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May 05. 2024

고수의 두 종류 ; 숙련과 단련 사이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64

수영 관련 동영상 중엔 살과 칼로리에 관한 영상이 제법 많다. 제목들도 대체로 비슷하다. <수영장의 고수들은 왜 몸이 통통할까?>, <수영을 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 이유>, <수영을 하고 나면 왜 배가 고플까?> 등이다. 이게 사실일까? 그렇다면 진짜 왜 그럴까?     


고수의 두 종류

우선 수영장 고수의 정의를 내려 보자. 수영장에서 고수로 보이는 사람엔 두 종류가 있다. 먼저, 어떤 영법을 해도 편안해 보이는 사람이다. 어떤 영법을 해도 부드럽다. 그야말로 스윽~하고 나가는 느낌이다. 자유형 대여섯 바퀴 정도는 무리 없이 돈다. 레인에 사람만 없으면 열 바퀴 스무 바퀴도 돌 것 같다. 당연히 초급과 중급자의 부러움을 산다.      


두 번째 부류가 있다. 마치 수영 “선수” 같다. 폼도 폼이지만 속도가 장난 아니다. 강사가 망설임 없이 던지는 훈련량을 주저 없이 해낸다. 초급반 회원이 자유형 25미터를 다 가지 못할 시간에 두 바퀴, 세 바퀴를 돈다. 그 어렵다는 접영도 날아갈 듯이 한다. 평영을 할 때는 물을 쪼개고 들어가는 것 같다. 아저씨, 아줌마인데 군살이 없다. 엄청난 근육질도 아니고 식스팩도 없지만 불필요한 지방 덩어리도 없다.      


전자의 수영장 고수는 수영의 숙련자다. 수영을 오래 해서 물속이 편하고 모든 영법에 능숙한 사람이다. 시간이 한정 없이 있으면 물놀이하듯 유유자적하게 수영장에서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이건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수영"이다.      


후자의 수영장 고수는 경영(競泳)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있는 사람이다. 수영을 훈련하는 사람이다. 수영을 운동이자 스포츠로 생각하고 자신의 실력과 체력을 키우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영법을 더 잘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해보는 사람이다. 손과 발의 각도를 바꿔보고 리듬을 밀어보기도, 당겨보기도 한다.


1번이 오면 달라진다.

지난 금요일, 스타트 연습을 하는 날, 모처럼 1번 주자가 늦지 않게 왔다. 게다가 평소보다 사람이 적게 왔다. 1번과 2번, 그리고 내가 3번을 맡았고, 내 뒤로 이번에 우리 반에 처음 온 아저씨 한 사람과 늘 오던 아줌마 세 명이 붙었다. ‘야, 오늘 장난 아니겠는데.’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웜 업이 끝나자 강사는 우리를 바로 물 밖으로 올라오게 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올라오게 하는 걸 보니 스타트 연습과 병행할 운동량이 만만치 않을 것이 뻔했다. 먼저 스타트 연습을 네 번 시켰다. 그야말로 스타팅 블락에서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네 번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네 번의 스타트 연습이 끝난 후, 강사는 첫 번째 세트를 말해줬다. IM(개인혼영) 두 번이었다. 뒤 주자의 접영 스트로크와 앞 주자의 배영 스트로크가 부딪힐 수 있으니 반을 두 조로 나눴다. 앞 조는 1번과 2번, 나와 새로운 아저씨였다. 뒤 조는 여성 네 분. 우리 조는 1번과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 조가 올라온 후, 여성 조의 IM이 시작됐다. 약간 허우적거리는 듯한 접영이 끝나고 배영을 하며 다시 스타트 라인으로 돌아오는 그녀들을 보고, 내가 2번 아저씨에게 가벼운 농담을 했다. “야, 이거 한참 쉬겠는데요.”,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들은 1번이 중얼거렸다. “와 이래, 늦노.”, “그러게요. 성질 급한 사람은 못 기다리겠는데요.”, 내 말을 들은 1번이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살짝 웃었다.


여성 조가 평영을 끝내고 자유형을 하며 스타트 라인으로 돌아올 때, 1번은 이미 스타팅 블록에 대기를 했다. 마치 계영 선수가 앞선 주자의 터치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여성 조의 1번 주자가 다다랐을 때쯤, 1번이 뛰어들었다. 우리도 따라 뛰어들었다.   

   

그렇게 각 조의 IM 두 번이 끝난 후, 강사는 웃는 얼굴로 우리 조를 보며 말했다. “그 조는 한 번 더 하셔야겠는데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1번이 뛰어들었고 우리도 따라 뛰어들었다. 그 후 이어진 세트에서도, 우린 1번을 따라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고, 그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번도 힘들다.

랩과 세트가 끝난 후 물 밖으로 나올 때마다 1번을 봤다. 그는 두 손을 무릎에 대고, 허리를 숙인 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도 힘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몸을 슬쩍 봤다. 수영선수 같이,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케일럽 드레슬 같은 엄청난 근육질의 몸매는 아니었지만 온몸 구석구석 근육이 살아 있었다. 특히 제대로 물 잡기를 하고 스트로크를 하는 사람임을 증명하듯 등근육과 광배근이 완벽하게 발달해 있었다.


강습 시간이 끝나고, 샤워장에서 2번 아저씨에게 농담을 던졌다. "야, 역시 1번이 오니까, 공장 돌아가듯이 휙휙 로테이션이 돌아가네요.", 내 말에 2번 아저씨는 "하모, 속도가 다르다 아입니까."하고 맞장구를 쳤다.


내가 처음 이 반에 들어온 뒤, 아내에게 1번 주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아내는 종종 “자기 밖에 모른다.”, “함께하는 운동인데 너무 배려가 없는 거 아니냐.”, “보조를 좀 맞춰줘야 하는 거 아니냐.”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난 그를 옹호했다. “그도 우리처럼 돈을 내고 수영을 한다. 그에게 불만 있다면 그 불만 있는 사람이 1번을 하거나, 다른 반, 다른 시간대로 옮기면 된다. 그는 전력을 다해 우리 반을 이끌고 있을 뿐이다.”하고 말이다.      


수영장에 놀러 온 게 아니다.

수영을 오래 하면 수영에 숙련자가 된다. 누가 봐도 편한 폼으로 얼마든지 오래 수영을 할 수 있다. 템포와 속도만 늦추면, 솔직히 몇 시간이고 수영장에서 놀 수 있다. 그렇다. 그건 호텔 수영장에서 놀 때 하는 수영이다. 수영이 운동이 되고 그 운동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더 나은 몸매를 얻고 싶다면 훈련처럼 수영을 대해야 한다. 그런 자세가 없으면 수영은 숙련자의 일상이 되어 그야말로 몸에 자극이 되지 않는다. 그저 지구력과 심폐기능에 도움이 되는, 오래 걷는 운동과 별 차이 없는 활동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그건 운동이 아니라 “취미 활동”에 불과하다.     


그렇게 수영이 “취미 활동”이 된 사람에겐 정체기가 온다. 몸매도, 체중도, 실력에도 변화가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그 반의 1번 주자라면 그 반 전체가 그렇게 된다. 우리 옆 레인의 고급 B반이나 오른쪽 끝 레인을 차지하고 있는 중급 B반처럼 말이다. 이 반의 아가씨, 아줌마, 아저씨의 몸매는 다들 비슷하다. 실력도, 속도도 비슷하다. 누구 하나 앞서 가지도 않고 누구 하나 속도를 내지도 않는다. 다 같이, 그렇게 산책하듯 수영을 “취미활동”처럼 하고 있다.      


숙련 이후의 단련

무슨 일을 하든 오래 하여 경력이 쌓이면 숙련자가 될 수 있다. 고작 네 개의 영법이다. 그 영법을 익히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아마 직장에서 하는 일도, 각자의 분야에서 하는 일도 그럴 것이다. 제법 복잡하고 어려운 일도 그 일과 직무에 익숙해지고 능통해지고, 나름의 기술이 쌓이고 노련해지는, 그런 숙련자가 되는 데는 어느 정도의 노력과 세월이 함께하면 가능할 것이다. 그 뒤, 좋게 말하면 여유가, 부정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매너리즘이 찾아온다.      


그 후, 우리에겐 선택지가 있다. 숙련자로 살면서, 그 정도의 긴장감, 그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더 나아지기 위해 애를 쓰면서, 자신을 닦달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밀고 나갈 것인지. 그렇게 한계 없는 단련과 수련의 길을 갈 것인지.


물론, 후자처럼 단련과 수련의 삶을 살고 싶어도, 어느 순간, 어느 세월 이후엔 그럴 수 없을 때가 찾아온다. 총기(聰氣)도 떨어지고 체력도 떨어져서 공부를 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운동을 해도 근육이 붙지 않으며 체력이 향상되지 않는 시기가 찾아온다. 이때가 오기 전, 우리에겐 앞서 말한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인생의 모든 순간을 경주마처럼 살 순 없다. 그건 자신을 갉아먹는 행위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무엇이라면, 그게 일이든 취미든, 우리는 그 무엇을 더 잘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하지 않을까? 기왕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면 근육이 펌핑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수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수영을 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다. 전력을 다하지 않았거나 칼로리 소비 대비 많이 먹는 것이거나. 고백하건대, 제법 가열 차게 수영을 하지만 내 몸무게는 여전하다. 단지 몸의 라인만 바뀌었고, 바뀌고 있을 뿐이다. 전력을 다하는 수영의 기준이 뭐냐고? 우리 1번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토할 것 같을 때까지 하지 않으면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긴 대로 산다는, 그 거짓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