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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삶, 남겨진 삶

영화의 위로 9 . 드래프트 데이(2014)

by 최영훈

<드래프트 데이>는 <제리 맥과이어>나 <머니볼>,<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처럼 프로 스포츠를 소재로 하지만 경기 장면이 거의 없는 영화다. 이 영화들의 주인공은 선수가 아닌 단장, 에이전시, 스카우터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선택 하나로 선수와 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드래프트 데이>는 이 운명의 전주곡 같은 날이다. 영화엔 NFL팀들이 실명으로 등장하여 바로 이날, 미식축구 팀들의 신인 지명이 있는 이 하루의 긴박감을 실감나게 한다.


드래프트 제도는 프로스포츠의 신인 선수 선발 방법 중 하나로 성적의 역순으로 선수 지명권을 갖는다. 그 해의 우수한 아마추어 선수가 해당 시즌에 성적이 나쁜 프로 팀에 선택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면 리그의 실력 평준화를 가져와 전체적으로 리그의 수준이 높아지고 경쟁력도 강화 될 수 있다.

또 팬의 입장에서는 응원하는 팀의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팬의 이탈도 막을 수 있다. 재미있는 건 이 드래프트 제도를 미국의 미식축구 리그 NFL에서 1936년에 처음 도입했다는 것이다. 가장 미국적이자 상업적인 프로스포츠에서 성적의 평준화를 위해 이런 제도를 만들었다는 건 아이러니다.


심난한 하루의 시작

주인공 써니 위버는 만년 꼴찌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단장으로 그의 아버지는 연습구장의 명칭이 될 만큼 전설적인 감독이었다. 드래프트 데이를 앞두고 나름 전문가를 자처하는 스포츠 평론가와 언론, 팬이 원하는 선수와 단장이 원하는 선수는 엇갈린다. 당일 아침엔 몰래 사내 연애 하던 애인의 임신 소식도 알게 되고, 여기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추모식을 오늘 꼭 연습구장에서 해야만 한다는 어머니의 성화까지 겹쳐져 긴장 된 하루가 더 심난하게 흘러간다.


설상가상, 감독까지 툭하면 어깃장이다. 이 감독은 전국구 인기 팀인 달라스 카우보이스를 우승시켰지만 그 다음해에는 성적이 안 좋아서 쫓겨난 후 비인기 팀인 브라운스에 온 사람이다. 그러나 명문 팀을 우승 시켰다는 자부심과 자존심은 살아 있어서, 단장의 의사결정에 툭하면 딴죽을 건다.


이번 드래프트의 가장 핫한 선수이자 팬들이 원하는 선수는 하이즈먼 트로피(대학 최고 선수상) 수상자인 위스콘신 대학의 백인 쿼터백 보 캘러한이다. 하지만 감독은 신인 쿼터백은 허둥대다가 경기를 망친다며 그 선수를 뽑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선수를 뽑아줄 것을 강요한다. 아니 여차하면 팀을 떠나겠다는 뉘앙스까지 풍기며 반 협박을 한다.


훈수꾼이 너무 많다.

영화 속 DJ의 멘트처럼 클리블랜드는 스포츠의 도시다. 아니 스포츠 말고는 딱히 내세울 게 없는 도시다. DJ 말 그대로 해변이나 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알만한 랜드 마크나 관광지도 없다. 르브론 제임스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이끌 때, 그 훨씬 전에 거구의 백인 강타자 짐 토미가 홈런을 쳐 내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MLB뉴스의 헤드라인에 올려놓았을 때 말고는 이렇다 할 뉴스도, 사건도, 흥밋거리도 생산한 적도, 생산할 수도 없는 평범한 도시다.


그렇기에 도시의 스포츠 사랑은 종목을 가리지 않는다. 최근엔 UFC 헤비급 챔피언 스티페 미오치치의 열렬한 열광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챔피언은 마침 클리블랜드에서 열렸던 타이틀전을 승리로 이끈 뒤 클리블랜드가 있는 주인 고향 오하이오를 크게 외쳐 애향심을 드러냈다. 그 시합 후 며칠만 쉬고 직장인 소방서로 출근할 정도로 자기 지역과 직업을 사랑하는 챔피언이니 이런 사자후는 당연할 것이다.

이렇게 스포츠가 종교인 도시엔 훈수꾼이 많다. 당연히 단장의 의사 결정엔 외풍이 거세다. 팀에도 이미 열 명 가까운 스카우터가 있고, 구단주와 감독을 포함해서 기타 경영에 영향을 주는 미디어와 광고주의 입김 또한 강력하다. 그렇다고 이쪽저쪽 의견을 듣고 단장이 심사숙고해서 그 해에 가장 탐나는 선수, 능력 있는 선수를 뽑는다고 해서 팀과 선수의 성공이 보장 되지도 않는다. 이런 불안한 선택의 하루, 외풍은 거세고 대안은 많다. 그러나 훈수꾼은 선택도 하지 않고, 그 선택의 결과의 책임도 지지 않는다. 선택도, 그 선택의 결과도 오롯이 단장 책임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하루가 드래프트 데이다.


좋은 선택의 확률을 높일 수 있을까?

이 선택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팀과 단장은 두 가지에 의존한다. 하나는 경험, 다른 하나는 스탯(Stat)이 포함 된 스카우팅 리포트다. 그리고 여기에 은밀한 뒷조사를 참고한다. 경험은 일종의 노련한 전문가의 감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런 감을 가진 코치, 감독, 스카우터와 같은 베테랑들은 앞서 언급한 스포츠 영화들에 공통적으로 나온다. 이들은 모두 과거 선수로 뛰었던 경험, 오랜 시간 스카우터를 한 경험, 가르친 선수 열 명 중 한 두 명을 성공 시킨 경험들을 갖고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미지의 신인들을 평가하고 단장에게 조언한다.


이런 사적인 경험을 보충해주는 것이 스카우팅 리포트다. 스카우팅 리포트는 숫자와 평판이 포함된다. 실제로 미식축구 최악의 드래프트 실수 중 하나로 뽑히는 선수의 스카우팅 리포트를 본 적이 있다.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스카우터들이 작성한 것이었는데, 이 팀은 당시 주전 쿼터백인 톰 브래디가 마흔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 새로운 쿼터백이 필요하여 그 해의 대학 선수들을 면밀히 관찰했었다.


내가 본 리포트는 당시 최고의 대학 리그 쿼터백이자 ‘쟈니 풋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던 텍사스 A&M대학의 쟈니 멘지엘(Johnny Manziel)에 관한 리포트였다. 쟈니 멘지엘은 전국에 생중계 됐던, 당시 랭킹 1위 팀이었던 앨라배마 대학과의 경기에서 미친 활약을 보여주며 일약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게다가 그 해의 활약으로 하이즈먼 트로피도 수상했다. 물론 그 활약과 명성에 거품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따라다녔다.

리포트는 그 거품의 내면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다. 부유한 석유 재벌 집안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응석받이로 키우는 바람에 버르장머리 없는 놈(spoiled brat)으로 자랐고, 대학 시절 일으킨 문제들을 고려했을 때 그를 스카우트하려면 그의 미성숙함(maturity), 건방짐(Cockiness), 경기장 밖에서의 행실(Off-Field Behavior)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적고 있다.


쟈니 멘지엘 스카우팅 리포트 앞면
스카우팅 리포트 뒷면

이런 스카우팅 리포트 때문인지 2014년 드래프트에서 그는 22라운드에 가서야, 당시 만년 하위 팀이었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지명을 받는다. 불행히도 이 리포트의 내용은 대부분 들어맞아서 지금도 NFL드래프트 흑역사를 꼽을 때, 특히 브라운스의 흑역사를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례로 거론 될 정도로 엉망인 성적을 남기고 방출됐다.



선택은 왜 실패할까?

영화에는 이 내용이 살짝 비틀어져 나온다. 1순위가 유력한 보 캘러한도 백인이고 유명 스타다. 실력과 외모,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한 경험 많은 스카우터가 뒷조사해서 알아낸, 그의 생일 파티 얘기를 꺼낸다. 그의 생일 파티가 너무 요란했던 나머지, 주민 신고가 들어갔다. 경찰이 출동해서 참여한 학생 명단을 다 적었는데 그 명단엔 단 한명의 팀 메이트도 없었다는 것이다. 단장은 당연히 위스콘신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해보지만 감독이 사실을 말해줄 리가 없다.


모든 정보는 모호하고 의사 결정 시간은 숨을 조르듯 다가온다. 이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스포일러를 하자면 보 캘러한도 드래프트 순위가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브라운즈가 뽑지 않았기 때문에.


<머니볼>에서도 볼 수 있지만 최근까지 미국 프로스포츠의 스카우트는 스타성이나 외모, 팀마다 선호하는 스타일 등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그래서 채드 브래드포드 같은 언더핸드 투수는 폼이 괴상하다는 이유로 외면을 받지만, 백인 미남에 피지컬 좋고, 실력도 괜찮은 선수는 고교 시절부터 주목을 받는다. <머니볼>의 주인공 빌리 빈 단장도 그런 선수였다.


이런 경험이나 특정한 팀 문화나 연고 도시의 성향을 바탕으로 선수를 뽑는 것은 미식축구인 NFL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필자가 처음 미식축구를 보던 시절에는 거의 대부분의 주전 쿼터백은 백인이었다. 80년대에는 워런 문 정도가 유일했고, 2천 년대 들어와서야 도노반 맥냅 같은 선수를 필두로 흑인 쿼터백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지금은 거의 반반, 아니 흑인 쿼터백이 주전인 팀들이 더 많다고 느껴질 정도다. NFL이 출범하고 거의 7, 80년이나 지나서야 이런 시대가 온 것이다.


시간은 없고 결과는 두렵다.

미국 야구는 빌린 빈 단장 이후부터 사이버 매트릭스 같은 통계 기법으로 선수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FA 흑역사를 쓰고 있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야구에서 이 통계가 제 구실을 하는 건 그만큼 경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식축구는 대학, 프로 할 것 없이 한 해에 열 예닐곱 경기가 전부다. 그러니 한 시즌이나 한 게임의 반짝임도 크게 보일 수밖에 없다. 검증 할 수 있는 게임의 수는 적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게임의 잔상은 잊히지 않고, 팬과 언론은 샴페인을 한 선수에게 쏟아 붓는 상황이 반복된다. 결국 팀의 운명을 이 반짝임에 거는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실수, 쟈니 멘지엘을 선택했던 브라운스의 실수, 보 캘러한에 쏟아지는 찬사는 심리학의 두 가지 의사 결정 오류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환상적인 한 경기의 기억을 바탕으로 선수를 선택한 회상 용이성의 오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정보는 애써 외면한 채 마음에 드는 정보를 바탕으로 선수를 선택하는 확신의 덫이 합쳐진 결과다.


이런 덫에 안 걸리기 위해 다들 그렇게 애를 쓰지만, 그렇게 애를 써서 뽑을 선수를 애써 정해 놔도 그 날의 선택은 예측할 수 없다. 드래프트 데이 당일엔 엄청난 사건들이 휘몰아친다. 1월말에 슈퍼볼이 열리고, 4월 말에 드래프트가 열린다. 어떤 팀은 우승의 단맛을 보고, 어떤 팀은 형편없는 성적에 팬들로부터 갖은 욕을 먹고 있는 중이다.


단장은 성적의 압박과 스타를 뽑으라는 팬들의 성화를 동시에 받는다. 게다가 선수 선택은 자신의 지명권이 왔을 때 제한 된 시간 안에 해야 한다. 참고로 1라운드 지명 시간은 10분에 불과한데, 라운드가 거듭 될수록 시간은 줄어든다. 이러다 보니 앞선 순서의 단장이 엄청난 실수를 해서 모두가 노리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선수의 지명권이 자신에게 올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짧은 시간에 여러 단장과 통화를 해서 지명권을 미끼로 원하는 선수를 트레이드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당연히 좋은 성적을 낸 팀은 눈독 들인 선수가 지명되지 않고 넘어가길 바라면서 복잡한 드래프트 전략을 짤 것이고, 올 시즌 최악의 성적을 기록 중인 휴스턴이나 디트로이트 같은 팀은 명예 회복을 위한 퍼즐 조각을 찾는데 정신이 팔려 잠시 정신줄을 놓기도 한다. 그러나 팀도 팬도 안다. 선택을 위한 그 모든 노력들이, 그렇게 선택 된 선수가 팀의 다음 시즌 성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무 것도 성공 그 자체를 보장하지 않는 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 선택은 언제나 어렵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전문 스카우터가 있는 프로팀도 쉽지 않다. 하물며 평범한 우리에겐 더 어렵다. 감독이 미팅 자리에서 날 작가나 카피라이터로 소개하면 담당자가 잠시 당황할 때가 있다. 어떤 담당자는 솔직하게 작가는 여자 분일 줄 알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작가나 카피라이터가 여자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는 건, 백인 쿼터백과 덩치 좋은 백인 4번 타자 1루수를 선호하던 시절의 대표성 오류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식의 사람 판단을 아주 흔하게, 쉽게 저지른다. 나 또한 그런 판단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예전에, 머리숱이 없어지기 전에는 제법 머리가 길었었다. 여기에 허름한 야상 같은 옷을 입고 다니다보면 종종 예술 쪽에 계시는 분이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도자기 굽는 분으로 오해 아닌 오해도 받아 봤다. 재미 있는 건, 빠지는 머리카락에 신경 쓰는 게 싫어서 머리를 짧게 자른 뒤에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대학원 다닐 때는 검정고시 전력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엔 지금처럼 지잡대니 뭐니 해서 지방대 출신을 대학원에서 홀대하던 시절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텃세라는 게 있었다. 대전에서 대학을 다녔던 터라 나름 각오를 하고 갔지만 어떻게들 알았는지 내가 검정고시 출신인 걸 알게 됐고, 당시엔 검정고시는 고교 시절, 모종의 문제가 있어서 학교에서 잘린 불량 학생이나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어서 자기들 나름대로 나를, 요즘 말로 일진 출신으로 오해했었다.


덕분에 나이 비슷한 선배들과 편하게 말하며 학교를 다녔지만 돌이켜보면 오해라는 게 참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당시엔 이런 식의 사람 판별이 흔했다. 지금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90년대만 하더라도 부모가 이혼했거나, 부모의 직업에 따라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도 반대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 요즘엔 이런 판단 실수를 줄여보겠다고 결혼정보회사에 등록도 하고, 인터넷을 탈탈 털어 수많은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도 하지만 여전히 선택은 흔들리고, 결과는 예상 밖일 때가 있다.


연애든 결혼이든, 심지어 인생도 프로스포츠에서 선수 선발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프로 스포츠에서 선수를 평가할 때 과거의 스탯(Stat)을 중요시여기는 것처럼 한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과거는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정보와 자료, 전문가의 판단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통계로 예측할 수 없는 기적

커트워너가 보여준 1999년 슈퍼볼의 기적이나 영화 <루키>의 주인공 짐 모리스의 이야기는 그런 과거의 정보나 전문가의 경험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1999년, 슈퍼볼은 그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아이오와의 한 마트에서 일하던 무명의 쿼터백이 주인공이었다. 그는 그 게임에서 35번, 총 414야드의 패스를 성공시켰다. 이 기록은 2017년 톰 브래디가 깰 때까지 슈퍼볼 최고의 패싱야드 기록이었다.


커트워너는 철저히 무명이었다. 유명하지 않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왔고, 1994년 드래프트에선 선택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트라이아웃을 통해 소위 연습생 신분으로 그린베이 패커스에 들어갔지만 거기엔 이미 브렛 파브라는, 후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확고부동한 주전 쿼터백이 있었고, 심지어 백업 쿼터백의 면면도 화려했다.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패커스에 일 년을 보낸 후 그는 어디로 갔을까? 고향에 돌아가 한 마트(Hy-Vee grocery store)에서 창고 정리 일을 한다.


그 후 하부리그와 유럽 리그를 전전하다 98년 세인트루이스와 계약을 하게 된다. 물론, 당시 몸값이 1650만 달러에 달했던 주전 쿼터백 트렌트 그린의 백업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시범경기 기간에 주전 쿼터백이 큰 부상을 당하게 되고 커트 워너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그때부터 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시즌이 펼쳐진다.

사실 미국 프로스포츠에서 이런 일은 흔하지 않다. 특히 미식축구 선수는 수명이 짧기 때문에 이십대 초반에 두각을 나타나내서 삼십 대 중반에 은퇴를 한다. 몸을 더 많이 부대끼는 라인맨이나 러닝백은 은퇴가 더 빠르다. 그런데 커트 워너는 대학 졸업 후 5년을 기다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71년생이니 99년이면 조만간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니 다른 일을 찾아볼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백업도 마다하지 않고 계약을 했고, 팀을 슈퍼볼 우승으로 이끌었다.


94년 드래프트에서 모든 팀의 단장과 스카우터들이 왜 커트 워너를 못 봤는지는 모른다. 대학 3학년 이후 선수에게만 드래프트를 허락하는 NFL규정은 즉시 전력감을 뽑는다는 의미가 있다. 프로야구처럼 키워서 쓰거나 고쳐서 쓴다는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커트 워너는 즉시 전력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또 무명의 대학 에서 쌓은 대학 시절의 스탯이 저평가 됐을 수도 있다. 팀의 미래를 위한 선택으로도 부적합하다고 평가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5년 후에 꽃을 피웠다. 1994년의 드래프트 관련자 그 누구도 그 꽃이 5년 후에 필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루키>의 짐 모리스의 이야기는 더 극적이다. 짐 모리스 역시 99년도, 템파베이 데빌 레이스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를 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텍사스의 한 평범한 선생님이었던 사람이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원정 경기에 등판하면서 졸업 후 십여 년 만에 프로의 인생을 열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 백마일, 시속 160킬로미터에 가까운 강속구를 뿌렸었다. 영화 <더 루키>에 이 이야기가 담겼다.


<루키>는 유전에 투자한 수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한 남자가 자신의 땅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고 확신하여 두 수녀에게 투자하라고 설득한다. 두 수녀는 그에게 투자를 한다. 아무리 파도 석유는 안 나오지만 수녀들은 오히려 축복을 했는데, 결국 석유는 나오더라는 이야기다. 소년 짐 모리스가 이사 간 텍사스 한 작은 동네의 전설 같은 이야기인데, 스포츠 용품점의 주인은 야구를 하겠다며 야구 용품을 찾는 소년의 무모함을 지적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결국엔 꿈이 이뤄지는 이야기가 되 버렸다.



살아온 내가 살아갈 나를 막지 않도록

인생을 살았고 인생이 남았다. 남의 인생도, 내 인생도 겪을 만큼 겪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든 남에 삶이든 과거의 삶으로 남은 삶을 함부로 예측하지는 말자. 화려했던 대학 시절의 한 게임이 프로에서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처럼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남은 인생의 실패의 징후는 아니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둬서도 안 된다.


어쩌면 인생의 고비마다 이런저런 외풍에 시달렸거나,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훈수꾼에 시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외풍은 지나가고 훈수꾼은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머니볼>의 빌리 빈 단장도, <드래프트 데이>의 쏘니 위버 단장도 스스로 선택하고 모든 걸 책임질 뿐이다. 그게 단장의 삶이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이다.


트루만 대통령의 책상에 놓였다는 말처럼 모든 책임은 내 선에서 끝나는 것이다(The buck stops here!). 이 말처럼 드래프트 데이 아침, 쏘니 위버는 꼭 본테 맥이라는 선수를 뽑겠다고 다짐하는 메모를 써서 주머니에 넣고 출근했다. 그랬기에 수많은 잡음과 훈수와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사람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실존주의적으로 얘기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하나의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지 고정 된 본질이나 과거로부터 연유한 현재가 존재의 전체는 결코 아니다. 사르트르의 말을 또 인용하자면 “사람은 다만 그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그대로일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원하는 그대로”이다.


우리에겐 아직 남은 삶이 있다.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이 한해는 다르게 기억될 것이고, 그 한 해를 살아낸 나 또한 다른 나로 기억될 것이다. 영화 <루키>의 이야기처럼 조금만 더 참고 파면 석유가 나올지도 모른다. 다쳤던 팔은 이미 나아서 강속구를 던질 수 있을지 모르고, 팀을 구원할 마무리 투수가 될지도 모른다.


커트워너가 지명 받지 못한 1994년 NFL 드래프트에서 전체 세 번째 픽이자, 쿼터백 중 가장 높은 순위로 뽑힌 선수는 히스 슐러였다. 그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스탯을 남기고 99년에 은퇴했지만 최근 하원의원이 됐다. 지금, 누구의 삶이 훌륭한가에 대한 질문은 의미 없다. 아주 먼 미래, 두 사람 모두 그저 열심히 선택하며 살아냈던 사람이었다고 기억 될 것이다.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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