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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그렇게 어른이 된다.

영화의 위로 5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by 최영훈

연애 상담을 위해 아껴둔 영화

젊은 친구들은 십오 년 이상 결혼 생활을 버텨내고 애도 건강하게 키우는 어른이라면 인생의 모든 해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툭하면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는데, 하루키가 <그런가, 좀처럼 잘 안 되네>라는 에세이에서 말한 것처럼 적당히 맞장구나 쳐 주는 걸로 대화를 끝내는 게 쉽지 않다.


오죽하면 나한테까지 왔나 싶어 틀린 답이라도 성의껏 말해주려 하지만 그 틀린 답조차 내주기 어려운 것이 연애에 관한 고민이다. 반백의 카피라이터에게 털어 놓는 청춘들의 사랑 고민은 대체로 뻔하다. “썸을 타고 있는데 어떡할까요?”, “고백했다 까이면 어떡하죠?” 뭐 이런 것들이다. 이날까지 살면서 연애라고 해봐야 열 손가락 안쪽이고 내 시대의 사랑과 이 시대의 사랑은 그 온도의 오르내림과 이야기의 흐름이 어긋난다 싶어 매번 답을 망설이지만, 뭉그적대다가, 결국 이 영화를 품에서 꺼내든다.


사랑은 끝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는 사랑이 언제든 “툭” 하고 끝날 수 있음을 당연시하고 그 끝을 긍정하는 이야기다. 그 불길한 예감을 받아들이고 지금 이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이야기다. 서로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자의 부자유한 신체와 남자의 건강함, 여자의 고독한 삶과 남자의 분주한 삶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문제없을 것 같던 사랑도 문제 삼지 않았던 것들 때문에 끝난다. 호텔에서 머물던 밤, 사방을 비추는 물고기의 실루엣을 보면서 내뱉은 조제의 독백 속에 이 사랑의 끝은 예감 된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이 사랑이 끝나면 가족도 없이 살아가는 심해 같은 고독한 삶으로 돌아가겠지만 평생 고독했을 내 삶에 사랑이라는 불꽃놀이 같은 순간을 선사해줬기에, 그 사랑의 끝을 예감해도 절대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다.


선언대로 사랑이 끝난 후 조제는 씩씩하게 살아간다. 여전히 밥을 만들어 먹고 도서관에 간다. 사랑이 일상을 뒤흔들었지만 그 사랑의 종결이 자신을 우울로 몰아가지 않도록 한껏 한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채 연인을 훌훌 보내버린다.


나라는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준 추억은 소중하기에, 그 사랑의 상실이 그 이후의 삶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그 고독과 싸운 뒤 얻어낸 평온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이지만 선물처럼 사랑이 왔다면 그 사랑이 끝난 이후의 삶은 그 선물 받았던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잔치 같은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조제의 씩씩함은 이런 마음에서 비롯됐을 지도 모른다.



두 번의 꽃, 생의 이면

우린 사는 동안 성대한 꽃잔치를 두 번 한다. 한번은 결혼식 때, 한번은 장례식 때. 두 번 다 한 존재의 죽음이다. 전자는 청춘의 소멸, 두 번째는 육신의 소멸. 둘 다 위로의 꽃인지 축하의 꽃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인생의 모든 일에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린 둘 중 하나만, 그것도 좋은 면만 계속 될거라 기대하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별은 정말 사랑의 어두운 면이자 고통일까? 과거 유행했던 아이콘의 <사랑을 했다>에 힌트가 나온다. 사랑은 한편의 멜로드라마로 볼만했고, 결말도 괜찮았으면 끝난 사랑도 아름답다고 한다. 대신 추억이 남는다. 그래서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노래에선 “추억도 사랑만큼 힘이 있고”, 그 힘은 “순간의 기억을 두 맘 깊이 간직”하는 것에 기인한다고 한다. 사랑한 만큼 깊고 큰 추억은 우리가 남은 생을 살아가는데 힘이 된다. 그 힘으로 때론 일상의 고통을 이겨내곤 한다. 사랑을 할 때 기꺼이 망가지고 오히려 이별 후에 조제처럼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거. 그게 정말 사랑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TV로 연애를 배우지 말아야 한다. 미디어는 완성 된 사람들이 하는 사랑과 데이트의 성공만 보여준다. 말도 잘하고 외모도 멀쩡하고 코스도 완벽하다. 폐업식은 없고 개업식만 있는 것과 같다. 대학가나 번화가에 가면 저번에 갔던 식당이 없어져서 당황한 적이 있을 거다. 그 식당이 그 자리보다 더 좋은 자리 찾아서 갔을까? 대부분의 식당은 어떤 형태로든 실패했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 그런데 금방 새로운 식당이 들어온다. 인테리어를 싹 바꾸고 요란하게 개업식을 한 후 화려한 화환을 늘어 놓은 뒤 장사를 시작한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사랑은 바로 이런 개업식만 있는 사랑이다.


미디어로 사랑을 배운 대부분의 청춘들이 이런 완벽한 인테리어를 갖춘, 개업식 같은 잔치만 계속 되는 사랑을 꿈꾼다. 미디어가 못 보여주고 안 보여주는, 달의 뒤편 같은, 사랑의 다른 면은 모른척하거나 염두에 두지 않는다.


끝난 사랑에 대한 예의

개업식 같이 화려하게 시작 된, 그 사랑도 끝난다. 학창 시절 달달 외웠던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을 통해 우린 진즉에 알고 있다. 그 끝이 잠복하고 있음을 예감했다면 느닷없이 나타난 이별에 놀랄 필요도, 그 이별의 아픔을 부둥켜안고 몇 계절 끙끙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쿨하게 훌쩍 다른 사랑으로 환승하는 것도 사랑에 대한 예의는 아니다. 끝났을 때 아무 상처도 없다면 노래 가사처럼 전쟁 같은 사랑을 치룬 것은 아닐 것이다.


정작 사랑이 끝난 뒤 물어야 할 건 상처가 왜 생겼는지, 괴로운 이유는 뭐 때문인지 일 것이다. 사랑의 끝을 “나”의 실패로 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인지, 그 사랑의 부재 때문에 괴로운 것인지를 말이다. 그 이유가 전자라면 사랑의 주인공은 늘 나였던 것이고, 연인은 내 사랑이라는 과업에 “연인” 이라는 조연을 맡았던 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 이유가 후자인 경우에도 사랑했던 사람이 특별한 누군가인지, 아니면 사랑이 가능한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에 불과했었는지를 생각해 봐야만 한다. 만약 누구라도 그 자리를 메워주는 순간 이별의 상처와 괴로움이 회복 된다면, 그것 또한 매번 새롭고 특별해야만 하는 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겨울바다와 어울린다. 울산 정자 해변.

모든 사랑은 특별해야만 한다.

모든 사랑은 왜 새롭고 특별해야만 하는 걸까? 라캉의 권위자인 브루스 핑크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왔는지 모른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욕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부모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해 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정확히 모른 채 살아간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몰라서 그걸 알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번뿐인, 처음 살아내는 인생에서 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까지 풀어야 하니, 당연히 흔들리며 살 수밖에 없다.

그 수수께끼는 누구에게나 어렵고 아무리 살아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이 괴로운 일상 중에 불현듯 사랑이 나타나면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은 왜 날 사랑하지?”, 그때 "당신이어서 사랑한다."는 답이 건네지면 우리의 수수께끼는 겨우 실마리를 찾기 시작한다. 겨우 살아야할 이유를 찾은 것만 같다. 그렇게 한자 사람인의 모양처럼 타자에게 기대어 주체의 의미를 세워가기 시작한다. 그런 사랑의 반복을 통해 우리는 겨우 삶을 버텨낼 마음의 영토를 확보해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마음의 영토를 확장하고 가꿔나가며 건강한 어른이 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죽음과 닮은 완전무결한 행복

원작은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이다. 짧은 소설엔 사랑의 끝이 없다. 같이 사는 평온한 일상만 묘사 될 뿐이다.

츠네오는 그 후로도 조제와 같이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부부라고 생각하지만, 호적 신고도 하지 않았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고, 피로연도 하지 않았고, 츠네오의 가족 친지들에게도 알리지도 않았다. 종이 상자 속에 담긴 할머니의 유골도 그대로다. 조제는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영원할 것만 같던 청춘의 사랑도, 아니 그 청춘도 언제가 끝난다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마치 계속 될 것 같은 성대한 잔치도 언젠가는 끝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의 행복도, 모든 행복이 그러하듯이, 삶과 생명이 그러하듯이 끝이 난다. 그러나 소설은 그 끝을 끝내 유예하고 외면한다. 소설의 마지막 단락이다.

조제는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은 늘 죽음과 같은 말로 여긴다.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다. ‘우리는 물고기야. 죽어버린 거야.’ 그런 생각을 할 때, 조제는 행복하다. 조제는 츠네오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깍지 끼고, 몸을 맡기고, 인형처럼 가늘고 힘없는 두 다리를 나란히 한 채 편안히 잠들어 있다.

구경꾼에게 평원은 평온해 보인다. 농부에겐 전쟁터지만. 사랑도 마찬가지....북해도, 후라노.


마음은 굳은살을 모른다.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권택영은 <감각의 제국>에 저 소설에 담긴 두 사람의 ‘죽음 그 자체와 닮은 완전무결한 행복’을 설명할 단서를, 라캉의 이론이 담긴, 다음과 같은 문장 안에 숨겨 놨다.

“주체는 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타자를 그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결핍이고, 그 결핍은 죽음 이외의 것으로 충족되지 못한다.”

이 단서는 다른 문장과 어우러져 저 평온함과 죽음의 병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은 자극과 긴장을 벗어나 평화(죽음)를 추구하는 리비도의 두 모습이다.”


이어서, 우리가 완전무결한 사랑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다시 사랑에 빠지는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는지, 그 해답을 손에 쥐어 준다. 에큘 포와로가 마지막에 범인을 밝히듯.

“완벽함을 꿈꾸고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상실의 아픔을 맛보고 그리고 또 새싹이 돋듯 새살이 돋아 다시 완벽함을 꿈꾼다. 그리고 또 상실을 맛보고...... 다시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결심해도 마음은 군살을 모른다. 언제나 여리고 아프고 그리고 다시 새살이 돋는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애도라 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살아있기에 덮쳐올 수밖에 없는 끝이라는 불안함을, 그것이 인생과 사랑이 태생적으로 잉태하고 있는 것임을, 저 죽음 같이 평온한 일상 속에서, 완전무결한 행복이 지속 되던 어느 날 감지했을 것이다. 완전무결한 행복과 그것을 닮은 안식은 죽은 자에게나 허락 된 것임을 깨달아 그렇게 사랑을 보냈을 것이다.


완전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떠나고 싶은 사람을 붙잡을 수도 없고, 그 사랑을 유지해야만 인생과 청춘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뒤이어 깨달았을지 모른다. 인생은 결국 반복 된 상실, 상실의 반복이라는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선사하는 그 공허한, 호랑이 같은 공포어린 현실과 마주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 공포를 고독하게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아니 그걸 보기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인생임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 깨달음 뒤의 시간까지 보여준 것이다.



청춘도, 사랑도 애도가 필요하다.

영화의 막바지, 츠네오가 조제의 집을 나와 새 여자 친구와 길을 걸으며 점심 메뉴를 고민하다가, 불쑥 가드레일을 붙잡고 오열한다. 사랑은 이렇게 감정의 홍수와 가뭄을 오가며 마음의 땅을 단련시켜 우릴 건강한 어른으로 만든다. 물론 어떤 사랑에서 폭우를 만나고 어떤 사랑에서 가뭄을 만날지 알 수 없다.


사회에서 약자에 속하는 조제와 사랑을 할 때 츠네오는 풍요로웠다. 그 사랑이 끝난 후 대체할 수 없는 마음의 가뭄, 돌이킬 수 없는 청춘의 종말을 깊이 예감한다. 그 예감이 불러온 슬픔을 피하지 않고 터뜨려 사랑과 청춘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 후 그는 소위 “정상적”으로 보이는 건강한 대학 동기와 사랑을 시작하고 안정 된 직장을 다니는, 반복 된 일상을 살아간다. 담담히 츠네오를 보낸 조제도 무서운 호랑이 같은 고독한 현실을 마주하며 살 수 있는 어른이 됐다.


그렇게 두 청춘은 어른이 됐다. 죽음 같은 평온한 행복과 사랑은 환상임을 안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굳은살”과 “면역력”이 없어서 다시 사랑에 속고, 행복이라는 환상을 추구하며 일상을 반복하며 삶을 살아내는 어른이 된 것이다.


애도가 끝나고 다시...

사랑도, 청춘도, 그 이야기는 애도 후에 써진다. 지금 청춘의 시기를 살고 있는 사람은, 사랑 중인 청춘은 그 이야기를 쓸 수 없다. 모든 청춘과 사랑 이야기는 애도의 잉크를 찍어, 추억이라는 펜으로 써진다. 그 이야기는 어른의 일상 어느 날, 예고 없이 펼쳐져 우리를 위로한다.

결국, 한동근의 노래는 오류다. 그는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에서 “내 한 권의 사랑 마지막 장면엔 네가 있어야 해 그래야 말이 되니까.”라고 노래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가 아직 사랑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다면 그건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기에 마지막 장면이 될 수가 없다. 열린 결말이어서는 추억도, 이야기도 될 수 없고 예고 없이 펼쳐질 수도 없다. 사랑에 열린 결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드문 해피 엔딩도 엔딩은 엔딩이다.

반면 인생은 열린 결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선 그 끝이 어떻게 써질지 알 수가 없다. 그 인생의 앞날을 막연하게 느낄수록, 그 미래로 가는 여정조차 전망 안 되는 청춘일수록 사랑의 시작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래서 많은 청춘들이 본격적인 사랑의 첫 페이지는 미룬 채 썸과 어장의 네트워크 관리에만 열심인지도 모른다.


썸이라는 단어는 안전하다. 끝도 시작도 없는 단어다. 아무도 죽지 않는 디즈니 만화와 같다. 그 단어는 사랑의 서사 밖에 머물면서 사랑을 유예시킨다. 그동안 청춘은 사랑의 관망자로써 그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 사랑 없는, 그 실패 없는 삶을 완전무결한 행복이라 착각하며 산다. 애도의 묘비명을 수없이 세워가며 살다가, 결국엔 타인이 쓴 묘비명 아래 잠드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청춘에게 사랑의 묘비명을 마주하는 것은 두렵다.


지금 연애하지 않는 청춘은 그 자유를 얻는 대신 사랑 이야기 한 편 얻을 기회를 상실한 채, 그렇게 커버려서, 마음의 옥토 한 뼘 없는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아내도 다 큰 애들도 외출한 비 오는 주말, 믹스 커피 한잔 마시면서 창가 앞에 섰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려면...

별 수 없다, 청춘일 때 연애를 하는 수밖에.


이런 별 도움 안 되는 연애 상담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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