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편지를 쓸 수 없던 땅에서

영화의 위로 14. 미나리(2020)

by 최영훈

어머니가 기다리셨던 편지

기지촌의 작은 교회 집사였던 어머니는 교회 문턱을 넘는 아가씨들을 조건 없이 품어 주셨다. 그녀들은 어머니가 고향이나 과거를 묻지 않아도 때가 되면 다 말했고,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에도 비가 오는 날이면 아가씨들을 불러 모아 김치 부침개를 잔뜩 부쳐 먹이시곤 했다. 그 너른 품의 여정은 파주에서, 의정부를 거쳐 평택까지, 이십여 년 간 이어졌다.


그 중 국제결혼에 “성공”한 이도 있었다. 교회에 소식을 알리면, 잘 사는 나라 미국에서 온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고 남편의 나라에 가게 됐다고 다들 축하해줬다. 물론 일부는 야반도주 하듯 어느날 갑자기 인사도 없이 떠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어머니와 기나긴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작별 인사 끝에는 늘 꼭 편지 하겠노라는 다짐에 마스카라 얼룩진 앳된 얼굴을 서명으로 남겼다.


어머니는 그녀들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보내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오더라도 몇 년 후였으며, 그마저도 드물었다. 드물게 편지가 교회로 도착하면 종종 목사와 전도사들은 어머니와 함께 그 편지에 담긴 눈물과 사연을, 글을 못 읽는 고향의 부모를 위해 육성으로 번역해야 했다.


신학교에서 배운 언어로는 깊은 외로움과 그리움이 담긴 편지를 제대로 번역할 수 없었기에 고향에 전화를 거는 건 결국 어머니의 몫이었다. <미나리>는 그렇게 제 각각의 꿈을 안고 떠났던 이의-그 꿈이 어떻게 됐는지, 고향의 부모에겐 차마 다 말할 수 없었던-그 숨겨진 이야기다.


편지에 담기지 못한 이야기

80년대 초의 미국. 70년대 이민 온 젊은 부부는 캘리포니아에 정착해 병아리 감별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보니 십 년이 훌쩍 지났고, 벌어놓은 돈 없이 남부의 아칸소 주로 이사한다. 영화는 아칸소의 정착부터 시작한다. 부부의 과거는 극도로 생략 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한국에서 살기 힘들었다는 남자는 지영이 아빠로도, 미국 사람 제이콥으로도 살아 내는 게 쉽지 않다. 한국에서부터 지고 온 장남이라는, 수컷이라는 무게를 여전히 떠안고 살기 때문이다. 또 부화장에서 아들과 나눈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분쇄되는 수컷 병아리처럼 쓸모없는 수컷이 아니라 쓸모 있는 수컷임을 입증해 가장의 위엄을 절박하게 찾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남자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뭔가 해내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지영이 엄마, 모니카는 외롭다. 외롭기에 가족과 함께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더 나아가 종교와 공동체를 통해 위안을 얻고 싶어 한다. 엄마의 엄마, 할머니는 그 바쁘고 의지할 데 없는 가족을 돕기 위해 온다. 영어 한마디 못하고, 드넓은 농장 밖으로 외출하기도 어렵지만 미나리 심을만한 곳을 찾아 미나리를 심고, 물이 안 나올 땐 물도 길어오며 돕는다.


그러나 바라는 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인생이듯 이들의 인생도 꼬여 간다. 농장의 지하수는 마르고, 교회엔 온통 백인뿐이며, 할머니는 뇌졸중에 걸린다. 영화는 절망의 심연도, 희망의 여명도 담담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 희망의 여명, 그 아침을 맞이하여 새 하루를 살게 하는 구원의 힘이 무엇인지 말한다.



난파 된 삶을 끌고

삶을 구원받기 위해 선택한 낯선 땅에서, 한인들은 선택해야 했다. 노동과 자본을 통한 구원. 신과 교회, 그 공동체를 통한 구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통한 구원. 무엇이 난파 된 삶을 구원할 수 있는지 답은 각자에게 있다.


물론 스스로 구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 밖에서 십자가를 지고 걷는 폴의 여정은 외롭다. 알 수 없는 방언으로 신과 대화하지만 그 성령 충만함은 역설적으로 이해 받을 수 없는 고독의 영역을 만든다.


<미나리>는 다른 칼럼에서 언급한 소설 <파피용>의 이브 크라메르의 독백처럼 사랑이, 그리고 가족이 삶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물론 사랑했던 기억과 서로가 서로의 구원자가 되주자던 다짐만으론 그 구원의 이룸이 힘겨워 보인다. 그러기에는 인생의 파도거 너무 높고 거세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으면 서로를 구원 할 수 없고 삶을 앞으로 밀고 갈 수 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또, 절망을 향해 걸어가던 할머니를 향해 두려움 없이 뜀박질 하여 그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서게 한 손자의 재촉처럼, 우리 모두는 돌아갈 사랑의 공간과 가족이 있을 때 난파 된 삶을 수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나리>의 울림을 난 그렇게 들었다.



설움의 이유를 알다.

텍사스의 작은 카운티 킬린(Killeen)은 미군 기지가 있어 한인들이 많이 산다. 어머니는 2002년, 그곳에 정착했고 작은 한인교회의 권사다. 몇 년 전 텍사스에서의 어느 저녁, 어머니는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곳 한인 마트에서 의정부와 평택에서 떠나보냈던 몇몇 아가씨들과 스쳤다고 했다. 그녀들이 애써 모른 척 했기에 어머니도 나름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시고 모른 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좁은 한인 바닥에서 서로의 소문이 귀에 들어가지 않기는 쉽지 않을 터. 며칠 후면 어머니에게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때, “집사님”이라는 수화기 너머의 부름에, 어머니는 “자매님”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어제 떠난 이와 통화하듯 반갑게.

DSC09326.JPG


킬린은 이렇듯, <미나리>의 아칸소처럼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도는 수많은 타향 중 하나다. 그곳에 차린 어머니의 식당에는 한국에서 유명 대학을 나왔고, 어느 대기업에 다녔다고 으스대는 중년의 사내들이 매주 서 너 명은 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과거는 고국에 두고 왔고, 한국보다 일곱 배나 큰 텍사스에서는 무명씨였다. 오늘 죽어도 아무도 신경 안 쓸, 들판의 잡초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구원의 땅으로 선택한 미국에서 좌절했고, 그 좌절 끝에 남겨진 고독한 자신을 다시 고향에 돌려보낼 수 없었다. 고향엔 이미 아무도 없거나 구원 받아 달라진 그를 기대하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좌절과 고독 끝에도 끝끝내 타향에서 살아남아야했고 살아남기 위해 뭐라도 하면서 생을 이어가야 했다.


어머니가 다니시는 한인교회에서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던 날, 설움이 북받쳤다. 결국 예배 중간에 나와, <미나리>의 농장을 닮은, 교회 앞의 푸른 벌판의 Kern Park를 서성였다. 서성이며 설움의 이유를 찾으려 했다. 그 때 미처 찾지 못했던 설움의 이유를 <미나리>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 설움은 편지에 차마 담을 수 없어 안으로 오랜 세월 삼켜왔던 설움이었다. 구원과 위안이 가득한 교회에서도 쏟아낼 수 없었던 설움이었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겪은 험한 일상은 차마 글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움만 솎아내어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리움과 이방인의 설움이 펜 끝에서 망설이는 동안 수많은 편지지들이 낡은 식탁 위에 낙엽처럼 쌓여 갔을 것이다. 가을장마 같은 눈물이 그 쌓인 편지지를 적셨을 것이다. 그렇게 조심히 골라 써진, 오랜만에 날아 온 편지들만으로도 고국의 남은 이들은 홍수 같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이는 편지 보낼 곳 하나 없는, 타국의 고독한 이였을 것이다.



먼 곳에서 오래 전, 여기서 지금도

<미나리>는 우리 역사의 시간동안 낯선 곳에서 삶을 꾸려낸 동포의 이야기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흩어진 우리 고려인들의 이야기고, LA한인 타운에서 총을 집어 들었던 교포들의 이야기다. 라스팔마스에 원양어선 기지를 개척한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고, 독일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일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만날 수 있다는 한국인, 한국인이 살지 않는 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그런, 그런 우리만의 이야기다.


미나리의 이야기는 이 땅에서도 현재 진행형이다. 부산에서 내 강의를 들었던 제자 중 몇몇은 서울과 수도권에서의 삶을 버텨내고 있다. 십여 년 전 용산, 어느 동네의 제자 자취방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적이 있다. 내가 온다고 하니 그 좁은 방에 제자의 선후배 동기 대여섯 명이 찾아 왔다. 그들은 낯선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그 낯선 삶을 묵묵히 버텨 온 동지들이었다. 서울에서 부산의 청년은 이방인이었으며, 사투리는 이방인의 언어였다. 그들의 외로움, 슬픔, 고독을 헤아릴 수 없었기에, 그날 밤, 그저 많은 술을 함께 마셨다.



미나리가 그리워지면 부산 고향집에 오라

부산이 고향인 딸은 봄이 오면 청도의 한재 미나리 먹는 걸 당연시 한다. 대개는 삼겹살에 곁들여 먹지만, 목살 좋아하는 외삼촌 때문에 딸도 그리 먹는다. 연한 미나리를 소쿠리 채 앞에 두고 판다가 대나무 줄기 씹어 먹듯 날로도 잘 먹는다.


이 봄날의 연례행사가 언젠간 그리워질 것이다. 모든 미나리가 다 부드럽고 연하지 않듯 인생의 모든 시간이 술술 풀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갈 때쯤, 그렇게 봄날의 한재 미나리가 그리울 것이다. 봄 같던 청춘을 지나 예상치 못했던 겨울과 마주한 후 그 냉랭한 계절의 터널 끝에서 겨우 따듯한 희망어린 아침의 여명을 만날 때, 그때 문득 엄마가 구워주던 목살과 함께 먹던 그 연한 미나리가 그리울 것이다.


설령, 그 그리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 근처 대형 마트에서 한바구니의 한재 미나리를 사 먹더라도 여전히 그리움은 체기가 되어 명치 언저리에 머물 것이다. 아무리, 아무리 먹어도 그 그리움은 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움은 지금 무엇이 불가능하기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추억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결국, 지영이 엄마 모니카가 모국의 바다에서 건져내 말린 멸치를 받아들고 울었듯이, 딸도 한재 미나리만 보면 영문 모를 따듯한 눈물이 솟아오를 것이다. 그렇게 그리움이 목까지 차오르면 어린 시절 등굣길에 보던 모과꽃을 보러 왔다는 핑계로 집에 내려 와, 외삼촌과 마주 앉아 목살에 미나리를 먹을 것이다. 더 먹으라고 재촉하는 엄마를 흘깃거리며 미나리를 삼킬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