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밥 먹는 데 거리낌이 없다. 혼자 술도 마시고 등산도 하고 조깅도 한다. 삶에 닥친 외로움을 당연시하게 된지는 오래 됐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동시상영관을 혼자 드나들었고, 혼자 서가를 방황하던 서점에 다른 이와 동행한 경우는 곁에 있는 딸을 포함해도 두세 명이 안 된다.
당연히 혼식 레벨은 거의 최고 레벨이다. 단골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에 소주를 곁들여도 눈치를 보지 않는다. 이런 탓에 젊었을 때는 함께 밥을 먹으며 마음의 상처를 나누고 생을 치유하는 몇몇 일본 영화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울산 장생포가 고향인 사내와 마주하고 밥을 먹어온 십오 년의 세월 끝에 함께 밥을 먹는 것의 소중함을 알아가고 있다.
낯선 도시, 낯선 사람
<카모메 식당>, <심야식당>, <바닷마을 다이어리>, <리틀 포레스트> 같은 일본 영화를 보면 함께 밥을 먹으며 서로 위로하고 삶의 고단함을 씻어낸다. 헬싱키의 정갈한 하얀 테이블이든, 내 자리와 네 자리를 칼 같이 나누기 곤란한 신주쿠 어느 골목의 허름한 식당의 ㄷ자 모양의 바(Bar) 테이블이든, 대를 이어 살아 온 고택의 처마 밑에서 먹는 간단한 덮밥이든, 그 먹는 음식과 시간, 공간의 공유 속에서 서로의 삶을 연민한다.
이 중 오늘 얘기하고 싶은 영화는 <카모메 식당>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핀란드 헬싱키에 뜬금없이 오니기리, 우리말로 하면 주먹밥 식당이 생긴다. 주인은 일본 여자 사치에. 한 달째 손님은 없다. 말 그대로 파리 날린다. 주인은 무사태평, 매일 컵을 깨끗이 닦으며 첫 번째 손님을 기다린다.
어느 날 찾아 온 귀한 첫 손님, 일본 애니메이션 광팬인 핀란드 청년이 문턱을 넘는다. 그러더니 대뜸 일본 만화 갓차맨의 주제곡 가사를 묻는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벨라루스의 한인 식당을 찾아와 <또, 오해영>의 주제곡을 부른 남자 가수가 누군지 묻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사치에, 가사가 가물거린다. 1절까지 어찌 부르겠는데 그 다음 가사가 도저히 안 떠오른다. 답답한 마음에 나선 산책길은 서점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불쑥 핀란드에 여행 온 일본 여자 미도리를 만난다. 초면이지만 당연히, “갓차맨 주제곡 아세요?”하고 질문을 한다. 마침 남동생이 이 만화의 광팬이었던 미도리는 성심 성의껏 부르며 메모해 준다. 미도리는 이 식당의 두 번째 손님이자 첫 번째 직원이 된다. 그 후 다양한 손님들이 차곡차곡 모여들어, 식당은 사연의 도서관이 된다.
고향의 조건
손님들은 이곳에 과거를 풀어 놓는다. 헬싱키가 여행지인 사람도, 헬싱키가 고향인 사람도 지구라는 행성에서 맞이한, 태어날 장소와 시간을 선택할 수 없었던 낯선 삶에서 겪은 상처를 이 식당에 풀어 놓는다. 때로는 커피와 시나몬 롤을 먹으며, 때로는 핀란드 소주인 코스켄코르바로 술 시합을 하면서, 때로는 갓 튀겨 낸 돈가스를 먹으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 놓고 인생의 쓴 맛과 상처를 치유 받는다.
그곳, 헬싱키는 일본인에게 멀고 낯선 곳이다. 영화는 그 낯선 곳을 통해 한번 뿐인 인생이라 삶은 누구에게나 낯선 경험임을 일깨운다. 윤여정 선생님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일흔이 넘어도 인생이 어려운 것은 일흔이라는 순간을 처음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누구나 당면하고 있는 생의 진실을 헬싱키를 통해 말하는 것이다.
영화는 또, 그 낯선 여행지에서의 하루 같은, 이 서툴고 서먹한 삶을 그럭저럭 살아내기 위해선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느 사람이든, 그 사람과 더불어 산 세월이 오래면 식구가 되고, 그 식구와 함께 살아가는 도시는-설령 그 도시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곳이라 할지라도- 고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이도 나와 다른 낯선 삶을 살았던 이방인이다. 긴 세월 따듯한 음식을 앞에 두고 마주앉아 흉금을 털어 놓는 시간을 만들어 차곡차곡 쌓지 않는 이상, 낯선 삶을 살아 온 모든 이는 헬싱키 같은 먼 이방인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그 식구와 그 고향을 만나기 전까지 객지살이의 외로움을 감당하며 살 수밖에 없다. 서로에게 타자고, 그 타자는 헬싱키처럼 먼 이방인이며, 이방인들이 인연 없이 살아가는 모든 도시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객지에 불과하다.
식구는 만들어진다.
서울 수유리에서 태어나서 파주, 의정부, 평택, 대전을 거쳐 지금은 부산에 살고 있다. 그동안 초등학교 두 곳을 포함해 여섯 개의 학교를 다녔다. 그나마 고등학교를 건넌 뛴 게 이 정도다. 그러니 어느 곳에도 깊은 인연이 드물고 서른 너머 살기 시작한 부산에서도 내 사람이다 싶은 이는 한둘 뿐이다.
이 디아스포라와 같은 삶이 태생이자 팔자려니 체념하고 살던 차에, 그 팔자를 조금씩 고쳐나가고 있다. 그 팔자를 고쳐 울산 사람 속에 밀어 넣어준 이는 감독이다. 십 오년 넘는 세월동안 수 없이 마주한 식탁과 함께 헤쳐 온 일을 통해 식구가 됐다. 영화 <비열한 거리>의 주인공 병두는 식구를 “함께 밥 먹는 입구녕.”들이고, 그렇기에 함께 밥 먹는 이들을 한 “입구녕”이라 말한다. 그렇다. 식구는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고, 그 밥을 함께 먹으며 서로의 어깨에 의지해 삶을 헤쳐 나가는 동반자다.
지난봄에도 그 식구들과 회식을 했다. 새로 합류한 조감독을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였다. 단골집 <돼지생각>에 모였다. 내 또래의 주인장은 깔리는 밑반찬과 그 맛으로 보아 전라도 사람인 듯 하고, 그 부인은 울산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다는데 주인장 얼굴을 봐서는 어찌 꼬드겼을지 궁금한 미모다. 우린 언제나 구석에 있는 조용한 별실로 안내 받는다. 그렇다고 무슨 고급 식당의 외딴 방은 아니고 허름한 테이블 두 개가 놓인 별도의 공간이다.
앉자마자 주인장이 묻는다. “오늘 뭘 좀 드려 볼까?”, 메뉴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감독의 대답은 늘 같다. “마, 알아서 주소.”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장면이다. 매번 되풀이 되는 장면인데 볼 때마다 정겹다. 허름한 별실에, 식구들, 함께 도우며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앉았다. 박물관 기획 전시 인테리어를 전문으로 하는 감독의 후배 이씨, 그의 파트너이자 감독의 고등학교 친구인 최씨, 그들의 리더이자 선배이며 친구인 감독, 막내 조감독과 나까지.
인사치레 같은 주문이 끝나자 밑반찬이 깔리고, 별실 구석에 있는 냉장고에서 셀프로 술을 가져다 한잔씩 따라 목을 추이고 나자 수다가 시작된다. 주인장의 예쁜 아내가 울산대 미대를 나왔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늘 하는 평범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그렇게 두어 시간, 불을 차고앉은 감독은 다른 사람한테 양보 없이 돼지고기를 굽고, 그 연기를 가로지르며 웃음과 대화가 오간다. 서로의 빈 잔에 연신 술을 따라 주며 팍팍한 시국의 피로를 푼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이 장면을 한 치 물러서 볼 때마다 감독의 투정 아닌 투정이 떠오른다. 장생포 토박이인 감독은 안 그래도 좁은 울산 바닥에서 바람도 못 필 만큼 아는 사람이 많다고 투덜대곤 했다. 그 투덜거림은 분명 복에 겨운 투덜거림이다.
우리가 어디 밥만 먹나
한 배달 음식 주문 앱 광고엔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친구가 등장한다. 두 친구가 반가움을 나눌 때 한 친구를 태울 버스가 온다. 이내 “언제 밥 한번 먹자.”는 약속을 남기고 한 친구가 떠난다. 그 후 그 친구에게 식사 쿠폰을, 말 그대로 쏜다. 밥 한번 먹자는 말이 지키기 힘든 요즘, 이 광고가 처음엔 그럴듯하게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 밥 한번 먹자고 만나서 밥만 딱 먹고 헤어지는 민족인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밥만 먹고 헤어질, 인정머리 없는 민족인가?
밥상머리에선 우정도 나누고, 회포(懷抱)도 푼다. 품을 회(懷)와 안을 포(抱)로 형성 된 이 한자어 그대로 오랜 시간 품고 안아 온 서로의 사연을 밥과 함께 나눈다. 그 시간은 육체의 공복과 함께 마음의 공복도 해결하는 시간이다. 그러니 정작 담겨야할 것을 담기엔 광고 속, 저 창공을 가로지르는 밥그릇은 너무 작다.
고향의 한 끼를 먹이고 싶은 사람
감독이 어린 시절 먹었다던 고래 고기처럼, 고향이 있는 사람에겐 고향의 음식이 있고, 그 음식은 좋은 사람에게 먹이고 싶은 한 끼다. 감독이 날 볼 때마다 고래 고기 얘기를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이젠 그걸 먹일 수 없기에 울산의 여러 맛 집들로 날 부지런히 데려갔을 것이다. 그렇게 십 오년 넘게 감독과 마주한 식탁에서 일 얘기와 인생 얘기를 하며 같이 늙어갈 식구이자 친구가 됐다.
헬싱키든 울산이든 마음이 위로 받는 곳, 나만 만나면 따뜻한 한 끼를 먹이고 싶은 사람이 사는 곳이 고향이다. 그런 장소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친구의 고향이자 내 고향이다. 터미널에 버스가 서면 마음 먼저 편해지는 고향이다.
그렇다. 울산에 내 사람과 식구가 있다. 서로를 의지하며 삶을 꾸려가는 사람. 함께 나이 들었고 함께 늙어갈 사람. 열심히 살아서 그 성과로 친구의 삶에 도움이 되길 바라기에 더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는 사람. 그런 사람과 식구가 있다. 18년의 카피라이터 경력 끝에, 불쑥 광고 외에 다른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도 그런 마음이 들어서였다. 내 이름 석자를 달고 나온 글과 책, 그리고 작가라는 또 다른 명함으로, 나와 어깨를 부비며 소주잔을 기울인 이들의 생업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 사람, 그 식구, 뒤늦게 얻은 그 마음의 고향 울산이 내 외로움의 팔자를 고치고 있다. 젊은 시절 수 없이 홀로 마주한 밥상의 반복 끝에 두터운 먼지처럼 쌓인 외로움을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다른 영화 <안경>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타에코의 안경이 차창 밖으로 날아가듯이.
3월 말, 태화강 건너편 다운동 최씨 작업실에 놀러갔더니 고로쇠 물 한 통을 떠안겼다.
“작가님, 그거 울릉도에서 배 타고 온 기라. 양~끗 마신 다음 날, 알죠? 그거 한번 맛들이면 딴 고로쇠 물, 입도 못 대.” 최씨와 이씨는 요즘 울릉도에 있는 한 박물관 기획 전시 인테리어 작업을 하고 있다. 뭍에 나오면 그 핑계로 속닥하게 작업실에서 한잔하겠지. 모두들, 친구 같은 고향에서 고향 같은 친구와 함께 좋은 한 끼 먹을 수 있길. 그 한 끼, 밥 한번 먹자는 약속이 밥 먹듯이 이뤄지는 날들이 퍼뜩 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