들 중엔 한 달만 더 하면 접영에 눈을 뜰 텐데, 조금만 더하면 자유형이 편해질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이제 좀 자유형이 편해 보여서, 조금 더 하면 중급반에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안 나올 때가 있다. 물론 나름 사정이 있는 사람이 있다. 일이나 가정적인, 그런 부득이한 사정을 제외하고 갑자기 안 나오는 경우는 뻔하다. 체력도, 실력도 나아지지 않는 자신에게 질려 운동을 포기한 것이다. 안타깝다.     


우린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질 수 있다. 그 어느 날은 많은 날 뒤에 찾아오는 날이다. 묵묵히 배웠던 날, 묵묵히 노력한 날, 냉철하게 나를 판단하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한 날, 거듭 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도전을 반복한 날, 그 모든 날을 겪은 뒤 맞은, 어느 날이다. 불쑥, 느닷없이, 번개처럼 찾아온 그날, 어느 날.   

일확천금 같은 건 없다. 천재일우의 기회 따위도 없다. 내가 변하는 순간은 결국 내가 살아낸 시간 뒤에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할 걸 하고,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없다. 그 어느 날은 눈물과 땀을 흘린 그 숱한 모든 날 뒤에 찾아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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