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로 20여년 가까이 버티면서 얻은 재주에 기대어, 욕심 없이 산다. 그러나 요즘엔 다들 전망이 어두운 탓인지 한방을 꿈꾼다. “영끌”이라는 단어가 나 같은 신조어 무식쟁이한테도 익숙해질 만큼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더니 요즘엔 주식 투자가 열풍이다. 나만 안하나 싶은지 앞 다퉈 증권사로 달려가고 있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다.
얼마 전 우리 감독도 코로나19의 백신이나 치료제, 주사기를 만드는 국내 기업의 주식을 사둘까 너스레를 떨었다. 여유 돈만 생기면 카메라며 각종 장비를 사는 사람까지 주식 투자 운운하는 걸 보다보니 일본 거품 경제 시기 즈음을 다룬 영화 한편이 생각났다.
좋았던 한 때의 끝물
<종이달>은 버블경제라는 불꽃놀이가 끝나갈 무렵인 1994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입금 전표를 수기로 써서 처리하면서도 예금과 대출 영업은 공격적이었고 카드 발급은 무차별적이었던 시대, 낮은 금리로 인해 모든 돈이 주식과 부동산에 몰리던 시절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럼 도대체 80년대 일본경제는 얼마나 거품이었을까? “거품경제시대 코카콜라 광고”라고 검색해 보자. 젊은 남녀의 웃음이 넘쳐난다. 에너지와 긍정, 밝은 미래만이 그려진다. 그럴만한 것이 88년에 월스트리트 저널이 발표한 세계 100대 기업에 일본 기업이 무려 53개였다. 50위 안에도 33개였는데 문제는 그중 상당수가 금융 기업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를, 그때는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당시 일본 국민의 해외 여행객은 1991년에 이미 천만 명을 넘었고, 백화점은 밤 열시 넘어서도 영업을 했다. 누구나 저금리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과 환상이 교차하던 시기였고 그 확신과 환상은 거품이 꺼진 뒤에도 유령처럼 남아서 90년대 초반까지 떠돌았다.
종이달, 스튜디오 환상의 시작
여주인공 미카는 이 당시 부동산 투기 붐을 타고 조성 된 베드타운에 사는 지역 은행의 계약직 직원이다. 이런 평범한 여성이 고객 돈 몇 억을 횡령해서 흥청망청 쓴 이야기가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다. 그래서 생각 없이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금융 범죄 영화처럼 보게 되고, 그렇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정작 “종이달이 뭐야?”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일본인들에게 종이달은 좋았던 한 때를 의미한다. 사진관이 일본에 처음 등장했을 때 초승달이 거린 스튜디오에서 가족이나 커플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진 찍기 유행은 유럽과 미국 등지에 출발했다. 1900년대 흑백 사진 수집가인 Peter J. Cohen에 의하면 1905년에서 1930년까지 초승달에 앉거나 기대어 사진을 찍는 것이 이들 지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1902년,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의 <달세계 여행>이 너무 인상 깊었기 때문이라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족과 연인이 스튜디오에 사진을 찍으러 갈 땐 대체로 기쁜 일, 좋은 일 때문이다. 사진 찍으러 온 연인들이 사이 좋은 건 당연할테고, 화목한 가족이 그 행복한 순간을 담고자 할 것이다. 게다가 초창기 사진촬영은 제법 고가였을 테니 사진엔 담긴 건 당연히 가족과 연인이 사회, 경제적으로 잘 나가던 시절, 가장 행복한 시절, 소위 전성기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종이달은 행복한 한 때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환상은 점점 커진다.
횡령한 돈으로 뭘 했을까? 그녀는 범죄 수익을 유흥비로 탕진하는 절도범이나 강도들처럼 고객 돈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탕진했다. 부자 행세를 하며 대학생 불륜남의 등록금을 대주고 고급 컴퓨터를 사줬으며, 그와 특급 호텔에 묵으며 3박 4일 간 질펀하게 놀았다. 심지어 집을 얻어 준 뒤 동거 흉내도 냈다.
그 탕진은 그녀가 살아온 삶이 아닌 그녀가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던, 꿈꾸던 ‘행복한 한 때’의 실현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그 탕진의 순간은 터지지 않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영롱한 비눗방울처럼 보인다. 햇빛이 스쳐 가면 무지개를 흉내 내며, 일순간 아름답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움이 그 탕진의 순간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저 탕진의 순간만 비눗방울 같이 위태로운, 종이달 같은 가짜 행복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챌 수 있다. 그녀가 꾸린 가정, 집, 그 안의 사물, 그리고 그녀 자신조차도 그녀가 ‘이상적’이라 꿈꾸던 ‘행복한 한때’의 세트, 소품, 캐릭터다. 그래서 그녀가 살고 있는 주택 단지를 보고 있으면 <스텝포트 와이프>에 나오는 스텝포드와 <트루먼쇼>에 나오는 작은 섬 시헤븐(Sea-Haven)이 떠오른다.
이 “꾸며진 행복”의 위태로움은 연달아 보여주는 몇 개의 시계들을 통해 가시처럼 돋아난다. 미카는 계약직 연장 기념으로 남편에게 대략 30만 원 정도하는 시계를 선물한다. 시계를 선물 받은 남편은 “골프 칠 때 이런 편한 시계가 하나 있었으면 했다.”고 좋아한다. 이때 미카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린다. 미카는 나름 큰 맘 먹고 사치를 부린 건데 정작 남편으로부터 편한 시계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남편은 출장 갔다 오는 길에 까르띠에 시계를 사와 선물한다. 그 정도는 이제 차도된다는 말도 함께 덧붙여서. 그 후 미카는 횡령한 돈으로 연하의 대학생 연인에게 시계를 선물한다. 평균 1, 2억 정도를 호가하는 필립 파텍이다.
시계가 비싸져도 시간은 늘어나지 않는다. 거품에서 발견되는 그 오묘한 빛깔이 거품의 것이 아니듯이, 시계가 아무리 화려해도 시간은 시계의 것이 아니다. 시간은 그것을 헤아릴 수 있는 존재의 것이다. 그래서 시계는 부의 과시를 위한 사치품이기 전에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 견디며 살아내야만 하는 일상의 엄밀함을 위해 존재하는, 냉험한 생의 규칙을 실천하게 돕는 ‘사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카에게 시계는 욕망의 대체물, 그 자체다. 시간이 아닌 시계만 보일 때, “꾸며진 삶”은 더 큰 “꾸밈”으로 무한히 도약한다.
주어진 시간을 사는 사람
물론 시계의 거품을 외면하고 엄밀한 시간을 사는 사람, 일상과 사물의 세계를 묵묵히 살아내는 사람도 있다. 미카의 직장 상사 사미가 그런 사람이다. 그녀는 25년을 한 은행에서 일하면서, 조용한 일본의 지역 은행조차 대출 실적에 내몰려야 했던 초고도 성장기를, 그 내부에서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남들이 대출 받아 주식에 투자하고 부동산에 투자할 때도, 그리고 그 수익으로 긴자와 신주쿠의 유흥업소를 들락거리고, BMW 같은 고급 승용차를 덥석덥석 사들이며 돈 쓸 때도 일찍 잠들고 아침에 출근하는 삶을 지켜냈다.
그녀가 미카의 횡령을 알게 된 후 심문 아닌 심문을 할 때 “혹시 땅 사놓은 거 없냐.”고 물어본다. 남에 돈을 횡령한 사람이 만약을 위해 땅이라도 사놓지 않았을까하는 기대가 현실적인 사미의 생각이다. 그녀에겐 환상이 없다. 기껏 꿈꾸는 일탈과 환상이 밤을 새 보는 거다. 밤을 새면 피곤하고, 피곤하면 다음날 출근해서 일을 못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밤샘은 가장 최고의 탈선인 것이다.
그렇게 살아낸 사람이 범죄의 증거를 찾는다. 25년 간 한 직장을 다닌 스미는 자신의 전출에 반하는 증거를 찾다가 우연히 횡령과 부정의 증거를 찾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실한 경험이 환상을 가능케 한 부정을 발견한 것이다.
어쩌면 감독과 원작자는 사미를 통해 성실히 잘 살아온 사람만이 현재의 상황과 문제를 간파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솔루션을 제안하는 능력이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환상을 쫓으며 살아갈 때 현실의 끈을 놓지 않은 사람만이 은행이라는 조직, 더 나아가 일본이라는 사회의 실상을 탐지해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게 진짜 삶이야?
그러나 미카는 사미를 비웃으며 묻는다. 진짜 삶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묻는다.
"내가 남에 돈으로 내가 마음에 품었던 욕망을 실현했고 누렸어. 이게 진짜 삶 아니야? 넌 맨 날 월급 받아먹으려고 밤 한 번도 못 새봤어. 그런 게 진짜 삶이야? 욕망대로 살아보지 못한 삶이 진짜 삶이라고 할 수 있어?"하고 말이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쏟아내게 한다. 욕망의 실현이 가짜인 걸 알아도 행복할까? 남에 돈으로라도 잠시 자기가 하고 싶었던 환상을 다 실현한 사람은 행복할까? 아니면 현실을 냉정하게 보고 그 안에서 잘 살아나가는 사람이 더 행복할까? 생의 마지막 비참을 겪는 다면 누가 더 비참할까?
그러나 영화 속의 답은 모호하다. 욕망의 실현이라는 환상에 눈을 안 돌리고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은 사회와 시스템이 만들고 제시하는, 주어진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그 길의 끝엔 은퇴가 있고, 그 길의 거부는 탈선이다. 철학자 김진영이 <상처로 숨 쉬는 법>에서 썼던 표현을 빌리면 우린 이런 생의 비참을 견디기 위해 환상이 아닌 합리성이나 힐링 같은 “슬픈 거짓말”을 만들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자 합리적으로 생각해 봐. 오늘 밤새 노는 게 정상이니.” 이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말이다.
오래 된 종이달의 질문
대중문화에서 종이달, 즉 Paper moon은 늘 미카와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냇 킹 콜의 노래로 유명한 <its only a paper moon>은 “종이로 만들어진 가짜 달일 뿐이지만 당신이 믿어주기만 하면 진짜로 믿게 될 거예요.”라고 노래한다. 마지막 구절에선 “바넘과 베일리가 만든 서커스처럼 우스운 가짜 세상이지만 당신이 날 믿어주기만 하면 더 이상 가짜가 아니죠.”라고도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 블랑쉬 드 부아는 욕조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그녀의 삶을 지탱해온 것이 환상이었음을 은연 중 고백한다. 그 환상은, 남부 명문가의 딸이었지만 남편의 자살과 부모의 빚잔치, 그리고 제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동생 부부가 사는 뉴올리언스로 도망 온 그녀가 만들어낸, 텍사스 부자가 자기를 데리러 온다는 환상이다. 이 영화의 21세기 버전이 <블루 재스민>이고 일본 버전이 <종이달>이다.
노래에 등장하는 PT 바넘은 프로모터의 조상이다. 영화 <위대한 쇼맨>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그는 자신의 박물관과 서커스 홍보를 위해 “최고”, “최초”, “위대한”, “일생에 단 한번” 같은 문구를 남발했다. 그 문구의 힘, 환상의 힘은 <위대한 쇼맨>에서 우리가 익히 목격 했듯이 서커스의 천막 안에서 발휘됐다. 밖의 냉혹한 현실을 잠시 잊고 싶어 하는 관객의 기대와 맞물려서 말이다.
서커스 천막처럼 갇혀진 스튜디오 속 종이달의 힘은 찰나고 가짜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저 가짜의 기쁨을 쫒기도 한다. 미카의 고객 중 한명인 쇼핑 좋아하는 노부인은 모조 장신구를 보여주며 이런 말을 한다. “가짜면 어떠냐? 예쁘면 되지 않냐.”고 말이다. 예쁜 환상, 이것이 종이달이 가진 힘의 전부다. 그래서 <종이달> 같은 삶은 영화 <카게무샤>와 같은 삶이다. 아무리 잘 꾸며진 세트 도시 시해븐도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진짜 Seahaven을 대체 할 수 없다.
서커스의 환상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은 스튜디오에 걸린 종이달 같은 것이다. 스튜디오에 걸린 달은 썰물과 밀물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엷은 빛조차 만들어 낼 수 없다. 종이달은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환영처럼 등장해 웃고 있는 내 모습 뒤에서 좋았던 시절의 죽은 증인, 말 없는 증거물의 역할을 할 뿐이다. 사진이 바래지고, 기억이 사라질 때까지.
삶과 시계의 냉혹함 - 가야할 곳으로 간다.
사진관 밖의 세상에 눈을 감고 종이달에 속으며 살겠다고 결정해도, 설령 그 종이달이 세계에서 가장 예쁜 달이라고 해도 우리의 삶은 영화 속 대사처럼 "가야 할 곳으로 가야만"한다. 이 가야만 할 곳으로 가야한다는 것이 어쩌면 <종이달>의주제일지 모른다. 그렇다. 3천 원짜리든, 30만 원짜리, 심지어 1억짜리 시계조차, 세상의 모든 시계는 스물 네 시간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해가 뜨면 지듯, 태어나면 죽듯, 우리 또한 그러하다.
인간의 욕망엔 끝이 없지만 환상엔 끝이 있다. <카케무샤>처럼 허상이 아무리 진짜 같아서 주군의 조카와 적까지 속이더라도 전장을 함께 누볐던 말은 알아채는 것처럼 환상은 알아챔으로 깨어진다. 그러나 욕망은 그 환상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 깨어짐을 예감함에도 불구하고 더 큰 환상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결국 미카처럼 더 큰 환상의 폭죽을 터뜨리면 터뜨릴 수록그 후폭풍, 그 경제적, 사회적 비용을 감당해야만 한다.
삶은 끝난다. 그 후, 합리성의 거짓말을 믿으며 살았든 종이달의 환상에 기대어 살았든, 각자의 계산서를 받는다. 종이달을 모티브로 써진 영화와 소설, 노래들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결국엔 끝날 수 밖에 없는, 한번 밖에 없는 이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이 삶을 진짜 살아낸다고 말할 수 있는가이다. 사회와 세상이 진짜라고 인정하는 삶과 대 놓고 환상에 기대어 사는 삶 중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그 두 개의 삶을 구분할 수 있는지, 진짜를 살게 하는 힘은 뭔지를 묻는 것이다.
묵묵히 사는 수밖에
의지해 온 환상의 실체를 직시하는 용기, 현실을 마주하는 흔들림 없는 시선이 종이달을 태운다. 그 종이달이 잿더미가 되는 과정을 끈덕지게 바라보는 힘이 이 오차 없는 냉험한 현실을, 삶을 살아내게 한다. 다시, 철학자 김진영이 아도르노에게 가져온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물 속에 사는 물고기'와 같다. 그곳은 "자유와 행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들은 전부 어디론가 가버리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곳. 오로지 환상만이 들어 있는 곳"이다. 이런, '알고 보면 텅 비어 있는 장소.'를 아도르노는 상처라고 했다. 이 상처를 인정하는 삶이 어쩌면 저 종이달의 잿더미를 딛고 시작하는 삶일지도 모른다.
그 상처로 숨을 쉬라고, 그곳을 허파로 만들어 숨을 쉬며 살라고 김진영은 독려한다. 김진영의 독려는 철학자 김상중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살아야하는 이유>에서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격려했다. 그저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공자가 말한 불혹을 김진영과 강상중의 말로 번역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불혹은, 날 흔드는 것이 없는 게 아니라 흔드는 어떤 것들은 종이달에 불과함을 알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일궈가는 힘이 생기는 나이라는 의미이지 않을까? 종이달 뒤편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져 그 배후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살 수 있는 나이라는 의미이지 않을까? 시간의 굴레를 인정하고 수많은 종이달에 현혹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생의 시간과 시대를 묵묵히 살아내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삶이라는 의미 아니까?
누군가에게 삶은 투자고, 누군가에게 삶은 저축이다. 미카에게 삶은 찰나의 환상으로 점철되는 것이라면, 사미에게 삶은 묵묵히 지켜내는 일상이다. 그 일상을 지켜나가는 당신에게 철학자 강상중의 말을 빌려 위로를 하자면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당신다우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살짝 바꿔 말하면, 어떤 삶이 진짜 삶인지 애써 찾기 위해 녹초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삶이 진짜이고 옳은 삶인지에 대한 판단은 철학과 종교, 심지어 역사에 떠넘기자.
삶의 사라짐을 당연히 받아들여 끝나야 할 때, 가야할 때 담담히 손 털고 돌아설 순간이 올 때까지 그저 이 삶을 살아내는 거다. 한 줌의 재로 남을 우리의 마지막 흔적을 예감하며 오늘을 사는 거다. 그게 삶이 아니겠나?
방황을 해도 된다. 라캉이 말했듯이 저 거짓말과 환상에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그 방황의 어지러운 마음을 부여잡고 오늘 하루 묵묵히 살아낸 자신을 위해, 이 저녁, 가장 좋은 잔에 격려의 술을 가득 따라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