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위로 8 . 쇼생크 탈출(1994)
2차 세계대전 때 활약했던 B-17 폭격기의 볼 터렛 사수(Ball Turret Gunner)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 <쇼생크 탈출>이 생각났다. 영화<멤피스 벨>에서 볼 수 있듯이 B-17 같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 폭격기 측면에는 여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비행기와 팀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실존 인물이기도 하고 가상의 인물이기도 한 그녀들은 핀업걸이다.
핀업걸이라는 명칭은 2차 세계 대전 때 장병들이 사물함 문이나 침대 맡에 여자 그림을 붙여놓은 데서 유래하는데 1953년 플레이보이의 등장 이후 화보로 대체 됐다. 이 핀업걸들은 전장과 군대에서도 식을 줄 모르는 청춘의 끓는 피를 식혀주는 역할도 했지만 적과의 대면에서 오는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하고 은폐시키는 역할도 했다. 그래서 전쟁 이후 거의 모든 청춘들의 벽은 물론이고 <쇼생크 탈출>에서처럼 교도소 벽에도 붙게 된다.
몇 번을 보더라도 재미있는 영화가 있다. 그런 영화는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장면이나 소품이 발견되는데 <쇼생크 탈출>의 핀업걸도 그런 경우다. 영화에는 총 세 명의 핀업걸이 등장하는데 <길다>의 리타 헤이워드, <7년만의 외출>에서 지하철 통풍구 위에 서서 원피스 자락을 붙잡고 있는 마릴린 먼로, <공룡 백만 년>의 라켈 웰치다. 각각 46년, 57년, 66년 개봉작으로, 감옥에서의 시간의 흐름을 십년 단위로 보여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핀업걸이 맡은 중요한 역할은 따로 있다.
돌로 만들어가는 체스 말과 직접 가꾼 도서관과은 앤디 듀프레인이 교도소 내에 구축한 안온한 세계의 상징이다. 그는 금융이라는 자신의 재능을 압도적 권력에 내어줌으로써 이 특별한 사치를 허락 받았다. 갇혀 있는 그곳에서 대체 할 수 없는 존재가 됨으로써 그 안의 어떤 이보다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 될 만한 것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제한 된 공간, 자유가 박탈되고 폭력적인 공간에서 확보한 안온한 사물들의 진짜 역할은 진실의 은폐다. 이 은폐는 폭격기의 대원들이 독일 본토에 폭격을 하는 동안 그 비행기라는 공간과 적 전투기의 공격으로 인한 격추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핀업걸과 폭격 성공 횟수를 표시하는 상징 뒤로 은폐 시킨 것과 같다.
또 미국 대학의 미식축구 선수들이 수비에 성공하거나 터치다운에 성공하면 꼼꼼히 그 횟수를 자랑하기 위해 붙이는 스티커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들이 프로가 된 후에 마주하는 무한 경쟁과 육체적 고통과 부상, 그리고 패배의 공포는 선명하고 화려한 유니폼과 팀의 공격적 이름, 과한 세리모니와 함성으로 은폐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 필드 안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 공포를 견뎌내는 장치일 뿐 없애지는 못한다. 판을 떠나지 않고 버텨내기 위해 선택한 위안들에 불과한 것이다. 이건 마치 효험 없는 부적, <라이번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저격수가 매번 저격할 때마다 입을 맞추는 묵주와 같다. 그러나 체스의 말도, 미식축구 선수도, 그리고 교도소의 앤디 듀프레인도, 심지어 교도소소장의 그 당당한 위세도 정해진 규칙과 필드 안에서의 성과일 뿐이다.
앤디 듀프래인은 핀업걸로 은폐됐던, 그 세계의 저편으로 탈출한다. 그 탈출구는 수십 년 간 핀업걸로 가려져 있었다. 이 영화가 <대탈주> 같은 어느 탈옥 영화처럼 그 준비 과정을 틈틈이 보여주지 않는 것은 감옥에서 누리는 평온한 일상과 험난한 탈옥 준비 과정의 교차 대비를 통해 스릴을 선사하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독은 그 과정을 은폐한 뒤 탈옥의 결과인 빈 감방을 먼저 보여준다. 이를 통해 감독은 수십 년의 평온한 일상 속에서도 상실 되지 않은 채 바위처럼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탈옥의 의지를 보여준다.
탈옥의 과정은 아무도 눈치 못 챘던 의지 다음이다. 오물이 가득한 축구장 서너 개 길이의 하수구를 기어가는 단호하고 과감한 실현은 그 의지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 감독은 막힘없이 펼쳐진 해안을 보여줌으로써 내일이 예상되는 감옥에서의 삶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이 열린 공백의 미래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수감자는 핀업걸 안의 세계에 적응하고 만족을 찾는다. 그곳에서 만족을 못 찾는 수감자라도 대부분은 핀업걸 같은 사소한 쾌락으로 불만과 탈출의 욕망을 대체한다. 체스의 퀸이나 비숍 같은 강한 말이라도 그 규칙과 판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영화 속 수감자들 대부분이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며 법이 정한 시간과 공간을 견뎌낸다.
심지어 그 견뎌냄이 익숙해지면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에 오히려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감옥에서 거의 평생을 지낸 브룩스처럼 그 불안을 못 견딘 끝에 폭력을 행사하여 가두라는 법의 명령을 재차 내려지길 원하기도 한다. 그래서 브룩스의 그 폭력은 탈옥을 위한 폭력이 아니라 그 세계에 남기 위한, 재수감을 위한 아이러니한 폭력이다.
그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런 탓에 교도소는 그가 제일 잘 아는 세계고, 그가 아는 세계의 전부다. 그는 그곳에서 어른이고 전문가고 누구에게나 존중 받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존경과 존중은 그 공간 안에서 얻어진 것이었고 그 덕에 그에겐 조용한 노년이 주어졌다.
그런 그에게 밖으로 나가라는 결정이 내려진다. 그 결정은 핀업걸 밖의 세계로부터 온 법과 공무원에 의해 내려진 결정이었고 그로인해 그는 그 밖의 세계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밖의 세상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핀업걸과 같은 쾌락의 은폐물은 쇼생크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도 핀업걸과 비슷한 무언가로 안온한 일상에 잠복해 있는 권태와 불안을 가리며 살아간다. 더 나아가 불현 듯 엄습하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공포까지 은폐한다. 물론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이에겐 당면한 세계의 일상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누군가 얘기했듯이 인간의 공포가 상상력에 기인한다면, 그 상상 중에 가장 무서운 상상은 이 세상이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상상일 것이다. 심지어 그 상상의 세계가 실존하고, 그 세계에선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외면할 수 없는 계시와 마주할 때 그 공포는 더 극대화 될 것이다.
<다크 시티>에서 외계인을 이겨내고 획득한 진실은 현재 살고 있는 도시가 우주에 떠 있는 거대한 실험도시이고 기억조차 심겨진 것이며 철도의 마지막 역의 그 문 너머에는 늘 가고 싶었던 해변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저 밖이 그저 암흑의 우주이어도 그 마지막 문을 열어 우주를 마주하고 그 빈 우주에 염력으로 바다를 만든다.
<메이즈 러너>의 러너들이 마주한 세계 밖의 세계 또한 그러했다. 모든 러너들이 미로를 탐험하고 다시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을 중지하고 목숨을 걸고 그 미로 밖으로 탈출해서 만난 세계는 종말을 맞은 지구였으며, 그들은 그 지구의 미래를 위한 거대한 실험의 일부였다.
그들은 그 진실과 마주한 뒤에도 좌절하지 않고, 그 탈출의 힘으로 다시 더 큰 탈출과 도전을 도모한다. 이들 탈출은 <트루만쇼>의 완벽한 세계에서의 탈출과 같다. 그 가상의 완벽한 세계를 떠나는 것은 가혹한 현실과 마주하는 것이지만 트루만은 결국 요트가 낸 작은 균열 뒤로 사라진다.
모든 탈출의 가능성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를 동반한다. 결국 신세계의 가능성과 함께 동반되어 오는 공포와 계시를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는 사람, 그래서 핀업걸 너머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앤디 듀프레인 같은 사람만이 탈출을 시도하고, 성공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암석이 수천, 수만 년이라는 시간의 누적 속에 응집 된 결과물인 것처럼 뒤편의 막힌 벽을 작은 조각용 망치와 시간의 힘에 의지해 허물었다. 그 통로는 그렇게 일상의 뒤편, 그 너머에서 묵묵히 형성 되어 왔던 것이다. 변화로 향하는 통로를 뚫는 힘은 그 집요함이고 그 집요함의 유지는 벽 너머의 세상을 향한 끈질긴 갈망을 동력으로 한다. 그 힘으로 이뤄낸 변화는 다른 삶, 새로운 일상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자주 다짐한다. 살을 빼야지, 몸짱 한번 돼 봐야지, 연애를 해야지, 고백을 해야지, 술을 끊어야지, 담배를 끊어야지, 영어를 배워야지 등 다짐의 목록은 끝이 없다. 그러나 의외로 그 다짐을 좌절 시키는 건 내가 구축한 일상이다. 그 일상이 어떤 변화도 바라지 않을 만큼 편할 때, 마치 주말마다 몸을 뗄 수 없을 만큼 몸에 꼭 맞게 형태를 갖춰버린 소파처럼 편할 때, 우리는 그 다짐을 핀업걸처럼 걸어 놓기만 한다.
다양한 이미지 전문 사이트에서 “Workout motivation”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운동에 자극을 주는 사진들이 수천 장 뜨는 걸 봐도, 여기나 저기나 애나 어른이나 다짐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핀업걸이 앤디의 연인이 되어 줄 수 없었듯이, 철마다 바뀌어도 그녀의 손 한번 잡아 볼 수 없듯이 요즘 친구들의 표현을 빌리면, 운동자극 짤, 다이어트 자극 짤은 핀업걸에 불과할 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물론 변화를 위한 다짐을 가로 막는 건 핀업걸만이 아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도 그 길을 막는다. 나를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다른 세계로의 출구를 지키고 서 있다. 영화 <메이즈 러너>의 들판의 리더 갤리가 미로 저편으로의 탈출을 가로막는 것처럼, 그렇게 완고하게 버텨 선채 “지금 이곳도 살기에 충분하지 않냐?”고 반문한다.
집에서 멀리 떠나 그 어떤 드라마틱한 모험을 겪어도 결국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션의 핵심인 <토이 스토리>의 우디처럼, 그리고 모 자동차 광고의 카피처럼 “밖에 나가봐야 별거 없다.”고 말하면서 이 현실에 주저앉히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까이 있다.
탈출을 막는 가장 무서운 적은 가상의 탈출, 유사 탈출이다. <모여 봐요, 동물의 숲>같은. 그 게임에는 2차 세계대전 시기의 Catalina를 닮은 수상 비행기를 운영하는 작은 항공사(dodo airlines)가 나온다. 그 항공사의 슬로건은 “세계로 통하는 하늘의 입구”이다. 그 게임 안에 있는, 섬과 섬 사이를 오갈 뿐인, 그 가상의 세계를 돌아보는 보는 항공사의 슬로건치곤 거창하다.
그 세계엔 일상을 초월한 완벽함이 있다. 성과도 쉽고 그 누적도 쉽다. 집을 사고 꾸미는 것도, 친구를 초대하고 내 쫓는 것도, 섬 곳곳을 꾸미는 것도 쉽다. 그저 묵묵히 게임을 하고 괜찮은 안목만 있으면 된다.
이 잘 꾸며진 세계를, 게임을 하는 아내와 딸의 어깨 너머로 구경하다보면 앞서 말한 <쇼생크 탈출>과 <트루만 쇼>, <다크 시티> 같은 영화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 세계와 이 영화들의 세계는 모두 한정 된 세계, 격리 된 세계, 그러나 내부에선 이루고 싶은 걸 모두 이룰 수 있는 닫힌 탈출의 세계, 제한 된 자유의 세계다.
우리 앞에도 다양한 방해물과 방해꾼들이 있다. 대부분은 그 꿈을 핀업걸이나 게임으로 잠시 덮어놓고 버텨내거나 대체하는 환상을 통해 잠시 위로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미루고 덮어놓고만 살기에는 우리 인생은, 그렇다, 짧다. 이것을 눈치 챈 사람들이, 그 장벽을 넘어, 신세계를 꿈꾸며 탈출 할 것이다.
<모여 봐요, 동물의 숲>의 게임 시작 초기엔 황량한 섬을 꾸미고 아이템을 사들이는 재미가 있다. 그 후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이뤄낸 성과들로 인해 변화가 느려져, 당연하게도 지루해진다. 그때, 게임을 리셋 시킬 수 있고, 다시 황량한 무인도에서부터 게임을 재 시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알다시피 한번뿐이다. 인생은 게임처럼 다시 시작할 수 없다.
법정 스님은 <귀속의 귀에 대고>라는 글에서 마르쿠제를 인용하며 우리의 삶을 풍요로운 감옥이라고 했다. 그 감옥은 워낙 풍요롭기에 감옥에 살면서도 정작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이고,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고 했다. 그 물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하며, 그 물음 속에 답이 있다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물음 속에 답이 있기에 물음이 없으면 해답을 얻을 수 없다. 그 물음은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만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 안온한 일상, 핀업걸로 장식 된 풍요로운 감옥, 그 뒤편에 있는 내가 가려 했던 세계로 갈 수 있고,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다.
그 목소리 속의 목소리를 얻는 법을 뭘까? 근원적인 물음 앞에 서는 법이 있을까? 내가 워하던 세계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철학자 이진경은 <불교를 철학하다.>에서 수행에 대해 “생명이란 이름에 부합하는 것은 그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는 이탈의 선을 기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 그 생명을 가진 존재는 “자신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미결정성의 힘을 가동시켜 관성적인 선에서 벗어나는 선을 그릴 수 있을 때, 새로운 삶의 방식과 다른 삶의 가능성이 그 마음 안에 형성”하게 되는데, 결국 수행이란 그 이탈의 선을 그리는 능력을 증장시키는 것이다.
그 능력이 증장 되면, 신약 갈라디아서에 나온, 율법의 인도에 따라 그리스도에 다다른 이들이 믿음을 얻은 후에는 몽학선생 아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믿음의 여정을 가는 것과 유사한, 그런 다른 차원의 수행의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삶의 방식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향한 탈출이 현실로 만드는 실천은, 결국 풍요로운 감옥이 주는 위안을 등지고, 날 위하는 척하며 소파 옆에 날 앉히는 누군가를 등져버리는데서 시작한다.
그 다음단계는 닫힌 세계의 규칙이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예측 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공백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이다. 앤디 듀프레인이 배관이 뒤 엉킨 위험한 벽 사이와 오물로 가득한 오수관의 암흑을 건넜던 것처럼 말이다.
벽 뒤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뚫는 건 집요한 당신만이 할 수 있다. 그 너머로 탈출하면 “희망은 좋은 거예요.”라고 시작하는 편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편지가 알려주는 데로 가다보면 <기억이 멈추는 곳-지후아타네호>에서 새로운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