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위로 13. <코코(2017)>, <스모크(1995)>
누이는 충북 청원에 산다. 마흔에 만난 남자와 딸 둘을 낳아 키우며 작은 반찬 가게를 하며 산다. 사는 걸 본 적은 없다. 사진 몇 장만 봤을 뿐이다. 누이를 마지막으로 본 건 2006년, 내 결혼식 때였다. 그 전까지 십 년 넘게 보지 못했고, 그 후 다시 십 몇 년 간 누이를 만나지 못했다. 살아 있고 행복하다는 건 알고 있다.
사진 속 누이의 얼굴은 좀 피곤해 보이나 겨우 평화를 찾은 듯 하고, 두 조카의 얼굴엔 구김살이 없다. 매부는 부리부리한 눈매에 그을린 얼굴이고 산전수전 다 겪은 사내가 지을 수 있는 주름 깊은 미소를 갖고 있다. 내 딸과 조카 둘은 한 살 터울들로, 차례대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누이의 삶을 요약하는 건 내 능력 밖이다. 누이가 넘어온 생의 굴곡과 끈덕지게 맞서온 인생의 파도에 대해선, 그것에 대해 대략 알고 있는 내가 듬성듬성 해 준 이야기를 한참 들은 감독이 한숨처럼 뱉은, "완전 소설 아닌교."라는 탄식으로 대신하련다.
평온한 가족사진을 다시 본다. 누이도 어미의 역사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라와 민족의 역사가 그 공간과 고유의 시간이 필요하듯 개인의 역사 또한 그렇다. 내가 한 번도 살 것이라고는 상상 못해본 부산에 살며 가족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누이 또한 상상치 못했던 장소인 청원을 수도 삼아 어미와 가족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어 앨범을 채워가면서.
그렇게 만들어오다가, 문득 이전의 역사를 돌아봤을 것이다. 그러다 누락되고 빠진 조각들의 큰 공백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처 역사 따위를 기록할 생각도 못했던, 홀몸을 이끌고 이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 때에는 깨닫지 못했던 그 공백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
재작년 초, 누이에게 메시지가 왔다. 아버지의 사진이 있는지, 있다면 한 장 보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사진은 한 장뿐이다. 1977년이나 78년, 누이와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아버지가 함께 찍힌 사진이다. 장소는 창경원. 아직 동물원일 때다.
누이는 코코아 색 코듀로이 원피스에 흰 색 블라우스를 받쳐 입었다. 신발은 노란색 샌들이다. 난 빨간색 폴로셔츠에 하늘 색 반바지, 흰색 스타킹을 받쳐 신었다. 샌들은 파란색. 아버지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하늘색 여름 정장이다. 흰 색 셔츠의 깃은 재킷의 라펠을 덮었고, 그 기하학적 무늬가 눈에 띈다. 흰색 양말을 신었고 오래 된 사진으로도 그 촉감이 전해지는 검은색 스웨이드 더비 구두를 신었다. 아버진 정원 석축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있고 난 아버지와 마주서 있다.
사이에 놓인 동그란 양은 도시락에는 밥이 담겨 있고 그 뒤에 환타 병이 보인다. 누이는 아버지가 두려운 듯, 내 뒤에 숨듯이 선 채 도시락을 향해 젓가락 쥔 오른손을 길게 뺐다. 어머니는 사진 속에 없다. 삼각대가 없어 어머니가 찍었을 지도. 이 사진이 아버지, 나, 누이가 함께 찍힌 유일한 사진이다. 누이와 함께 찍힌 사진도 이게 유일하다. 누이와 어머니, 누이와 아버지, 나와 아버지가 찍힌 사진도 없다. 당연히 네 식구가 함께 찍힌 사진도 없다. 사진을 휴대폰으로 찍어 누이에게 보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은 없었으니 애도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딸에게 살갑지 않았던 아버지가 새삼 그리워졌거나 보고 싶어서도 아닐 것이다.
부모의 시간 속에서 가족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누이도 아이들에게 그 앞의 시간들, 즉 부모 이전의 시간과 역사를 보여줘야만 했을 것이다. 나 또한 딸이 초등학교 들어간 이후, 수도 없이 그런 질문을 들어야했다. “아빠의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어?”
사진 속 사내는 겨우 스물일곱, 여덟이다. 응석받이로 자라 애비 노릇이 서툴렀고 그 서투름은 원숙함으로 나아가지 않아 여럿의 삶에 흉터를 남겼다.
<코코>는 사진과 기억에 관한 영화다. <코코>를 본 관객이라면, 제단 위에 사진이 올라가지 않은 영혼은 ‘죽은 자의 날’에 살아 있는 가족들 곁으로 갈 수 없다는 것과 주인공 미겔이 증조할머니 ‘코코’를 위해 부른 <기억해줘>라는 노래, 그리고 그로인해 할머니가 기억을 되살리고 말을 하는 장면이 인상에 남을 것이다.
<코코>에서 사진과 노래는 기억되어야만 하는 이의 필수 조건이고, 기억해야만 하는 이의 작은 불씨다. 이 필수조건과 불씨의 절대성은 미국의 일반 가정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미국 사람의 집엔 <코코>에 나온 제단처럼 많은 사진이 전시 되어 있다. 우리처럼 결혼사진이나 애 돌 사진 몇 개만 붙어 있는 수준이 아니고, 액자를 세울만한 공간만 있으면 빽빽이 세우고, 벽에 붙일 만한 여백만 있으면 빈틈없이 붙인다. 그곳엔 산 자와 죽은 자의 사진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코코>에서 본 제단,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나도 그 밀집 된 사진의 전당을 목격한 적이 있다. 5년 전 텍사스 어머니 집에 갔을 때, 집 안 곳곳, 방방마다 넘쳐나는 사진들 속에서 카피라이터 초년병 시절에 찍힌 내 사진을 발견했다. 나에게도 없는 내 사진이었다. 물론 내 딸과 아내, 우리 식구의 사진도 곳곳에 있었다. 심지어 딸의 사진은 출산 직후 찍힌 사진부터 있었다.
이렇게 미국인들이 사진에 집착하는 건 그 큰 땅덩어리로 인해 집을 떠난 가족과 만나는 것이 우리만큼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 땅 사람들에 새겨진 이민의 역사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로인해 이들은 더 가족의 역사에 매달리는 것이고, 집 안 가득한 사진의 모자이크는 가족과 이민자들의 뿌리를 잃지 않고자 하는 강박적 노력일 것이다. 결국 그 사진들은 가족의 역사의 기록이자 기록으로 써내려간 역사다. 일종의 아카이브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할리우드 불륜 영화에서 불륜남이나 불륜녀의 집에는 사진이 거의 없고, 건실한 가정에만 잔뜩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대조하여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그 극명한 대조를 통해 지켜온 사랑과 가족의 역사의 가치의 소중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불륜의 비윤리성과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일탈과 그 일탈이라는 찰나의 덧없음을 보여주려 하는지도 모른다.
사진은 죽은 자 뿐만 아니라 여기 없는 이, 멀리 있는 이도 이곳에 소환한다. 명절마다, 가족 행사 때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이 자리에 없는 모든 이들을 이야기를 통해 부활시킨다. 그 소환과 부활의 반복은 떠나온 땅에 두고 와야 했던 역사, 감수할 수밖에 없던 단절 된 역사를 극복하기 위함이고, 이민 온 땅에서 새롭게 써가는 역사이자 구전으로 만드는 족보다.
가정이 한 집에서 정착한 시간이 오래 될수록 그 집은 늘어나는 사진과 함께 기억의 제단이 된다. 더 나아가 가족의 역사가 가늠되는 유적지이자 박물관이 된다. 그곳은 기억의 제단이자 부활의 전당이고 가족의 성곽이다. 미국에서의 명절은 이 성곽의 유지 보수를 위해 흩어져 있던 일꾼을 모으는 날이다.
가족이 모두 모이는 날, 그 자리에 없는 이와 먼저 죽은 자는 모인 가족들, 살아 있는 가족들이 바라보는 사진과 이어지는 이야기의 육신을 입어 때마다, 철마다 부활한다. 그래서 귀향은 미국의 모든 살아 있는 이들이 짊어진 명절의 책임이다. 그 책임은 각자가 기억하는 이야기마다 다른 옷을 입고 부활하여 가족 곁에 존재할 죽은 이에게 입힐 이야기의 육신을, 자기 기억 몫의 육신을 만들 책임이다. 많이 모일수록, 많은 육신이 주어지고, 죽은 이는 더 오래 산자 곁에 머문다.
코로나 시대의 첫 해, 추수감사절에서 크리스마스로 이어지는 시기를 앞두고 앤서니 파우치 소장이 TV에 나와 여행 자제를 호소해야만 했던 것은, 전염병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부모의 집으로 향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코코>는 멕시코의 노래와 색을 빌려온 가장 미국적인 영화일지 모른다.
<스모크>도 <코코>와 같은 이야기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 기억이 담긴 사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사는 장소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어떤 극적인 이야기도 없지만 모든 이의 극적인 순간이 담겨 있다.
영화 속엔 크게 세 개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가 폴과 담배 가게 주인 오기 렌이 엮어간다. 하나의 이야기는 폴과 엮인 콜이라는 흑인 소년이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아버지에 접근해 가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18년 만에 오기 렌을 찾아와 당신이 모르는 딸이 있음을 옛 연인이 말해 준 뒤 오기와 그 딸이 만난 후의 이야기, 또 하나는 오기 렌이 오래 전에 겪은 이야기로 한 좀도둑이 담배 가게어서 물건을 훔쳐 도망치다 지갑을 흘리게 되고, 오기 렌이 그 지갑을 주워서 주소를 확인한 뒤 그 지갑의 주인을 찾아가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애쓰거나, 때로는 기억되기 위해, 그래서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오기의 사진은 한 장소의 같은 순간을 담는다. 이야기가 넘치는 곳이라고 말했던 브루클린의 어느 한 모퉁이, 그곳을 매일 같은 시간에 찍는다. 그의 사진은 자기 자신의 기록이자 모두의 기록이다. 그 무심한 기록은 그 사진에서 특별한 날, 특별한 사람, 특별한 순간을 발견한 사람에 의해 특별한 사진, 발견한 이의 이야기가 된다. 폴이 자신의 담배를 사러 가던 만삭의 아내의 모습을 발견 했을 때처럼.
오기는 매일 같은 곳을 찍으면서 이 카메라를 훔쳐 보관했던 좀도둑인 흑인 소년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그 흑인 손자라고 착각하고 식사를 차려준 눈이 안 보이는 흑인 할머니와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 밤에 대한 기억을, 갚을 수 없는 빚처럼 간직한 채 말이다.
오기는 사진을 통해 매일의 이야기를 저장하는 사람이고 폴은 그 평범한 순간에 깃든 특별한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다. 그 둘의 만남은 이야기를 저장하는 자와 만드는 자의 만남이자, 그 이야기를 통해 구원 받은 사람들의 만남이다.
그 구원은 모든 이에게 필요하다. 인생의 여정이 아무리 험하고 고독해도 끝끝내 살아내게 하는 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원의 힘이 사진 한 장에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인생이 우리에게 내 던지는 모든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은 날 기억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진 한 장을 품 속에서 꺼내 들고 내게도 소중히 기억해야할 사람이 있음을 되새기며, 내가 기억하는 이 또한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으로 위로를 받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럿이 담긴 한 장의 사진 속에서도 ‘누군가’는 나와 당신의 얼굴만 본다. 수백 명이 찍힌 사진에서도 나와 당신은 ‘누군가’에 호명되어진다. 이를 통해 나와 당신이 기억된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누군가’를 구별해내어 특별히 호명해낼 수 있는 한 사람의 기억은, 그'누군가'가 땅에 발을 디디고 사는 것만큼이나, 그 '누군가'를 익명으로 남기지 않은채, 그 누군가의 실존과 현존의 이유를 담보해준다.
그래서 <코코>와 <스모크>의 이야기는 실존의 구원의 이야기다. 기억되는 이도, 기억할 사람이 있는 이도, 그래서 사진에 찍힌 이도, 그 누군가의 사진을 무슨 일이 있어도 버리지 못하고 소중히 간직하는 이도, 그들 모두 그 “기억해줘”라는 외마디 부탁을 할 사람이 있고, 그 부탁을 마음에 품고 있기에 살아 나갈 수 있음을 말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런 부탁을 할사람도, 그 부탁을 받은 적도 없는 이가 받을 수 없는 위안, 이 넓은 세상에서 난 홀로이지 않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그 특별한 위안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구원하며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결국, 고독사가 가장 비인간적인 죽음인 것은 죽기 전에도, 죽는 순간에도, 죽은 이후에도 아무도 그를 기억한 적도, 기억하지도, 추모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에 있다. “기억해줘”라는 부탁을 어느 누구에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2019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삼일 밤, <스모크>의 원작인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그가 직접 쓴 시나리오를 다시 읽었다. 아내가 일하는 병원에서, 독감에 걸린 딸의 병상을 지키면서.
내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밤을 지새운 첫 번째 크리스마스였다. 그 전에 딱 한번 여자의 곁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있었다. 교회에서 좋아하던 여학생 곁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몇 시간을 보냈었다. 그 소녀는 해가 바뀌면 부산으로 이사를 가야 했던 옆집 소녀였다.
긴 세월이 흐른 후 서른 즈음에 그 소녀를 다시 만나 결혼을 해서 딸을 낳았고, 그 딸의 곁에서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책과 병실 창문으로 보이는 장산의 사진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 뒀다. 아마도 평생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다. 어쩌면 딸이 연애를 할 때도, 결혼을 한 뒤에도, 애를 낳은 후 첫 번째 겨울을 맞을 때도 이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렇게 가족의 역사의 한 페이지에 한 편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써졌다.
그러나 그 이전의 이야기들은 없다. 초등학교 소풍 때마다 카메라를 가져온 친구 옆에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나마도 두어 장뿐이다. 그 후로도 사진을 찍을 만한 순간도, 카메라도 없었다. 사진의 누락으로 개인사 기록의 절반이 없다. 이십여 년 분량의 사진이 없거나 드문 것이다.
어찌 보면 내 역사는 아내를 만난 이후, 그녀에게 사진을 찍히기 시작한 이후부터 기록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내는 많이 찍고 묵묵히 저장한다. 디지털 사진이 소멸 될 것을 우려해 그 사진들을 편집해서 앨범으로 만드는 곳에 보내어 책자로도 만든다. 그 덕에 얇은 졸업 앨범, 웨딩 앨범 같은 가족의 사진 책이 몇 권 꽂혀 있다. 그 사진들은 우리 가족의 역사다. 딸과 함께 찍힌 많은 사진은 우리의 기억이고, 그 기억과 기록 속에서 딸과 애비의 역사가 깊어지고 있다.
그 깊이와 무게를 체감하기엔, 딸은 아직 어리다. 내 누이, 제 고모처럼, 딸도 자기 가족의 역사를 만들어갈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그 가족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애써 왔을 부모의 수고가 체감 될 것이다. 그 순간이 찾아오면 소위 철들었다는 소리를 들을 테고, 가수 김진호의 <가족사진>과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의 첫 소절만 들어도 눈시울을 붉힐 것이다.
우리 남매의 역사 기록은 반절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아이들의 역사는 꼼꼼히 만들어지고 있다. 조카들은 느긋한 충청도 사투리를 쓸 것이고, 내 딸의 부산 사투리는 이미 억세어 졌다. 그 누적의 패인 길을 따라 아이들은 안정적으로 나아가며 자신의 삶의 궤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서운한 것도, 응어리도 없다. 그저 오래 전의 어긋남으로 인해 긴 세월, 다른 궤적을 그리며 살아냈고, 그로 인해 한참을 마주치지 못했을 뿐이다. 누이를 사랑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이가 이 땅 어딘가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음에 안도한다. 누이를 닮은 딸, 내 조카가 잘 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다만, 아직 얼굴을 마주하고 그 세월의 공백을 뛰어넘을 자신이 없어, 그저 사진을 보며 안도하고 또 안도할 뿐이다. 둘 다 살아왔구나 하는.
작년 말, 누이가 화상통화를 하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조카들이 삼촌을 보고 싶어 한다면서 말이다. 조만간, 다음에 하자며 미뤘다. 언젠간 해야 할 것이다. 사진으로 서로의 삶을 확인했으니 영상 통화를 통해 생동감 있는 순간을 나누는 것이 다음 순서일 것이다. 그 후, 언젠간, 아이들을 앞세워 어색함을 무릎 쓰고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조카들이 궁금하다. 그러나 선뜻 가기가 어렵다. 인근 지역에서 간만에 대학동창이나 대전의 은사님을 만나 술에 취했을 때, 촬영차 감독과 그 인근 지역을 배회할 때, 그 때 어쩌면 온 김에, 술기운에 의지해 청원으로 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불쑥 찾아간 누이 집에서 말없이 몇 잔의 술을 마신 후 옛사람과 옛 도시들의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서로의 어긋나는 기억과 맞아 떨어지는 기억들을 맞춰보며 잠시 웃을 것이다.
얼마 전, 딸이 입다 작아진 옷을 택배로 보냈다. 받은 누이가 기억해 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내 왔다. 아직 답장을 못했다. 글을 쓰는 김에, 누이를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겨울 어쩌면, 사랑한다, 그립다는 말보다, 기억하고 있다, 잊은 적도 잊힌 적도 없다는 말이 더 절실한 사람이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