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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은 새 사랑이었다.

영화의 위로 17 . 우리도 사랑일까?(2011)

by 최영훈


봄이 오면 사랑이 시작된다. 대학교 네 개가 모여 있는 동네에서 이십 년 살아보니 그렇다. 벚꽃이 피는 즈음이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오늘부터 1일”을 외친다. 내가 대학 다닐 때도 그랬다. 다만 그 사랑을 지켜낸 시간의 길이가 다를 뿐이다. 우리 땐 겨울이 오고, 해를 넘겨 연애하는 커플도 흔했다. 요즘은 일 년은 고사하고 한 계절도 쉽지 않은 듯하다. 대학 강사 노릇하면서 CC들의 무수한 탄생과 헤어짐을 목격하고, 또 최근엔 젊은 후배들의 사랑을 지켜보니 요즘 청춘들의 사랑의 유통기한은 확실히 예전보다 짧아졌다.



헌 사랑과 새 사랑의 교차로?

<우리도 사랑일까?>는 오래된 사랑과 새 사랑의 교차를 담고 있는 영화다. 그저 불륜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새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져 헌 사람과 이혼하고 새 가정을 꾸리지만, 새것이라고 사랑의 그 유통기한이 다르겠냐고 대놓고 묻는 영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결혼 5년 차 부부가 있다. 아내 마고는 프리랜서 작가이고, 남편 루는 푸근한 인상의 요리사로 오랫동안 닭 요리를 주제로 책을 쓰고 있다. 그 부부는, 그들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아는 사람에게도 행복해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마고는 비즈니스 여행 중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대니얼이라는 남자에게 강하게 끌린다. 그런데 하필 그 남자, “영화처럼” 앞집에 산다. 이후 마고는 5년 묵은 남편과 새로 만난 남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뒷이야기는 스포일러이기도 하고, 말해 봐야 뻔한 스토리니 넘어가자.


연인이 가족처럼 여겨질 만큼 오래 연애해서, 또 결혼해서 애도 키우고 살만큼 살아서, 그렇게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 사이에 에로틱한 긴장을 불어넣고 싶은 커플이 있을 것이다. 여주인공 마고를 위한 궁색한 변명을 해보자면, 마고가 먼저 그런 필요를 느껴 회복을 위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남편은 새로운 닭 요리법을 개발하느라 미처 거기에 반응을 못했다. 그 순간, 마고의 절망이 상상보다 컸다.


이 절망에 대한 공포는 사랑하는 연인, 부부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다. 그렇기에 아마도 젊은 후배 커플들, 강사 노릇하며 봐온 대학생 커플들이 사랑이 식은 거 같다는 느낌이 오면 그 관계를 바로 깨곤 했는지도 모르겠다. 노력이 좌절되는 걸 보는 것보다 차라리 그 노력을 안 한 채 관계를 깨 버리는 것이 상처받지 않고 홀로 되는 비결인 걸까?



권태는 오래됐다고 생기는 건 아니다.

사랑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나,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하고 묻는 젊은 가수 박원의 노래 가사가 자기 마음과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사랑이 식었음을 예감하고, 그로 인해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바람은 같을지 모른다. 다만 비겁함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떤 쪽이 더 비겁한 걸까? 근근이 이어가려는 쪽일까, 냅다 달아나는 쪽일까.


우린 이 답을 찾기 전에 권태가 오래된 사랑에만 찾아온다는 상투적인 생각에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두 장면을 뜯어봐야 한다. 하나는 앞서 말한, 여주인공이 요리하고 있는 남편을 유혹하는 장면이다. 근데 남편은 닭 요리한다고 튕기고 여주인공은 화를 낸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아냐면서 말이다. 두 번째 장면은 새로 결혼한 남자와의 정사 장면이다. 두 사람의 모습에 배경만 바뀌면서 점점 정사의 난이도(?)가 높아진다. 결국엔 소파에 앉아 TV 보는 걸로 끝난다.


두 번째 장면은 흔히들 몽타주 기법이라고 하는데 긴 시간 속에 벌어진 여러 일을 짧게 편집하여 보여주는 기법이다. 관객들은 이미 이런 기법에 익숙해져서 이런 장면을 보면 그 속에서 긴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런 고정관념을 깨면 어떨까? 만약 그 모든 정사의 변화와 변형, 그리고 지루한 소파에서의 휴식까지 며칠 만에 이뤄졌다면?


우린 최소 몇 년이 지나야 권태가 찾아온다고 믿으려 한다. 그래야 사랑에 맘 편히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며칠짜리 연애에 합석하겠나. 그러나 권태는 내일 당장 찾아올 수도 있다. 심지어 오늘 만난 연인에게도.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늘 만난 연인이든, 십 년을 산 부부든 용기가 필요하다. 지루함과 권태를 깰 변화의 순간을 만들 용기. 그래서 첫 번째 장면에서 여주인공이 그렇게 화를 낸 것이다.



마주 봐야 하는 이유

대학교 근처 카페나 지하철에서 만나는 커플 중엔 마주 보지 않는 이들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대부분 마주 보지 않는다. 벚꽃이 필 때라면 또 몰라도 대부분의 커플들은 카페에 앉아서도 스마트 폰을 보고 있다. 스마트 폰 하나로 뭐든 함께 보면 그나마 이해가 갈 텐데 각자의 것으로 각기 다른 걸 본다. 스크롤하는 속도로 봐서는 쇼핑이나 인스타그램 따위를 보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 왜 마주 앉아 있는지 궁금해진다. 사랑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사랑에 막 빠졌을 때만큼 서로를 열심히 봐야 하지 않을까?


연인이, 아니 사람이 마주 봐야 할 이유는 아주 간단한 상상만으로도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잠시 지구 상의 모든 미디어가 사라진다고 상상해보자. 그럼 최초의 미디어였던 인간이 최후의 미디어가 될 수밖에 없다. 모든 미디어가 있기 전, 세상에 모든 정보는 타자로부터 올 수밖에 없었고 타자엔 대한 정보가 유일한 정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미디어가 사라지면 최후의 메시지와 콘텐츠 생산자는 인간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마트 폰은 이 원초적 미디어로써의 인간의 기능, 콘텐츠와 메시지 생산자로써의 원초적 기능을 퇴화시킨다. 그래서 어쩌면 요즘 젊은 친구들에겐 메시지를 생산하고 미디어의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수고로움이 버거울 수 있다. 게다가 메시지와 콘텐츠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수용자도 당연히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인, 나만의 록스타

빌렘 플루서는 <몸짓들>에서 "음악을 감상할 때 신체는 음악이 되고 음악은 신체가 된다."라고 했다. 사랑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한 순간 사람은 사랑이 되고, 사랑은 사람이 된다. 그렇다. 사랑하는 연인은 서로에게 매일 새로운 음악을 들려준다. 마주한 단 한 명의 팬이 그 음악에 열광한다. <라붐>에 나온 헤드폰 장면에서의 그 둘의 마주보기와 그 둘을 위해 흘렀던 음악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둘만 듣고, 둘만 느끼고, 그 음악에 몸을 맡긴채, 그렇게 오래 몸을 부대끼며 춤추고. 그러나 연인이 마주 앉아 스마트 폰이나 보고 있으면 이런 열광의 시간은 없다. 아니 열광의 시간이 끝난 뒤 스마트폰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인지도. 더 이상 열광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음악이 지루해진 것일까?


우리는 연인과 친구와의 만남에서 했던 일을 기억한다. 밥 먹은 거, 차 마신 거, 영화 본 거. 그러나 그 하는 도중에 지었던 타자의 표정, 웃음, 목소리, 손짓, 감촉 등은 기록되지 않는다. 그런 기억은 성과로 기록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 없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사람은 그 자체로 메시지다. 기록되지 않은 순간, 들리지 않은 음악, 메시지 없는 표정에 주목해야 한다. 듣고, 보고, 품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또 사랑받는 사람으로 오래 존재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어쩌면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되는 것은 록 음악의 팬이 되는 과정과 비슷할지 모른다. 록을 모르는 이라도 록 페스티벌의 광기에 젖을 수 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한 여름 우연히 접한 그 페스티벌의 열기,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오직 무대 정면을 바라보며 열광하는 시기가 어쩌면 사랑에 막 빠졌을 때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지속은 한 뮤지션, 한 록그룹을 향한 팬의 사랑과 같다. 깊이 알아가는 것이고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아주 긴 상호작용의 시간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BTS와 아미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단순히 노래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뮤지션을 좋아하고, 또 그 수준을 넘어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까지 좋아하고, 결국엔 서로의 생에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 사랑에 빠진 이후에 도래하는 사랑의 시간인 것이다.



상호작용을 위한 훈련

아주 예전부터 이 상호작용을 위한 훈련은 있었다. 중세의 기사들은 연인을 위해 시도 지을 줄 알아야 했고 낭송도 할 줄 알아야 했다. 지난 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고등학교나 교회의 청년들은 문학의 밤을 위해 시도 쓰고 낭송도 해야 했다. 품앗이하듯 이 교회, 저 교회,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면서 이런 행사에 참석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지는 어설픈 시를 들어야만 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메시지를 생산하고 그걸 가만히 수용하고 해석하는 훈련이 일상이던 시절이었고 문학 소년이나 청년이라는 말이 흔하던 시대였다.


이 미디어와 콘텐츠 생산자로서의 훈련, 그 수용자와 해석자로서의 훈련이 안 된 연인들이 사랑의 열정의 식음과 동시에 스마트 폰만 보게 되는 건 아닐까? 마주 보지 않고 스마트 폰만 들여다봄으로써 미디어이자 메시지 생산자로서, 그 해석자로서 격어야 할 피로감을 사전에 차단하는 건 아닐까? 마주 봄을 제거함으로써 감정 피로를 원천 봉쇄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결론은 이렇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연인이 카페에 앉았는데 서로 대화는 안 하고 스마트 폰만 들여다본다면, 그건 어떤 에너지가 다 된 것이라고. 이 결론은 다른 의문을 불러온다. 아니 그럼, 스마트 폰을 하면서까지 왜 마주 앉아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게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의미가 아니라 둘이 함께 있음으로 인해 각자가 사회로부터 획득하는 의미이다. 쇼윈도 부부가 획득하는 사회적 의미의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결혼 15년 차 카피라이터는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피곤한 인생인데 그렇게 전시된 삶을 청춘일 때부터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와 우리를 찾는 유일한 시간

영화의 원제는 <take this waltz>다. 왈츠는 두 남녀가 추는 춤이다. 왈츠가 왈츠답기 위해선 파트너 간의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4,5분의 춤을 추려면, 누가 봐도 멋지게 춤을 추려면 그 춤 이전의 시간, 서로 호흡을 맞추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댄서와 연인의 상호작용은 에너지와 노력, 시간이 동반되는 작업이다. 사랑의 아름다운 순간은 그 상호작용에 들인 시간과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영화 곳곳엔 모든 사랑은 한 때 새 사랑이었고, 그 새 사랑도 세월 가면 헌 사랑이 된다는 메시지가 흩뿌려 있다. 상호작용의 시간과 그 가치에 대해선 스쳐 말할 뿐이다. 젊은 가수는 사랑은 노력하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 사랑을 이어가고 싶으면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노력의 본질, 그것으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한 철학자의 러브레터에서 찾을 수 있다.


앙드레 고르스는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 평한 프랑스의 정치 철학자이자 프랑스 대표 주간지「누벨 옵세르바퇴르」를 공동 창간한 언론인이다. 그는 아내가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불치병에 걸리자 1983년부터 모든 활동을 접고 아내를 간병했다. 그가 여든세 살에 여든둘의 아내에게 쓴 편지를 책으로 옮긴 것이 <D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 편지에 담긴 사랑의 사연 속에서 긴 사랑의 가치와 만날 수 있다. 앙드레 고르스는 아내에게 “당신은 내 부족함을 메워주는 타자성의 차원으로 나를 이끌어주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아내 도린은 결혼을 망설이는 앙드레 고르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함께할 것들이 우리를 만들어갈 거라고요.”라고.


우린 어쩌면 사랑을 통해 비로소 “나”를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통해 비로소 “우리”라는 단어의 참된 의미를 구축해 나가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렇게 흔하게 쓴 말, 우리가 진짜 우리라는 의미를 찾는 순간은 사랑을 통해 두 사람이 나도 당신도 아닌 다른 차원의 인간이 되어가는, 그래서 서로에게 딱 들어맞는 서로의 맞춤형 인간이 될 때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린 사랑에 빠질 때마다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내가 모르던 나를 찾는 데, 우리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데 한 계절로 충분할까? 일 년도 짧지 않을까?



사람은 변하고 사랑은 깊어진다.

사람은 나이 들며 변한다. 그에 따라 사랑도 그 형태가 변한다. 이년 전쯤, 젊은 후배와 <비포 선 라이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비포 선 셋>을 소재로 유튜브 촬영을 하며 이런 내용으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이런 말을 했다. "연애와 결혼의 차이는 겉절이 하고 묵은지 같은 거지. 같은 배추로 만들었지만 형질전환돼서 용도 자체가 다른 거야. 묵은지한테 아삭거리고 새콤하라는 건 무리야. 그 깊은 맛이 싫으면 매번 겉절이 새로 담가야지. 칼국수 집처럼" , 사랑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모든 사람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칼국수집의 겉절이가 아니다. 모든 이를 만족시켜야만 하는, 오늘만 신선하고 맛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결국, 사람의 나이 듦도, 사랑의 원숙함도 받아들임의 문제일 뿐이다.


우린 늙기에 한 사람과 긴 세월을 보내다 보면 그 사람의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아내의 찬란한 젊음은 과거가 됐지만 오늘 여기 내 앞에 원숙한 한 여성, 엄마, 아내가 있다. 어제와 같은 사람은 없다. 우린 모두 죽음과 노화를 향해가니까. 그 원치 않는 변화의 숙명을 함께 겪는 파트너에 대한 연민이 사랑에 새옷을 입히고 있다.


딸과 함께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어느덧 그걸 보면서 웃고 있는 딸을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매운 음식을 먹다가 고개를 들어, 매운 걸 먹으면 콧등부터 땀이 맺히는 아내의 얼굴을 한참 보곤 한다. 두 여자가 똑같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본다. 말하지 않아도 두 여자는 내 시선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고 있다. 시선은 말보다 수다스럽다.



*사진은 몇 해 전 겨울, 황룡사 역사문화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앞모습을 찍으면 사진 못 찍는다고 두 여자가 하도 타박해서 종종 이렇게 몰래 뒷모습을 찍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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