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이력엔 관심이 없었다. 십 대 시절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를 좋아했을 때도, 이십 대 시절 폴 오스터나 하루키를 열심히 읽을 때도 작품만 좋으면 됐지, 과거가 무슨 상관이냐는 주의였다.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언제 어디서 만난 사람이든 과거에 대해 물은 적이 없다. 애인이든 작가든 지금 내가 좋으면 장땡일 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던 작가는 김훈 선생님정도였는데 그나마도 당시 언론에서 하도 떠들어댄 탓에 어쩌다 귀동냥을 한 덕분이다. 비평계에서는 작가주의 비평을 하기 위해서든, 역사주의 비평을 위해서든 작가의 이력을 좀 알아야 하는 모양이던데 일개 독자 입장에선 구지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하루키 에세이를 읽어보니
그 생각이 바뀐 건 얼마 전이다. 어쩌다보니, 재작년 연말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열권을 시대 순으로 읽게 됐다. 78년에 데뷔를 한 후 제법 이름이 알려진 후인 80년대와 십여 년 전까지, 여러 잡지에 연재한 것들을 모아 놓은 것들이다. 물론 그 전에도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하루키라는 사람이 그렇게 간단치 않은 사람이라는 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열권의 에세이를 읽고 나니 역시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특히 <노르웨이의 숲>이 나라 안팎으로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친 이후에도 묵묵히 삶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살고 싶은 데로 사는 모습을 읽다보니, 그의 굳은 심지랄까, 자신의 일상을 수성전(守城戰) 하듯이 지켜내는 그의 견고한 내면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의 사사로운 일상을 시기별로 쫓아가며 읽다가 떠오른 영화가 <패터슨>이다.
평범한 사람, 일상의 반복
여기 버스 운전기사가 있다. 해병대 출신, 스마트 폰은 없고, 걸어서 출근 한다. 시를 읽고 쓰는 게 취미다. 영화 <패터슨>은 이 시내버스 운전기사 패터슨의 이야기다. 패터슨이 사는 패터슨은 실제로 뉴저지 주에 있는 작은 도시다. 이 도시는 퓰리쳐 상을 수상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와 프랭크 오하라라는 시인이 살았던 도시로, 윌리엄스는 이 도시에서 의사로 일하며 시를 썼다.
자 그럼, 이 영화는 어느 무명씨가 문단에 혜성 같이 등장하는 이야기인가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버스 기사의 일주일이 담긴 영화에는 소위 “영화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스피드>처럼 버스에 설치 된 폭탄을 해체하지도 않고, 성격이 전혀 다른 아내와 부부 싸움도 하지 않는다. 매일 저녁 산책시키는 애견 잉글리시 불독 마빈이 지나가는 사람을 물지도 않는다. 산책길에 들르는 술집에서도 딱 맥주 한잔하며 맨 날 보는 사람들과 수다만 떨뿐, 엄청난 미녀가 카운터 옆 자리에 앉아 말을 거는 바람에 오늘밤 집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는 “불길한 기적”은 없다. 새벽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개를 산책시키고 맥주 한잔하고 집에 들어와 자는 그 일상이 반복된다. 나와 당신의 일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상이다. 이 일상 속에서도 그는 시를 쓴다. 그 시어(詩語)는 우리의 언어와 다르다.
시어(詩語)는 어디서 왔을까?
중학교 때, 포켓 사이즈의 해외 유명 시인 선집이 유행했었다. 그 유명한 푸시킨의 <삶>이나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보들레르의 <에뜨랑제(이방인)>나 <알바트로스>를 처음 읽은 것도 이런 시집들이었다. 이 시기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좋아해서 멋도 모르고 이준오 교수님이 번역하신 <랭보 시선>을 덥석 사들여 무작정 읽기도 했었다. 그때는 ‘랭보처럼 마흔이 되기 전에 죽을 거야.’라고 서슴없이 다짐하던 나이라 모든 시들이 랭보의 시처럼 격정적이고 시인의 삶도 드라마틱한 줄 알았다.
다행히 대학 때 국문과 여학생-지혜는 잘 사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대차게 말아 먹었다던데-을 사귄 덕에 대부분의 시인은 박재삼 시인이나 김용택 시인처럼 아주 평범한 삶 속에서 비범한 시어를 건져낸다는 걸 알게 됐다.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난 여전히 시는 격정적이어야“만” 하며 시인의 삶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해야“만”하고, 랭보처럼 매일 밤 압생트 주에 취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 패터슨의 삶에도, 그의 시에도 랭보의 격정이나 아폴리네르와 보들레르의 탐미는 없다. 그저 묵묵히 지키며 사는 일상이 있고, 주변의 사물과 소소한 하루에서 포착한 신선하고 생생한 시어(詩語)가 있을 뿐이다. 그 시어를 불러낸 힘은 뭘까?
인생의 패임-궤적
하루키의 에세이를 통해 그가 등단하고 나서부터 글로벌 슈퍼스타가 된 후까지, 대략 30여년을 들여다보고 나니 시인과 소설가가 묵묵히 걸어온 삶의 궤적이 저 빛나는 소설의 문장과 시어(詩語)의 힘의 배후임이 분명해 보였다.
궤적(軌迹)은 수레바퀴가 지나간 흔적이다. 한자 궤적에서 앞의 궤는 바퀴자국을, 적은 그것이 남긴 자취를 말한다. 궤로 만들어진 단어 중에 궤적과 궤간, 궤도 등을 떠올리면 궤의 뜻이 쉽게 이해 간다. 이 바퀴자국은 들판을 한번 슥 지나간 바퀴의 자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름의 규격과 무게를 지닌 마차나 수레들이 정해진 길을 빈번히 오가며 만든 패임의 흔적을 말한다. 그 흔적이 굳어지면 궤간이 되고, 궤간이 굳어지면 도로의 규격이 된다. 그래서 한자 궤는 수레를 뜻하는 차 옆에 힘 역자가 붙어 있는 것이다.
자취 적이라는 한자도 마찬가지다. 발 족(足)자와 또 역(亦)자가 합쳐진 이 한자는 얼핏 보면 발걸음을 뜻하는 족자가 의미를 다하고 있는듯하지만 뒤의 또 역(亦)자가 합쳐져야 자취가 된다. 뒤의 또 역자는 겨드랑이 액자로도 쓰이는데 액취라는 뜻을 담고 있다. 결국 발자취와 액취가 함께 자취를 이루는 건 사람의 자취를 형성하는 데는 한 공간, 한 시대, 한 길을 꾸준히 오가며 살아온 사람이 남긴 그 고유의 냄새도 한 몫 함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그 냄새, 그 자취가 악취일지, 향기일지는 그가 살아 온 삶이 좌우할 테지만 말이다.
울산광역시 북구에 있는 호계역은 백년 동안 제 임무를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사진은 울산 북구 의회 이진복 의원 페이스북에서 가져 왔다
새로운 시선으로 탐지 된 일상
시인 패터슨도, 영화에 등장하는 시인들도 생업이 있고 일상이 있다. 하루키에겐 글쓰기가 생업이다. 소위 챈들러 스타일로 매일 아침 두 시간씩 무조건 책상에 앉아 뭔가를 쓰거나 생각하고, 한 시간 반 정도는 마라톤 연습을 한다. 협회 활동이나 사교계 모임 같은 것도 안 하고, 어쩌다 마음 맞는 편집자나 안자이 미즈마루 같은 삽화가랑 술을 마셔도 어김없이 열시 전에 집에 들어와 잔다.
이 삶과 패터슨의 삶은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이 특별한 글을 써내는 비결은 우리와 다른 특별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우리와 다른, 특별하고 신선한 시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가 말했듯이 소설을 쓰기 위해 헤밍웨이처럼 쿠바에 가고 스페인 내전 참전 같은 혹독한 경험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버스 노선 같은 일상을 견고히 지켜나가면서 늘 신선한 시선으로 매일 매일의 일상과 이웃과 도시의 새 얼굴을 탐지해내면서 작품을 쓰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궤적의 결여와 존재의 불안
삶의 궤적은 꾸준히 살아온 과거와 오늘 선택하는 경험들로 만들어진다. 고향, 학교, 친구, 취향 등은 그런 궤적을 잇는 침목이다. 내겐 이 침목 중 빠진 것들이 있다. 가난과 파편 화 된 가정 탓에 이사를 많이 다녔다. 때문에 경부선을 축으로 이 땅 위아래를 떠돌며 살았고, 여러 학교를 다녀서, 맺은 인연은 드물고, 그 인연 또한 짧았으며, 취향 같은 건 사치였다.
반면 딸은 차곡차곡 자신의 침목을 놓아가며 궤적을 이어나가고 있다. 스스로 부산이 고향이고 부산 가시나라는 걸 자랑스러워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궤적도 동화작가 최숙희씨를 시작으로, 백희나 작가를 거쳐 마녀 위니의 밸러리 토마스와 코기 폴을 지나 초등학교에 이르러서는 미카엘 엔데와 로알드 달, 에리히 캐스트너까지 이어나갔다.
이런 딸에 비하면 난 본편에서 20분쯤 분량이 사라진 영화와도 같은 삶이다. 한동안 겪은 심리적 불안도 어쩌면 그 사라진 궤적의 공백 때문이지 않을까?
궤적의 공백은 존재의 현존을 불안하게 자리매김한다.
공동체도 이 불안은 피할 수 없다. 나라나 사회가 사라진 역사를 찾아 복원하려는 시도도, 그 사라질 위기에 처한 역사의 증거를 기록하려는 이유도 이 불안의 해소와 방지를 위해서다. 실제로 우리 사무실에도 어지간한 민속박물관 못지않게 민속/생활사 연구 결과를 모은 책들이 많다. 감독이 박물관 일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전국 각지의 학예사들이 관련 책자를 보내줬기 때문이다.
솔직히 재미없다. 어지간한 책이라면 참고 보는 나조차도 훌훌 몇 페이지 넘기다 다시 꽂아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발간하는 이유는 이 시대의, 한 인간의 기록의 누적이 우리의 역사의 궤적을 이어가는 작은 침목이 됨을 학예사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책들이 설령 단 한권도 팔리지 않더라도 만드는 것이고, 대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아주 고이고이 우리나라 주요 도서관에 꽂혀 있는 것이다. 마치 순수 품종을 보관하는 축산 연구원이나 농수산 연구원에 있는 종자처럼 말이다.
쌍둥이 = 위대함과 평범함
패터슨과 하루키의 일상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새로운 뭔가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삶이나 경험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을 보석처럼 소중하게 다루며 매일 매일 들여다보는 나만의 시선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은유와 실재, 예술과 일상, 위대함과 평범함은 한 인간, 한 예술가의 내면을 이루는 쌍둥이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 쌍둥이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이런 내면의 쌍둥이는 신을 섬기는 이들에게도 찾을 수 있다. 신에게 더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그 뜻을 헤아려 그렇게 살기 위해 스님과 수녀님, 수도사들은 사찰과 수도원에서 신과 영적인 소통을 한다. 그와 동시에 일상의 노동도 한다. 스님들이 이렇게 울력을 하는 것도, 수도사들이 빵과 잼을 만드는것도 신의 신비는 때론 일상의 의 땀방울에 맺혀 찾아옴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는 것처럼
하루키의 80년대 에세이로 그의 궤적을 따라가며 오늘의 그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그가 간사이 지방의 고베와 효고현 사이의 작은 도시 출신인 것도, 전업 작가로 나선 이후 아버지와 의절한 것도, 소설가로 잘나가기 시작하던 80년대까지도 운전면허가 없었다는 것도 말이다.
패터슨도 하루키도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친 사람, 도시, 풍경, 심지어 작은 성냥갑에서조차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그렇게 일상의 예민한 목격자가 되어 그 변화와 성장의 기쁨을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그들과 같은 도시, 같은 순간을 살았지만 그 일상의 빛나는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소설과 시로 옮겨주고 나서야 겨우 그 기쁨에 동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과 같은 남다른 시선을 가진 목격자 되는것도, 그 목격자 의 시선을 갖는 것도 어느 날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 마주한 인생도, 그 인생이 만드는 뭔가도 지금 이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이를 키워보면 그걸 절감한다. 지금 아빠한테 맥주 좀 그만마시라고 잔소리하는 열 살짜리 소녀를 보고 있을 때 마음에 솟구치는 두 개의 감정이 있다. 한 존재의 오늘에서 뿜어져 나오는 경이로움과 한 존재가 오늘날까지 살며 겪었을 수고로움에 대한 연민이다.
이와 유사한, 이 두 감정의 동시 등장을, 우리는 <생활의 달인>을 볼 때마다 경험한다. 달인의 경이로운 기술과 재주를 보여준 뒤 어김없이 달인이 그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들였던 세월의 내공과 겪은 사연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 두 감정의 칵테일 속으로 빠지게 하기 위함이다.
한 존재의 오늘에서 발휘되는 경이로움과 한 존재가 오늘에 오기까지 겪었을 수고로움이 있다. 달인의 놀라움이 세월의 내공에 있듯이 내 곁에 있는 이가 보여주는 사사로운 경이 속에서도 우리는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운 이의 삶을 들여다 볼 때마다 저 감정의 칵테일을 겪는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들리는 어머니의 경쾌한 칼질 소리가 어느 날 문득 애잔하게 들리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 아닐까? 그 칼질 끝에 정렬 된 균일하게 잘린 애호박을 볼 때, 문득 어머니가 우리에게 들여온 정성에 대한 고마움이 해일처럼 덮쳐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 아닐까?
과거를 알고 난 후에 보는 한 사람의 오늘이 알기 전 본 어제의 모습과는 달리 보일 수 밖에 없듯이, 패터슨과 하루키의 과거를 알고 난 후, 그들의 일상의 견고함을 엿보고 난 후에 본 그들의 시와 소설도 달리 보였다.
저 시어의 생생함과 하루키 소설의 그 깊고 환상적인 이야기의 빛깔들은 그들의 세월이 쌓여 만든 진주 같은 것임을 알았다. 달인의 땀방울을 본 사람은 놀란 입을 다물고 눈물샘을 열 수 밖에 없다.
전과 후가 동일한 사람
어쩌면 영화 <패터슨>은 한 시인이 유명해지기 직전의 어느 해의 일주일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애견이 시를 적은 노트를 찢어 버려서 등단은 늦었지만, 어쩌면 패터슨은 다음 해쯤에는 데뷔했을지 모르고, 그 시집이 메가 히트를 했을지 모른다. 설령 그렇게 히트를 못했더라도 제법 입소문이 나서 사인회도 열고 주민 센터와 문화센터, 심지어 TV에서 강연을 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유명해진 시인 패터슨도 하루키와 같이 자신의 일상을 무던히 지켜내지 않을까?
유명 시인 패터슨의 프리퀄이 영화 <패터슨>이라면, 유명 시인의 현재를 다룬 패터슨 후속작-만약 그런 영화가 나온다면-도 예의 프리퀄처럼 잔잔하고 평범하지 않을까?
어쩌면 짐 자무쉬는 그걸 말하고 싶었던건 아닐까? 직업이 특별하면 삶도 그럴거라는 안팎의 기대를 저버리고 견고하고 고집스럽게 일상을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건 아닐까? 이를 통해 역절적으로,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도 남다른 시어와 마음을 흔드는 문장이 잉태되어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건 아닐까?
한 해의 끝에서 실망하는 당신에게
연말마다, 다가올 새해를 특별한 한 해로 만들기 위해 여러 결심과 계획을 했을 것이다. 한해의 말미엔 특별한 것을 성취해서 특별한 내가 되어 있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1월에는 버텨내던 결심이 2월부터 어그러져 봄을 맞는 것이 우울할 정도로, 예전과 같은 나로 돌아갔음을 확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패터슨을 만나보라. 특별한 성취는 특별한 결심이나 경험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꿋꿋이 지켜낸 일상에서 나올 수 있다고, 패터슨은 덤덤하게 말하니까.
하루키 같은 대 작가가 아닌 우리에게 일상을 지켜내는 것은 더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야말로 단호한 의지가 필요하다. 붙잡고 늘어지는 침대를 떼어 놓아야 하고, 빽빽한 책꽂이 같은 지하철과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해야 한다. 우리처럼 전투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회에서는 숙취까지 이겨내야 한다. 맘에 안 드는 상사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하고 일할 줄 모르는 부하 직원을 향해 뿜어져 나오는 분노는 꾹꾹 눌러 담아야한다. 이것저것 어긋나는 배우자하고도 잘 버티고 살아야하고, 그 와중에 애도 잘 키워야한다.
대한민국에서 일상을 버텨내는 사람들의 의지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의지를 가진 당신이 묵묵히 하루하루 주어진 길을 다져오며 놓은 침목이 언젠간 당신만의 궤적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 길 어디쯤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작품 같은 인생, 인생 같은 작품을 탄생시킬 그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