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위로 2 - 업(up-2009)
올 봄, 학교를 가지 못하던 아홉 살 딸과 <업>을 다시 봤다.
모든 만화 채널이 집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한창 분발하던 때였다.
<업>은 소박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해서 집에 잔뜩 풍선을 메달아 날아간 곳에서 겪는 모험으로 전개 됐다가 종국에는 보이스카우트 소년과 일상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모두들 그렇듯이 나 또한 전개와 절정 부분의 파라다이스 폭포 인근에서의 모험만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감염병에 등교를 뺏긴 아홉 살 딸과 나란히 앉아 보는 <업>은 다르게 다가 왔다. 특히 모험의 앞과 뒤가 전혀 새롭게 다가 왔기에 이런 의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할아버지의 진짜 모험은 다른 게 아니었을까? 폭포에서의 모험보다 더 큰 모험이 있지 않았나?
할아버지의 첫 번째 모험 - 한 사람을 사랑했다.
할아버지의 모험은 언제 시작됐을까?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소년 <칼>은 모험을 꿈꾸는 동네 소녀 <엘리>를 만난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사랑을 가꿔온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어린 시절 함께 모험을 꿈꿨던 폐가를 사들여 가꾼다.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는 결심을 하고 미리 아이 방을 꾸미지만 병원에서 임신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 남편 <칼>은 아내 <엘리>를 위로하기 위해 어린 시절 열렬히 좋아했던 모험가 찰스 먼츠의 마지막 행선지인 파라다이스 폭포로 모험을 떠나자고 한다.
이를 위해 이들은 커다란 유리병에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맘대로 되던가. 돈이 좀 모일라치면 자동차가 고장 나고, 병에 걸리고, 집에 수리할 곳이 생긴다. 그렇게 일상을 버텨내고 맞은 노년, <칼>은 <엘리>에게 남미행 비행기 티켓을 깜짝 선물하기 위해 늘 가던 언덕으로 피크닉을 가며 도시락 가방에 티켓을 숨겨 놓는다. 그러나 <엘리>는 그 작은 언덕조차 다 오르지 못한 채 쓰러지고, 얼마 후 병상에서 숨을 거둔다. 이 일대기가 영화에서는 단 5분으로 압축 된다. 그러나 이 5분 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과 모험이 서려 있다.
화제가 됐던 KCC 스위첸 광고를 떠 올려 보라. 4년을 같이 살았는데 맞는 게 하나도 없다. 광고 제목 자체가 <문명의 충돌>이다. 맥주 안주 하나조차 합의 안 된다. 여자는 치킨, 남자는 골뱅이 무침. 십 여 년 전 유행했던,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스탠딩 개그가 저절로 생각날 수밖에 없다.
“결혼은 정말 힘든 거야.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어. 그것도 두 번이나. 그 뜨거운 남아프리카의 감옥에 27년이나 있었고 그동안 강제 노역과 고문도 겪었는데 출소 후에 이혼했다고.”
이 멘트에 공감한 미국인들 사이에선 #Marraigeishard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했다.
<칼>과 <엘리>는 이 결혼 생활을 평생 유지했다. 게다가 둘은 한 직장에서 평생 같이 일했다. 그렇다. “한 직장에서 평생”이다. 이보다 더한 모험이 있을까? 또 모두들 흉가라고 피해 다니던 집을 사들여서 둘만의 힘으로 고쳐 살았다. 임신과 출산을 결심했으나 불가능하다는 절망도 겪었다. 그 절망 뒤에도 둘은 함께 남은 생을 살아냈고 아내가 먼저 병으로 떠났다.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모험이 있을까? 할아버지 <칼>과 <엘리>의 가장 큰 모험은 결혼 생활 그 자체였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의 두 번째 모험 - 깊이 애도 함
두 번째 모험은 애도다. 할아버지 <칼>은 슬퍼하고 기억하기로 결심했다. 그 기억의 터전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데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단의 완수를 위해선 나이 들어가며 희미해지는 기억력과의 투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 승리를 통해 확보하는 건 존재하지 않는 이와 동행하는 삶이다.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의 주제도 이와 비슷하다. 주인공 시즈토는 친구 겐지의 사후 1주기를 기억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애도 여행”을 떠난다. 신문과 잡지를 뒤적여 부고와 사망 기사를 찾아내, 그곳에 가서 낯선 망자를 애도하는 것이다. 아무런 관계도 없고, 사연도 없는 누군가를 말이다. 그는 낯선 타자의 죽음을 반복하여 애도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이미 없는 존재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진다. 이를 통해 친구에 대한 기억을 삶에 붙들어 매어 그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자신의 삶과 동행 시킨다.
<칼>은 애도를 위해 머문다.
사랑했던 사람과 평생 함께 살았던 공간을 지켜낸다. 거대한 건설 업체가 수시로 집까지 찾아와 팔라고 종용 해도, 쇼핑센터와 아파트 단지가 지척에 올라가도, 사진 액자와 가구, 자잘한 모든 소품까지,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단호히 지켜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기억의 단서와 유산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다룬 미국 영화에서 그 집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사진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거실 벽은 물론이고 사진을 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미국에 사시는 필자의 어머니의 집에는 정작 본인한텐 없는 카파라이터 1년 차 때의 사진이 걸려 있을 정도다. 이런 사진은, 바르트 식으로 표현하면, 죽은 시간의 지층을 켜켜이 만들어줘서, 이 지층을 통해, 백상현의 표현을 빌리면, “노스탤지어가 주는 시간의 미래성”을 확보해준다.
어디 사진만 그런 힘을 갖고 있겠는가. 집 안팎의 모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제단이자 기념관이고, <칼>은 그곳의 유일한 제사장이다. 애도는 살아남은 이의 삶을 풍요롭게 해줬던 그 “사람”에 대한 예의이다. 그리고 둘의 관계 속에서 값없이 받았던 빛나는 행복과 함께 쓴 인생이라는 이야기의 순간을 매일 새롭게 꺼내 회상하고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 전시하는 것이다. <칼>이 포치에 종일 앉아서 한 것은 바로 그 행위였고, 그것은 침묵으로 쓰는 애도일기였다.
할아버지의 세 번째 모험 - 미래와 스스로를 구원함
할아버지 <칼>의 최고의 모험은 자신보다 여린 존재, 꼬마<러셀>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 터져버린 풍선들로 인해 집이 더 이상 날지 않자 집의 무게를 줄이려 가구들을 내다 버린다. 도움이 필요한 약자를 위해 애도의 성전을 기꺼이 허문 것이다. 견고한 일상을 뒤흔드는 이 결심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다. 우린 종종 출퇴근길이나 휴가 중에 우연히 부상자나 의식 불명이나 호흡 곤란에 처한 낯선 이를 구한 의사나 간호사, 경찰관, 소방관, 심지어 그냥 평범한 직장인인 이웃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광경을 본 많은 사람 중에서 구하고자 “결심”한 사람만이 생명을 구하는 모험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험의 순간에 발휘 된 인간애와 성품은 한 인간이 의지를 갖고 착실히 쌓아 온 결과라는 것이다. 마치, 우치다 타츠루가 말했듯이, 무지(無知)가 “알고 싶지 않다, 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 결 같이 노력해온 결과”이고,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마지막, 소년에게 휘장을 달아주던 영감님을 보면서 불쑥 <여인의 향기>의 청문회 장면이 떠올랐다. 교장 선생님 차에 장난을 친 사람을 목격한 찰리에게 하버드 대학 추천을 미끼로 그 친구들의 이름을 불으라던 교장이 결국 전교생 앞에서 청문회를 하는 장면 말이다. 그 청문회에선 부자이자 학교에 많은 기부를 한 아버지를 동반한 채 눈이 안 좋다는 핑계로 정확히 보지 못했다는 단서를 달고 친구들의 이름을 고발한 조지와 그로인해 혐의를 벗은 악동들과는 달리 끝까지 증언하지 않은 찰리에게만 징계가 주어진다.
이 때 찰리를 위해 맹인 퇴역 장교 슬레이드가 변호를 시작한다. 찰리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친구를 팔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이다. 슬레이드의 변호는 죽음을 향했던 충동적 모험을 끝내고 다음 세대와 스스로를 구원하는 제2의 인생을 향한 모험의 첫 단추가 된다. 군인으로서의 생명을 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칩거의 시간, 그 시간에 가졌던 긴 애도 기간과 그 기간 끝에 마주한 절망, 그 절망의 마무리를 위해 자살로 향해가던 노병은 저 영감님처럼 마지막 모험, 다음 세대를 구원하는 선(善)이라는 모험을 실행함으로서 소년의 미래를 바꾸고, 자신의 미래를 새로 연 것이다.
새로 주어진 미래, 그 삶에 대한 예감은 두 영화의 엔딩에 나온다. 영감님은 애도의 공간을 나와 미래가 창창한 소년의 소소한 모험의 파트너가 된다. 미뤄뒀던 모험, 모험가의 인생을 모든 순간이 모험인 어린 파트너와 시작한 것이다. 슬레이드는, 영화와 소설 <향수>가 웅변하듯이, 인간의 조건 중 하나인 향기를 화두 삼아 낯선 여성을 향해 먼저 다가가며 인생 2막의 서곡을 연주한다.
우리 모두는 모험가다.
모험의 한자 무릅쓸 모(冒)는 눈을 무언가로 가린 모양이고 험(險)은 높고 가파른 절벽을 의미한다. 한자에서 보듯 눈에 뻔히 보이는 위험을 마치 안 보이는 것 마냥 감당하는 것이 모험의 본질이라면, 우리 곁엔 이미 모험가가 넘쳐난다. 해병대 가면 고생할 것을 알지만 몇 번씩 떨어져가며 자원해서 간 청춘도, 위험과 고생길이 훤히 예상되는 대구로 앞장서 달려갔던 의료인도 모험가다. 낯선 온라인 수업을 받아들이고, 불안하고 걱정되지만 학교에 보냈던 모든 학부모들과 그 아이들을 온전히 지켜내며 성실히 가르치신 선생님들도 모험가다. 그 모험가들, 삶 속에서 충실히 “뭔가”를 안으로 차곡차곡 다져온 평범한 모험가들 덕에 우린 사상 초유의 위험을 이겨내고 있다.
사람은 살아내면서 스스로 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고, 일상의 어느 순간을 전환점이라 스스로 칭할 수 있는 존재며, 일상의 어느 순간을 성장의 마디로 짚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타자를 향한 모험을 할 수 있고, 인생을 바꾸는 이전에 하지 않았던 선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오지에서 찍는 <정글의 법칙>과 도가니를 희생하고 족저근막염을 감수하는 국토 대장정만이 인생을 바꾸는 모험은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야만 깨달음을 얻고 달라진 나를 만난다면 스님들의 하안거는 진작에 지리산 종주로 대체 됐을 것이다. 여행부심에 치이면서, 꽉 막혀버린 국제노선에 한탄하면서 언젠가 떠나리라 다짐하고 있다면 이 영화를 찬찬히 보기를 권한다. 그저 인생의 작은 결단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모험가가 될 수 있다. 내 이웃의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모험만으로도 우리는 나와 이웃, 모두에게 다른 인생을 선사 할 수 있는 모험가가 될 수 있다.
모험은 지금 여기에 있다. <업>의 엔딩 크레딧에서 꼬마<러셀>과 할아버지<칼>이 인근 공원과 하천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장면이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인생 자체가 모험이고 모험의 장소와 순간은 늘 우리 곁에 있다. 그 모험은 성실히 반복해 온 일상과 그 일상이 빚어낸 고유의 인격이라는 도자기의 울림이 만들어낸 결단으로 탄생한다. 노년의 <칼>과 퇴역 장교 슬레이드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린 이미 모험가다. 처음 사는 인생이라는 모험을 그럭저럭 해내고 있고, 꽤 오랫동안 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유지하면서 <문명의 충돌>이라는 모험을 통과하고 있다. 게다가 “평범한 모험가”인 당신은 누군가에겐 가장 탐험하고 싶은 매력적인 미지의 세계다. 현대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이 네온으로 만든 문구처럼 말이다. “내 마지막 위대한 모험은 너야(The Last Great Adventure is You).”
※ <영화의 위로> 풀 버전은 주 2회, 매주 월/수, 오전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