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가능한데서 커트를 하는 것이 평소 머리 손질의 규칙이다. 점심시간, 짬을 내 사무실 옆 미용실에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했던 모양인지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허기야 나라도 궁금했을 것이다. 한 남자는 일본 초밥 장인을 연상시키는 흰머리가 성성한 마른 남자고, 다른 이는 강호동과 마동석 그 중간 어디쯤의 인상을 연상시키는 덩치 좋은 사내다. 종종 수상쩍은 장비들을 커다란 지프에 싣고 훌쩍 사라졌다 나타난다. 더구나 작업실은 온라인 마케팅 팀장의 컴퓨터 매장 안쪽에 웅크리고 있어, 길가에선 여간해선 보이질 않으니 그 궁금증은 더 커졌을 것이다. 최근 공업탑 로터리 전광판에 나오는 광고들부터 울산 사람이라면 알만한 영상 몇 개를 말해 줬다.
그렇게 우리의 정체에 대해 한참 듣던 아주머니는 예상보다 바쁘게 사는 내가 딱했던지 불쑥 취미가 뭐냐고 물었다. 독서라고 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요즘 편의점의 새로운 주인공인 국산 하우스 맥주를 하나씩 마셔 보는 것도, 딸내미가 새로 배우는 아이돌 춤을 감상하는 것도, 유튜브에서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보는 것도 취미라면 취미지만 그래도 돈과 시간을 가장 많이 들이는 행위를 취미라고 한다면 단연코 독서다.
아주머니는 독서라는 취미를 듣자마자 무심결에 피식 웃으셨다. 뭔가 역동적이면서 그럴싸한 걸 기대했던 모양이다.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카피라이터나 작가라면 뭔가 색다른 취미를 갖고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렇게 독서가 평범한 취미 취급 받았던 그날 밤, TV에서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영화가 <콜래트럴>이다.
만날 일 없었을 두 남자
이 영화는 살풍경한 도시 담아내기의 장인이자, 남자 배우의 비정함 끄집어내기 장인인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다. 지금도 최고의 시가지 총격전으로 꼽히는 <히트>의 감독이고, 90년대 상남자 영화 중 하나인 <라스트 모히칸>을 연출한 감독이자, 톰 크루즈에게 유일무이하게 악역을 맡긴 배짱 두둑한 감독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빈센트라는 청부살인업자가 LA에서 다섯 건의 살인을 처리하기 위해 고용한 맥스라는 택시 운전사와 함께 밤새 겪는 일을 담고 있다. 빈센트는 다섯 건의 살인을 위해 맥스를 인질처럼 운전사로 데리고 다니며 LA 곳곳을 누빈다. 그 여정의 공간인 택시 안에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고 살인 현장에서 다양한 일을 함께 겪는다.
LA는 못 가봤다. 가본 도시 중 콜래트럴과 어울리는 도시라면 삿포로와 홍콩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는데 실패한다. 맥스가 빈센트에 대해 가장 이해 못했던 점은 사람과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살해에 대한 죄책감이 부재 한다는 점이다. 그 의문에 대해 빈센트는 “LA의 지하철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6시간 동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비정한 뉴스로 대신 답한다. LA라는 큰 도시에서 한 사람이 죽는 게 뉴스가 되는지 되물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뉴스로 다뤄지지 않는 대도시의 비정함은 빈센트를 닮아 있다. 빈센트에게 한 사람의 생명은 임무 완수와 그 대가로 받는 자본의 출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에게 살인은 비즈니스고 사람의 생명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카지노의 칩일 뿐이다.
실행, 그 다른 뜻
빈센트의 이런 사람에 대한 비정한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평범한 단어로 포장 되어 우리의 일상 속에 내재되어 있다. 얼마 전 김누리 교수가 한 강연 프로그램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민주화 이후에도 사람을 나라와 도시, 기업의 자원으로 보는 것을 어색치 않게 여겼다. 현재 한 기업의 채용관련 공식 블로그의 제목도 “사람이 자원인 나라.”라고 되어 있다. 김누리 교수의 말처럼 우리사회는 지난 백 년간 존엄한 인간을 키우는 교육에 대해 생각할 틈 없이 오직 빈센트 같은 심장을 가진 “유능한” 인재들을 키우는데 집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인재들이 만들어낸 지금의 사회를, 김누리 교수는 능력 중심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메리토크라시 사회라 불렀다. 그 사회를 살아가는 미래의 인재들은 수능 결과에 따라 대학이 달라지고 그 한 번의 결과에 따라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수많은 임무의 실행을 통해 얻어지는 측정 가능한 지표로 이뤄지는 것 또한 당연시 여기며 살아간다.
밀덕인 온라인 마케터인 해성씨가 새로 주문한 장난감 총. 15만원. 아무도 죽이지 않는.
필자가 카피라이터 일을 막 시작했을 때 “실행”이란 단어가 마케팅 분야의 주요 화두였다. 물론 지금도 한 온라인 서점에서 “실행”을 검색하면 4백여 권의 책이 뜨고, 경영 분야로만 국한해도 2백여 권이 된다. 빈센트 같은 킬러에겐 실행은 가장 중요하다. 사람의 생명, 처지와 상황, 입장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아무리 이러저러한 사정을 늘어 놔도, 하소연을 해도 해가 뜨기 전에 실행을 해야만 한다. 빈센트의 유능함과 전문성, 킬러로서의 시장 가치는 바로 이 단호한 실행력에 기인한다.
실행자는 영어로 번역하면 Executioner로, 사형집행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근대 이전까지는 칼이나 도끼로 직접 사형수의 목을 치는 사람,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망나니를 이렇게 불렀다. 직업으로서의 살인을 하는 빈센트는 어찌 보면 21세기의 망나니라고 할 수 있다. 단지 훨씬 더 효율성을 추구하고 더 고비용을 청구할 뿐.
실행자이자 가차 없는 집행자인 빈센트에게 맥스는 어떤 사람으로 평가 될까? 맥스는 우연히 택시에 탄 여자가 맘에 들었어도 그 호감 표시조차 망설인다. 막상 받은 명함으로 그녀가 변호사임을 알자 통화는 자연스레 포기 된다. 12년 째 꿈꾸는 리무진 서비스 사업도 자동차 계약을 미루면서 여전히 조심스러워한다. 빈센트 입장에서 이런 맥스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실행하지 못한 실패자, 루저다. 빈센트는 그런 맥스에게 “남은 평생 후회하며 TV드라마나 보다 죽을 것.”이라고 악담한다.
왜 실행자에게 주눅 드는가?
우리 주변에 맥스 같은 사람은 흔하다. 우리 주변의 맥스는 빈센트 같은 가족이나 친구, 선배, 지인에게 빈센트의 악담의 순화 된 버전을 자주 듣는다. 들어도 그 말에 반론을 하지 않거나, 심지어 당연히 여긴다. 왜 다들 쉽게 충고하고 당연히 들을까? 지금 뭔가 하고 있거나 성과를 낸 사람은 맥스 같은 사람에게 자신 있게 설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지금 성과를 내고 있는 사람은 지금 아무런 성과를 안 내고 있는 사람에게 성과를 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측정 할 수 있는 성과만이 성과라 여기는 사람은 그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에게 제대로 된 성과를 내라고 재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보다 더 나은 일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 좋은 직업이나 직장을 찾아보라는 충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이 사회의 암묵적인 가치관이다.
그러나 A를 하는 사람이 B를 하는 사람을 비웃을 수는 없다. 직업이든 취미든 A를 하는 사람이 B를 하는 사람보다 인간적으로 더 나은 존재라고 할 수도 없다. 또 A라는 실행의 성과 측정과 B라는 일의 성과 측정이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인생의 평가가 그러하듯 말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 다르게 태어나 다른 적성을 타고 났고, 다른 재주를 갖고 있다. 또 설령 같은 적성과 재주를 갖고 있다하더라도 누군가는 단지 그걸 끄집어내줄 기회를 못 만났거나, 특정 교육을 받을 형편이 안 됐는지도 모른다. 이런 전후좌우 사정을 고려 안하는 빈센트 같은 이들에겐 이 시대에 만연한 실행자와 성과자에 대한 칭송과 그것이 탄생시킨 차별적 자부심, 그 자부심을 당연시하는 범사회적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괴물, 또는 프랙탈
그래서 이런 실행과 그 완수를 기준으로 다른 이를 과감히 비판하는 빈센트의 논리는 오찬호의 책 속에 등장하는, 학교 이름과 학과 이름이 큼직하게 새겨진 점퍼를 벗지 못하는 이 시대 청춘들의 논리와 유사하다. 그 논리는 앞서 말했듯, 한국전쟁 후의 고도성장기,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었던 성과의 절대적 신성함에서 잉태 됐다. 그 신성함은 자기개발서/계발서라는 성전(聖典)의 남발 속에 우상화 되어 21세기의 젊은 세대에게까지 추앙받고 있다. 지금도, 그 추앙과 우상이 어우러진 종교는 빈센트를 꼭 닮은 괴물을 꾸준히 만들어내고 있다. 오찬호가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말한 괴물, “취업 준비를 위해 당연히 위장병이 걸려야 하는, 그리고 그것조차 이겨내야 하는 괴물이 취업하는 사회”를 당연시하며 받아들이는, “차별에 찬성”하는 괴물 같은 성도를 계속 만들어내 온 것이다.
이 괴물은 벨기에의 임상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파울 페르하에허가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는가.>에서 말한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 인격을 지닌 빈센트 같은 인간은 능력주의를 가장 큰 덕목으로 삼는 이 시대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당연해진 이 시대의 인간은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Bifo“ 베라르디가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기호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정보노동의 정신병리>에서 지적한 것처럼 노동의 프랙탈화 속에 살아간다. “프랙탈화란 시간-활동의 파편화를 의미”하는데 이는 노동자가 더 이상 한명의 사람이 아니라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존재”로 전환 될 수 있는 존재임을 뜻한다.
십여 년 전에 던진 베라르디의 이 말은 공교롭게도 플랫폼 노동자라는 신조어 속에 절묘하게 녹아들어, 미화 된 새로운 옷을 입은 채 불현 듯 우리에게 왔다. 문을 열면 치킨 봉지를 들고 서 있는 익숙한 그들은, 한병철이 이름 붙인 “자기 착취 시대”에 살면서 성과와 실행의 덫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스스로를 구속하며 해가 뜰 때까지 스마트폰이라는 총을 든 채 온 종일, 그리고 한밤까지 낡은 스쿠터를 타고 배회하고 있다. 빈센트가 완벽한 실행을 위해 관통력이 좋은 독일제 권총인 H&K(Heckler and Koch)사의 UPS 45구경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당연한 사회
최후의 총격전, 맥스의 총알은 객차의 문을 뚫고 건너편 빈센트를 관통했다. 반면 맥스가 일부러 일으킨 교통사고 때 자신의 총을 잃어버려 빌딩 경비원의 S&W(Smith & Wesson)의 9mm 권총을 사용했던 빈센트의 총격은 객차의 문을 뚫지 못한다. 오직 자신의 완벽한 실행과 성과를 위해 최상의 충격을 주는 고성능 권총을 사용했던 빈센트가 타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 총을 훔쳐든 맥스에 의해 그 권총으로 죽게 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은유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결국 킬러 빈센트는 소시민 맥스의 총에 죽는다. 맥스는 살인은 고사하고 그저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왔던 사람이다. LA 시내 곳곳의 시간대별 도로 상황을 꿰뚫고 있다. 병문안에 흔한 꽃다발 하나 못 사들고 가지만 아픈 어머니도 잘 모시고 나름의 사업 계획도 갖고 있다. 빈센트의 입장에서 보면 시시한 일상이고 실행 없고 성과 없는 삶일지 모르지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성실히 살아냈던 사람이다. 그 성실함을 지탱해온 그 내면의 강직함은 총 한번 들어보지 못한 그에게 총을 들게 했고 여변호사와 함께 킬러를 피해 도망 갈 수 있게 했다. 최후엔, 비록 눈을 감고 쐈을지언정, 빈센트를 향해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기게 했다.
모두가 꺼려하거나 상대적으로 가벼이 여겨지는 어떤 일을 누군가가 함으로써, 그 누군가가 감당하는 작은 톱니바퀴 때문에 이 세계는 원활히 굴러가고 있는지 모른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이 타자에 대한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사회에 보편적으로 수용되기 위해서는 김누리 교수가 강연과 책에서 주장한 교육, 디그노크라시(Dignocracy=Dignity+Cracy)의 길로 나아가야 가능할 것이다.
이 존엄함의 시작은 우리 모두 <쿵푸 허슬>의 주인공처럼 그 안에 서로 다른 나름의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는데서 출발할 것이다. 그 출발의 엔진은 그 인식과 인정을 자기 자신의 인생에게 먼저 보내는 것으로 시동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 봄에 피는 꽃이 있으면 여름에, 또 가을에, 심지어 겨울에 피는 꽃이 있는 것처럼, 맥스처럼 12년을 기다리며 준비해온 당신의 꿈이, 어쩌면 조만간 꽃 피울지 모른다. 안으로 꿋꿋이 뿌리내려온 대나무에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퀀텀 리프의 순간처럼 말이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우리의 존엄함을 잃지 않도록 스스로, 또 서로를 격려하며 버텨내야 할 것이다. 나와 다른 존재의 다름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있음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 <영화의 위로> 풀 버전은 주 2회, 매주 월/수, 오전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