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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손에 잡히도록

영화의 위로 7. 스노우맨(1982)

by 최영훈

어쩌면 어른을 위한 동화

작년, 갑자기 추워진 11월의 등굣길이었다. 딸은 집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집에 가서 미키마우스 이불로 들어가고 싶어."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지난 금요일, 월요일 아침에 교장 선생님이 직접 상장을 주는 관계로 담임선생님이 8시 30분 전에는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던 터라, 꾹 참고 걸어갔다.


박물관 옆길로 접어들었을 때쯤, 추워진 날씨를 핑계 삼아 <겨울왕국>을 빼고 겨울하면 떠오르는 영화를 물었다. 딸은 잠시 생각하더니 “스노우맨?”이라 말하며 날 올려다봤다. 다른 겨울 영화가 간직되어 있는 딸이 달라 보였다. 겨울 대표 영화가 <겨울왕국> 밖에 없는 초등학생은 <러브 액츄얼리>나 <나 홀로 집에> 말고는 다른 겨울영화를 떠올리지 못하는 어른하고 비슷하니까.


<스노우맨>은 1982년에 나왔다. 원작은 1978년에 출간된 레이먼드 브리그스의 그림책이고 시나리오 각색도 저자가 했다. 흔히들 원작을 그대로 옮겼다는 말을 쓰곤 하는데 이 영화야말로 그렇다. 나중에 서점에서 책을 보고 움직이는 그림책이라는 표현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은 25분가량의 러닝타임 내내 대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 시간을 온전히 음악으로 채운다. 오페라나 송 스루 뮤지컬처럼 모든 상황이 음악으로 설명되는데 그나마도 가사가 있는 노래는 딱 하나다. 바로 눈사람 나라로 날아갈 때 나오는 그 유명한 <Walking In The Air>. 이 영화를 모르는 사람도 노래 전주만 들어도 “아 이 노래.”할만한 노래다. 마치 머라이어 캐리의 그 노래처럼 말이다.


칼럼을 쓰기 위해 대학 시절 처음 본 <스노우맨>을 세 번째로 봤다. 처음 봤을 땐 조카가 옆에 있었다. 유치원생이던 조카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외가인 평택에 와 있었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 즈음, 함께 보려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이 영화를 빌려 왔었다. <공각기동대>와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현란함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었다. 그 사이 세상이 좋아져서 조카와 처음 봤을 땐 VHS였던 것이, 딸과 볼 때는 DVD로, 이젠 VOD로 볼 수 있다.

KakaoTalk_20211213_090049832_01.jpg 아직도 집에 DVD가 있다.

다시 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어른 영화인가?’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어느 날 폭설이 내린다. 소년은 옷을 챙겨 입고 마당에 나가 눈사람을 만든다. 그날 밤, 눈사람은 깨어나고 소년은 눈사람과 함께 마당, 집, 겨울 들판을 오가며 각종 모험을 한다. 이후 눈사람과 함께 눈사람 나라의 파티에 초대되고 그 파티의 주인공으로 온 산타 할아버지에게 눈사람이 잔뜩 그려진 머플러를 선물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눈사람은 마당에 우뚝 서 있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소년은 잠든다. 다음날 아침, 눈사람은 녹아 없어졌고 선물 받은 머플러는 나이트가운 안에 남아 있다. 이런 얘기다.


이 영화엔 두 개 버전의 도입부가 있다. 최초의 TV로 방송되던 때의, 먼지 쌓인 다락방의 책상 서랍에서 눈사람 머플러를 꺼내보며 추억을 돌이켜 보는 데이비드 보위 버전의 도입부와 저자인 레이몬드 브리그스가 스산한 겨울 숲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날을 회상하는 독백이 흐르는 도입부다.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도입부도 없는 버전을 보지 않았을까? 필자가 다시 본 VOD 버전에도 없었다. 두 사람이 나온 도입부를 찾아서 보고 나면 어떤 버전이든지 간에 ‘이 영화 역시, 어른 영화인가.’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추억은 추적 되는 것

우린 추억을 만든다고 표현한다.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표현이다. 지금 어떤 행위를 하면서 과거에 추억할 거리가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자 추억(追憶)의 추는 어떤 존재가 사라진 후에 쫓아간다는 뜻이 있다. 이 한문을 해석한 글을 찾아보니 산이나 언덕 너머로 사라진 짐승이나 적을 쫓는 발걸음을 표현한 단어라고 한다.


그렇다면 추억이라는 말은 이미 사라진 뭔가를 흔적과 기억을 바탕으로 차근히 추적하여 그 모양새를 되살려 지금 이 순간 다시 꺼내 보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니 지금 하는 일이 추억이 될지 안 될지는 지금 이 순간이 먼 훗날 쫓아 추적 될 만한 그 모양새를 만들고 그걸 추적할 흔적을 남길는지 여부에 달린 것이지, 지금 만들겠다는 의지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추억을 두 사람이 공유하기 위해 함께 추적하려면 그 흔적을 쫓는 단서와 경로가 유사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래 산 부부들이 명절 때 종종 과거지사를 얘기하다 각기 다른 기억으로 인해 싸우는 것처럼, 기껏 꺼내놓은 추억 때문에 서먹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인이나 부부의 강렬한 추억은 오랫동안 시공간을 공유한 두 사람이 만들어낸 기억될 만한 선명한 사건이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선 둘만 있는, 둘만 아는 시간과 공간일수록 좋을 것이다. 브리그스의 도입부에 나오는 독백처럼 마법 같은 순간, 즉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순간이어야 더 좋을 것이다.



추억, 그 이전에 사랑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청춘의 사랑이 시작되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영화의 에피소드 대부분은 소년의 일상 공간과 소품들로 채워진다. 그 공간들은 소년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들어 온 공간이다. 곳곳에 익숙한 가구가 있고 벽마다 가족의 사진이 붙어있다. 마당과 헛간, 사이드카가 있는 오토바이도 익숙하다. 소년은 그 익숙한 공간에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존재를 초대한다. 스스로 만들어 사랑의 생명을 불어넣은 그 존재를 말이다.


사랑의 시작은 소년의 모험과 비슷하다. 아니, 어쩌면 사랑이라는 모험만이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모험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사람과 소년이 평범하고 익숙한 집 안에서 소소한 놀이를 하며 그곳을 재미로 가득한 신선한 놀이의 장소로 전환시키듯이, 사랑에 빠진 이들은 작은 원룸도 특별하게 만들고 휑한 겨울 해변도 따듯하게 만들지 않던가? 이 사랑의 힘은 더 나아가 혼자선 엄두도 못 냈던 도전을 가능하게 한다. 소년과 눈사람이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어두운 숲속을 헤맬 수 있었던 것도, 함께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것도 둘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선 서로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줘야 한다. 영화에선 소년이 먼저 내어줬다. 자신의 공간과 시간, 속내를 내어줬다. 그러자 눈사람이 화답한다. 함께 날아 그만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세계 곳곳에서 날아온 눈사람과 산타 할아버지가 함께하는 파티를 즐긴다. 이렇게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특별한 시간과 파티의 공간으로 탈바꿈 시킬 수 있는 것이 사랑의 힘이고, 그 힘의 도래는 낯선 누군가를 초대함으로 인해서 가능하다.


사랑의 추억은 결국, 이 낯선 초대를 받아들여 예측할 수 없는 모험, LP판의 홈처럼 인생에 길고 깊은 흔적을 남기는 모험으로 만들어진다. 그 모험의 홈이 만든 궤적은 추억의 선율이 되어 삶의 어느 예측 하지 못한 순간에 다시 플레이 된다. 이 영화처럼, 추억의 연주엔 대사가 필요 없다. 설핏 든 낮잠 중에 꾼 꿈처럼 대사 없이, 함께 한 아름다운 풍경만 말없이 떠오른다. 스노우맨에 대사가 필요 없는 이유다.



그래도 추억이 필요한 이유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앞서 쓴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이 생각났다. 앞서 말했듯 소설엔 사랑의 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사랑이 끝나고 난 후의 삶을 지탱해주는, 추억의 힘에 대해서 일 것이다. 평범한 내 인생에도 돌아보니 거기에 사랑과 청춘이 있었구나 하는, <1Q84>에서 노부인이 아오마메에게 하는 말처럼 뜨거웠던 기억으로 몸을 덥혀야 하는 메마른 시절을 견뎌내게 하는 그런 추억들 말이다.

"당신 몸은 무척 탄력 있어 보여요." 노부인은 말했다.
....
"고맙습니다." 아오마메는 말했다.
"나도 예전에는 그런 몸을 갖고 있었지요."
"알고 있어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
"지금도 멋진 몸이세요."아오마메는 말했다.
노부인은 가볍게 입가를 올렸다. "고마워요. 하지만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아오마메는 거기에는 응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 몸을 몹시 즐겼고 상대도 몹시 즐겹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요?"
"알아요."
"어때요, 당신은 즐기고 있나요?"
"가끔." 아오마메는 말했다.
"가끔으로는 부족할 거예요." 노부인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말했다.
"그런 건 젊은 시절에 열심히 즐겨둬야 해요. 마음 가는 데까지.
나이 들어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음에는 예전 기억으로 몸을 따스하게 덥혀야 하니까요."


<1Q84>의 노부인의 말을 처음 읽었을 때는 아련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도 나이 들면 저런 마음이 들려나...그렇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쉰을 코앞에 두고 생각해 보니 저 말이 막연하다. 추억은 우리의 체온을 덥히지 못한다. 앞서 칼럼에 말했던 것처럼 추억에 젖은 오후를 선사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사람의 체온을 올리는 건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뿐이다. 김훈 선생님의 에세이집 <밥벌이의 지겨움> 중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에 등장한 바람둥이 친구는 “연애란 오직 살을 부비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훈 선생님은 그 친구 말에 어이 없어 하면서도, “언어의 반대말은 ‘살’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고 은근히 맞장구를 쳤다.


추억은 실체 없는 환상일지 모른다. 체온도 올릴 수 없고 물도 끓일 수 없다. 유리겔라의 엉터리 염력처럼 내 눈 앞에 있는 숟가락조차 휘게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이 사랑만큼 소중하고 인생에 힘이 되는 건 브라운 아이즈의 노래 가사처럼 “순간의 기억을 두 맘 깊이 간직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간직 된 기억에 기대어 가끔 술 한 잔 기울이며 눈물 없는 울음을 술잔과 함께 삼키기 위해 그 추억을 “며칠이 지나고, 몇 년이 흘러도” 힘써 간직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추억의 잔해가 필요하다.

그 간직 된 추억은 영화 <드림캐쳐>에 나오는 기억의 저장고처럼, <인사이드아웃>의 기억 구슬 저장고처럼 그렇게 차곡차곡 체계적으로 저장되어 있을까? 그래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 기억들을 금새 소환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기억도 흐려지듯, 추억도 바래진다. 우리에게 추억의 잔해가 필요한 이유다.

눈사람이 녹아 사라지듯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그 풍경과 함께 추억의 잔해가 남는다. 사랑은 사라졌고 그 유물만 남는다. 그 꿈같은 순간, 마법 같은 순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설령 말한다 해도 그 순간의 기쁨을 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 끝나고 난 뒤, 추억의 사물은 생생하게 눈앞에 있다. 그 사물을 우린 버려야 할까? 데이비드 보위 버전의 도입부처럼 서랍 속에 고이고이 모셔놔야 할까?


추적이 흔적과 증거를 따라 가듯이, 추억 또한 그것을 가능하기 위해선 오감으로 포착 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나이가 들어 기억이 흐려질 수록 그 필요는 더 커질 것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진이나 기념품에 집착하는 것도 추억이 소나기처럼 느닷없이 덮쳐오기 위해선 그 기억을 추적할 수 있는 남아 있는 흔적이 있어야 가능함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옛 시골집 대청마루 꼭대기를 가족의 흑백사진이 차지했던 것도,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중산층 가정에 그렇게 사진 액자들이 많은 것도, <코코>에서 죽은 자의 날에 이승을 찾기 위해서는 누군가 사진을 제단에 올려 추모해야 하는 것도, 결국 기억의 저장고에서 세월의 먼지를 무심히 툭툭 털어 추억을 꺼내보기기 위해선 그 기억의 복잡한 서가를 헤매지 않고 단박에 소중한 추억을 찾아낼 유능한 사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않을까?



붙잡을 수 있을 때 붙잡아야 한다.

몇 년 전 촬영에 함께한 조명 팀 스태프는 휴대폰에 사진이 삼만 장 있다고 했다. 저녁을 먹으러 간 우리의 단골 삼겹살집에서도 그 휴대폰은 쉬지 않았다. 그는 사진으로 그 날들을 기억한다고 한다. 내 휴대폰에 딸 밖에 없는 거 보면 내가 기억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딸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디지털 사진들은 하나의 연애가 끝나면 너무 쉽게 삭제된다. 일일이 지울 필요도 없이 폴더 전체를 날려버리면 된다. 예전에는 옥상이나 공터를 찾아 한 장 한 장 태워야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사랑의 흔적들을 왜 그렇게 지우려 했었나 하는 생각이다. 어차피 기억은 흐려지는데 말이다. <이터널 선샤인>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보라.


나이 들어, 다시 본 <스노우맨>의 마지막은 슬펐다. 그 눈사람에겐 엘사가 울라프에게 만들어준 눈구름이 없었다. 사랑은 마법 같은 일이지만 마법 그 자체는 아니어서 사라지는 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사랑도, 청춘도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하고 사라지기에 더욱 더 그 마법의 잔해들을 남겨 놔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조차 없으면 그 마법 같은 일은 없었던 일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질지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꼬마의 머플러처럼 우리에겐 추억을 추적할 남겨진 단서들이 필요하다.

KakaoTalk_20211213_090049832.jpg 딸이 학교에서 만들어 온 눈사람



쓰다 보니 또 사랑 타령이다. 선수로 은퇴해야 해설가가 되는 것처럼 연애가 남에 일이 되어야 사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편하게 얘기할 수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를 먹는 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다.

“어이, 난 이미 끝났으니까 뒷일을 부탁해.”투로 글을 쓸 수 있으니 말이다.


아직 겨울이 남았다.

이 해를 보내기엔 아쉬움이 남고, 새해를 맞이하기엔 망설임이 문지기처럼 서성거린다.

그 마음을 알기에 겨울은 두 해의 경계에서 문지방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이 문지방에 앉아 잠시 쉬면서 촌스러운 크리스마스트리 무늬가 있는 녹색과 빨간색 스웨터를 입고 사랑하는 사람과 <스노우맨>을 보면 어떨까.


아, 참고로, 딸은 이제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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