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힘, 극장의 힘
영화의 위로 6 . 시네마 천국(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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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8. 2021
옛날 사람, 옛날 극장을 그리워하다.
올 가을, 감독과 로케이션 헌팅을 하다 코스모스 밭을 지나쳤다. 잠시 후 감독의 입에서 “한들한들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하는 흥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웃음이 터졌다. “와 그라는교?”, “아니 나는, 코스모스~ 피어 있는~, 할 뻔 했거든. 이야, 우리 진짜 옛날 사람이다.” 그렇게 둘이 잠시 웃었다. 옛날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가 코스모스를 보면 떠올려지는 노래를 흥얼거릴 때뿐이던가.
개봉이 어려운 탓인지, 개봉을 해도 관객이 많이 못 들어오는 환경 때문인지 최신 영화들이 너무 빨리 IPTV의 VOD 서비스로 제공된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갔는데 개봉도 안한 영화들이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로 직행한다는 뉴스를 보니 뭔가 모를 아쉬움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영화가 처음 세상에 나오는 걸 개봉이라고 부를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면 너무 옛날 사람 같은 걸까 하는 마음도 들었을 때, 그런 심난한 마음을 위로해줄 영화가 떠올랐다.
시네마천국 - 영화의 힘을 말하다
<시네마 천국>은 영화와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영화관이라는 장소와 그곳에서 성장한 사람이 결국은 유명 영화감독이 되는, 덕업일치의 동화 같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영화관 시네마 천국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은 알프레도와 토토, 그리고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 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이고, 알프레도에겐 인생과 눈까지 희생하며 지켜온 장소, 토토에겐 첫사랑의 아픔이 되고 영화감독의 성공의 자양분이 됐던 장소다. 그러나 떠난 후 30년 만에 찾아온 고향의 영화관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시칠리아의 작은 섬 마을에도 TV는 밀려들어 왔고 VHS의 물결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영화가 영화관보다 맷집이 좋다. 단관 영화관이 비틀거릴 때도 영화는 잘 싸우며 버텼으니 말이다. 버글스(Buggles)는 "Video Killed Radio Star"라고 노래했지만 정작 비디오가 죽인 건 영화가 아니라 영화관이었다. VHS와 DVD가 나올 때도, 일본 문화가 개방 됐을 때도 어김 없이 영화 산업이 어려워질 거라는 말을 했었다. 심지어 케이블 TV가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던 90년대에는 누가 영화를 보러 나가겠냐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 휘청거린 건 블록버스터 같은 대여점이었다. HBO의 등장과 케이블 영화 채널의 다양함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혹자는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망했다고도 하기도 하는데 어찌됐든 영화를 빌려다보는 시대도 막을 내린 것이다. 비디오 대여의 시대가 저문 후 영화는 멀티플렉스와 함께 천만 관객 영화가 흔해지는 아이러니한 시대를 열었다.
이 격변 속에서도 영화는 연인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자동차 극장에서, VHS로, 멀티플렉스에서 다시 넷플릭스로 이어지며 그 장소와 미디어는 변해갔지만 영화는 늘 데이트의 중심에 있었다. 영화의 힘은 그렇게 세다. 이 힘센 영화가 가진 힘의 원천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다만,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건, 노스탤지어 아닐까? <시네마 천국>이 우리에게 말한 것처럼.
영화관 - 영화가 머물고 싶은 곳
70년대 학번인 어머니는 단성사와 스카라에서 영화를 봤고, 당시 2부로 나눠서 상영하던 <벤허>를 1부만 보고 나왔다는 에피소드를 나에게 들려주고는 하셨다. 어린 시절 잠시 쌍문동에 살았었다. 아버지는 대로변 건물 2층에서 태권도장을 하셨는데 그 건물 뒤에 천지 극장이 있었다. 조금만 내려가면 동광극장이 있었고, 버스로 몇 정거장만 가면 대지극장이 있었다. 4대문 안에서 개봉한 영화들은 대지극장-동광극장-천지극장 순으로 내려 왔다. 개봉관, 재개봉관, 동시상영관을 거쳐 내려오는 것이었다.
의정부에서 십대를 보낼 때는 복합 상영관이 막 시작됐었다. 당시 의정부 극장, 중앙극장 등은 크지도 않은 공간을 둘로 쪼개 1관, 2관으로 나눴고, 20대를 보낸 평택에서도 작은 스크린 앞에서 수많은 영화를 봤다. 대전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쯤 본격적인 대기업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렸고, 서른이 넘어 자칭 타칭 영화의 도시 부산에 살게 되면서부터, 영화관과 서먹해졌다.
혹자는 영어 movie와 cinema를 구분하면서 무비는 어떤 미디어를 통해서 봐도 무비이지만 시네마는 영화관을 떠나면 시네마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 주장에 공감한다. 오랫동안 내게 있어 영화관은 비어 있는 곳을 칸막이 쳐서 여러 영화를 상영하는 단순한 기능적 공간(空間)이 아니라 그곳에서 수행된 관객과 영화, 그리고 관객과 관객 사이에서 오간 수많은 이야기로 채워지는, 우리네 장터와 같은 장소(場所)였기 때문이다.
노스탤지어 - 영화, 사람, 그리고 영화관
그래서인지 여전히 단관 영화관이 그립다. 스크린에 비가 내려도, 지정좌석제가 아니어도, 철지난 영화라도 삼류 영화관에서 수명을 연장하며 걸리던 시절이 그립다. 그 그리움은 단순히 영화나 영화관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다.
그 그리움은 각기 다르게 생긴 단관 영화관의 풍채와 그 영화관이 버티고 서 있던 거리, 연인과 팔짱을 끼고 그 거리를 함께 걸었던 기억, 그리고 영화관에 들어가 꼭 붙어 함께 영화를 보던 둘만의 기억이 엉겨 붙어 만들어낸 콜라주 같은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은 영화가 사람과 장소와 합심하여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주던 시절의 그리움이고, 단관 시절의 영화관만이 가진 아우라이자 노스탤지어다.
네게도 사람과 영화관과 어우러져 간직 된 흑백 사진 같은 영화들이 있다. 소피 마르소의 <유 콜잇 러브>는 십대 시절, 어느 해 식목일, 의정부에서 봤고,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은 대전의 중앙극장에 봤다. 박신양의 <약속>은 대전에서 성미랑 추운 겨울에 봤고, <레옹>은 평택의 작은 영화관에서 지혜랑 봤다. 영화가 끝난 뒤 찾아간 허름한 전통 찻집도 연이어 생각난다. 심지어 그때 뭘 입었고 같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생각난다. 성미는 애가 안 생겨서 걱정이라고 전해 들었는데, 얼마 전에 아들을 낳아서 이제 겨우 유치원을 갔다고 들었다. 지혜는 남편이 사업을 대차게 말아 먹었다는 소식을 부산에 놀러온 평택의 아는 형님을 통해 들었는데 잘 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만하자 옛 사람 이야기는. 그나마 다행히 <친구>는 아내와 함께 부산 MBC 홀에서 봤다.
<중경삼림>을 안 봤어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갔을까?영화는 힘이 세다
다시 말 하건데, 영화는 이렇게 힘이 세다. 얼마 전 공중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사람이 들어오면 센서로 작동되는 것이었다. 손을 씻는데 익숙한 멜로디가 흘렀다. 나도 모르게 허밍으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아네트 베닝과 원렌 비티 주연으로 리메이크 된 <러브 어페어>의 테마 음악이었는데, 영화 속에서도 아네트 버닝의 허밍이 멋지게 나온다. 이 영화가 좋아 원작도 챙겨 봤었다. 보통은 원작에 나온 배우가 더 멋있다고 쉽게 손을 들어줬는데 게리 그란트와 워렌 비티 모두 클래식한 멋이 있다. 숀 코널리와 피어스 브로스넌이 모두 007의 클래식함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렇게 옛날 사람이 됐다. 우연히 옛 영화의 주제곡을 들으면 무심결에 허밍으로 따라 부르는, 시네마 키드에서 어른으로 커 버린, 단관 영화관이 그리운 옛날 사람이 됐다. 영화가 한명의 사람이라면 그도 옛날 사람이 돼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영화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영화 <더 레슬러>의 주인공 ‘더 램’이 심장이 안 좋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끝내 소도시 변두리의 링을 떠나지 않으려했던 것처럼, 영화도 할 수 있는 한 전력을 다해 모든 소도시의 아주 작은 영화관을 찾아 떠돌고 싶지 않을까? 아무리 TV 화면이 커지고 돌비 사운드가 거실을 울려도, 리클라이너 소파가 삼류 영화관 좌석보다 백배는 편하더라도, 영화는 영화관이라는 장소에서 마지막까지 상영되며 수명을 다하고 싶지 않을까? 그래서 영화를 본 마지막 한명에게까지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되길 바라지 않을까?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 토토는 신부님의 검열로 잘려나간 키스 장면의 조각 모음을 본다. 그 필름 안에 담긴 파편적인 키스의 모음을 보면서 어른 토토는 운다. 조각난 키스들의 이음이 그가 잊고자 했던 시절의 추억, 덮어두었던 추억들을 순식간에 필름처럼 이어, 조각보처럼 펄럭이게 했기 때문이다.
키스 장면을 보는 동안 그가 정말 보고 있었던 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영화관, 놓쳐 버린 첫사랑, 인생의 스승인 알프레도에 대한 추억, 그 모두가 어우러진 노스탤지어였다. 스마트 폰이나 VOD, 넷플릭스로 본 영화가 과연 십년 후, 이십년 후에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나부끼게 할 수 있을까? 다시 본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남겼다.
중고로 산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서 필름이 떨어졌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온 비행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